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우리당, 재·보선 참패 ‘후폭풍’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4.06.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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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 재·보선 참패 ‘후폭풍’…조기 전당대회·요직 물갈이 갈림길에
“차라리 확 져버리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6·5 재·보선을 이틀 앞두고 열린우리당의 한 재선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당시만 해도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재·보선 성적을 1 대 3 정도로 예상하고 있었다. 부산시장·경남도지사는 이미 물 건너갔고, 제주도지사는 시간이 흐를수록 역부족이었지만, 전남도지사만은 어떻게든 건질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본즉 믿었던 호남마저 열린우리당을 ‘매몰차게’ 외면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로써 열린우리당은 원내 제1당이 된 지 20일 만에 다시 격랑에 휩싸였다. 현재 열린우리당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조기 전당대회를 치러 당 체제를 재정비하는 것. 다른 하나는 현재의 신기남 당의장대행 체제를 유지하되, 당 중역을 일제히 물갈이하는 등 대대적인 쇄신 작업을 벌이는 것.

이른바 당권파로 불리는 이들은 이 중 후자의 해결책을 선호한다. 마땅히 대안도 없는 상태에서 지도부를 흔들면 자중지란만 날 수 있다는 우려에서이다. 김부겸 이종걸 안영근 송영길 김영춘 임종석 등 재선 의원들 또한 선거가 끝난 뒤 모임을 갖고 “남을 탓해서는 안된다. 선거 결과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라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당내에서는 신기남 의장에 대한 동정론도 적지 않다. 재·보선 당일 아침 신의장은 “당 의장으로서 본 궤도에 오르기 전에 선거가 시작돼 개인적으로 황망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신의장은 재·보선 공천이 모두 끝난 5월19일에야 정식 취임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6월4일 당·청 협의에서 “재·보선 공천에 의견조차 내지 않은 내가 심판받는 것은 억울하다”라고 말했지만 ‘김혁규 총리 카드’라도 꺼내 흔들어본 대통령에 비한다면, 억울하기로는 사실 신의장이 더하다.

더욱이 신의장 본인이 승계직 대표 자리에 연연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주변의 전언이다. 김혁규 총리 임명과 영남발전특위 문제에 대한 처리 방식을 놓고 일부 초·재선 의원들이 당 지도부를 성토하던 6월 초 신의장은 이미 주변에 사퇴 의사를 비친 바 있다. 한 측근에 따르면, 신의장은 의장 직을 수행한다 해도 대행체제로 불안하게 가느니 전당대회에서 당당히 심판받고 가는 편이 낫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신의장은 주변의 만류로 자신의 뜻을 접었다.

이에 대해 비당권파는, 당 지도부가 상황을 안이하게 판단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들은 현 지도부의 문제점을 크게 두 가지로 꼽고 있다. 하나는 제대로 된 전략 기획 및 대처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 한 예로 김혁규 총리 카드만 해도 처음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고 전남도지사 보선 캠프 관계자는 전한다. 그런데 연이어 영남발전특위 구성 논란이 불거지고, 당 지도부가 이에 대해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면서 호남 민심이 확 돌아서고 말았다는 것이다.

비당권파, 전략 부재·권력 쏠림 비난

특위 얘기가 나오고 1주일 만에야 신기남 의장이 “당내에 유령 같은 얘기가 떠돌고 있다”라며 진화에 나섰지만 때는 늦었다. 호남 민심은 이미 국방부 검찰단에 구속된 신일순 대장(한미연합사 부사령관)마저 ‘호남 소외의 단적인 예’로 들먹이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지역 소외론은 제주에서도 먹혔다. 경쟁 후보들은 현정권의 ‘영남 올인 전략’ 때문에 에이펙(APEC)을 부산에 뺏겼다고 열린우리당 진철훈 후보를 몰아세웠다.

비당권파가 지도부를 비판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권력 쏠림 현상이다. 신기남 의장과 천정배 원내대표로 상징되는 당권파가 당내 세력을 고루 끌어안기보다 자기 편만 내세우는 ‘협량(狹量)의 정치’를 펴고 있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일각에서는 열린우리당 초창기 당 의장 선출 방식을 직선제로 할 것이냐 간선제로 할 것이냐를 놓고 부딪쳤던 이른바 신구 갈등의 앙금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당시 천·신·정(천정배·신기남·정동영) 그룹이 직선제를 주장했던 데 반해 당내 중진 상당수는 간선제를 지지했었다. 그러나 조기 전당대회 개최를 주장하는 쪽 또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에 필적할 만한 대안이 없다는 점 때문에 고민스럽다. 이에 당 일각에서는 김근태 의원 출마설도 급속히 대두하고 있다(상자 기사 참조). 대통령이 당·청 분리를 명확히 한 이상 ‘관리형’ 아닌 ‘실세형’ 대표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노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은 당분간 ‘마이웨이’ 모드로 재·보선 상처를 치유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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