유행어에 비친 관료사회 속내
  • 金芳熙 기자 ()
  • 승인 1995.07.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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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부동’에서 ‘경제 실세 6·3·1’까지 세태 따라 변천
김영삼 대통령의 임기가 절반으로 줄어들면서, 닫혔던 관료들의 입이 열리고 있다. 관료들은 김영삼 정부 출범 초기에는 `‘복지부동(伏地不動)’이라는 말이 유행하리만큼, 입과 발이 무거웠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말은 생산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뒷공론에 가깝다. 93년 8월 금융실명제가 전격 실시되고 이듬해 12월 정부 조직이 갑작스럽게 개편되면서 관료들의 입방아는 주로 자신들의 무력감을 토로하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새 정책과 관련된 실무적인 작업은 대통령의 사조직이 다 하고 자신들은 뒷감당만 해야 하는 처지에 대한 한탄이 주를 이루었다.

관료들의 이런 불만은 그들의 총수에 대한 비아냥으로 이어져 때마다 새 유행어를 낳았다. ‘과장급 부총리’ ‘주사급 장관’이 대표적인 예다. 부총리나 장관의 권한을 부여받고도, 정작 하는 일은 과장이나 주사 정도에 불과하다는 비난이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장관급 차관, 차관급 국장 하는 식의 조어가 유행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신조어들은 대단한 자학인 셈이다.

고위직 관료들의 수명이 역대 어느 정부 못지 않게 짧았다 해서 ‘줄 논쟁’도 끊이지 않았다. ‘누구 누구는 튼튼한 줄을 잡아 오래 간다더라’ 식의 설왕설래였다. 물론 그 반대는 ‘썩은 동아줄을 잡았다’는 표현이다.

최근 관료 사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용어는 ‘실세 논쟁’과 관련이 있다. 실세 논쟁은 앞서의 줄 논쟁이 약간 비약한 것이기는 하지만, 특정인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거론된다는 점에서 더욱 잔인하다. 이 논쟁은 이번 정부 들어서 그나마 입지를 확보하고 있는 경제 관료들 사이에서 특히 거세다.

‘6·3·1’이란 표현은 현재의 경제 실세들을 지칭하는 용어다. 경제 정책을 결정하는 힘의 총량을 10으로 볼 때, 6은 한이헌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3은 이석채 재정경제원 차관, 1은 홍재형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장관의 몫이라는 얘기다. 김영삼 대통령이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이던 시절 경제보좌역을 맡았던 한이헌 경제수석은 김영삼 정부 출범 초기부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리라고 예견됐던 인물. 지난해 경제기획원 차관에서 경제수석으로 자리를 옮긴 후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정부 조직 개편과 삼성그룹의 승용차시장 진출 허용에 깊이 개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석채 재경원 차관은 최근에 북한과의 쌀 협상을 주도하면서 도드라졌다. 경제 관료 세계에서는 늘 인정 받는 선두 주자였으면서도 이번 정부 들어서는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었다. 경제기획원 예산실장 당시 고시 동기인 한이헌 수석을 차관으로 모시기도 했다. 금융실명제와 부동산실명제의 주역임을 자처하던 홍재형 부총리는 관료들의 평점과 자신의 평가가 크게 엇갈린다는 평을 받고 있다.

관료 사회의 이런 총평은 김영삼 정부 출범 초기의 예상과는 크게 다른 것이다. 당시에는 경제 정책을 주도할 삼두 마차로 한이헌 경제수석과 박재윤 현 통상산업부장관, 서상목 보사부장관이 꼽혔다. 서장관의 경우는 민정계 출신이라는 점이 탈락 배경으로 거론되지만, 청와대 경제수석을 거친 박재윤 장관의 경우는 뜻밖이다. 이와 관련해 경제 관료들은 박장관에게 ‘백 PPM’이란 호칭을 붙여줬다. 스스로는 영향력을 백 정도로 생각하는데, 사실상은 백만분의 백 정도라는 것이다. PPM(Part Per Million)은 백만분의 1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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