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노 충복들 ‘총선 앞으로’ 일렬종대
  • 崔 進 기자 ()
  • 승인 1995.1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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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진출로 ‘5공의 원죄’ 면책 받으려…공천하는 정당·유권자 의식도 문제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 재헌씨가 15대 총선에서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공약 1호로 내걸고 당선된다고 해서 노씨가 12·12나 4천억 비자금설의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전두환씨도 마찬가지다. 그의 심복들이 보스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겠다며 출마해 무더기로 국회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전씨는 5공의 원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즉 현실 정치의 심판과 역사의 심판은 전혀 별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학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현실과 역사를 혼동하거나 현실을 역사로 호도하려는 사람들’이 대거 국민들의 심판을 받겠다며 내년 4월 총선 출마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5·6공 신군부의 돌격대들이 그들이다. 12·12와 5·18 당시 지휘 일선에 있었던 이들은 대부분 전·노 씨의 손가락 하나, 전화 한 통에 총구의 방향을 틀었던 전·노 씨의 충복들이다. 현 정권 들어 ‘팽’당했거나 침묵의 나날을 보냈던 전·노 심복들이 총선을 통해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겠다고 나선 것이다. 당사자들만이 아니라, 정치권마저 지명도가 높다는 이유로 이들에게 군침을 흘리고 있어 5·6공 핵심 인사들의 정계 진출 현상은 부쩍 활발해질 전망이다.

12·12나 5·18에 깊숙이 개입된 핵심 인사들 가운데 현재 15대 총선에 출마할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는 사람은 유학성·이학봉 전 의원과 이종구 전 국방부장관, 김진영 전 육참총장, 김용갑 전 총무처장관, 박희도 전 육참총장, 최평욱 전 보안사령관, 조남풍 전 1군 사령관, 안병호 전 수방사령관, 김진선 전 2군 사령관 등 10여 명에 이른다. 이들은 한결같이 하나회 출신 강경파로 꼽히는 사람들이다. 유학성·김진영·박희도 씨는 12·12 당일 경복궁에 모인 이른바 ‘생일잔치 12인방’의 멤버이며, 나머지 인사들 역시 전·노 씨가 줄곧 밀어주고 끌어준 핵심 참모들이다. 이들은 12·12와 5·18 당시 군의 정통 지휘 체계를 무시하고 보스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던 충직한 부하들이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다’ 위기감 작용

12·12 당시 군수차관보(중장)로 ‘경복궁 모임’의 최선임자였던 유학성씨는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 총장을 체포해야 한다”고 강력히 밀어붙인 장본인이다. 그는 3선 가도를 잘 달리다가 지난해 재산 공개 파동 때 된서리를 맞고 정계를 떠났다. 그러나 15대에 대비해 고향인 경북 예천에서 재기의 칼을 갈고 있다고 한다.

당시 수경사 33경비단장(대령)이던 김진영씨는, 30경비단장 장세동 대령과 함께 청와대 주변을 포위했던 반란군의 1등 공신이다. 김씨는 85, 86년 5·3 인천사태와 학원안정법 파동으로 시국이 어수선할 때 친위 쿠데타설의 주역으로 지목됐던 군부내 초강경파이자 실력자였다. 육사 17기인 김씨는, 고향인 경남 밀양에서 무소속 출마가 예상되는 김용갑씨,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비서실장과 인사실장을 지낸 민자당 허화평·허삼수 의원과 동기생으로 ‘5공 개국 공신 4인방’으로 꼽힌다.

제1 공수여단장(준장)이던 박희도씨는 79년 12월13일 오전 1시께 육군본부의 발칸포 대공 부대를 제압하면서 육본을 점령해 신군부의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주역이다. 88년 전역식에서 그가 터뜨린 울분이 두 달 뒤 일어난 정보사의 오홍근 부장 테러 사건과 김용갑 총무처장관의 우익 체제 수호 발언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얘기가 있었다. 전두환씨가 합동수사본부장이던 시절 수사국장으로 전씨의 손발 노릇을 했던 이학봉씨도 ‘6공 구속 의원 1호’와 ‘14대 출마 자격 박탈’이라는 불명예를 씻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다고 한다.

노태우씨의 직계로 하나회 총무를 맡았던 이종구씨는 율곡비리와 관련해 국방부장관을 끝으로 도중 하차했다. 지난 8월 사면 복권된 그는 다른 사람보다 지명도가 높은 탓인지 민자당과 자민련 양쪽에서 영입 대상자 1순위로 거론되고 있다.

다음 총선에 이들 중 몇 명이 끝까지 도전할지 판단하기는 아직 이르다. 이들은 출마의 변으로 현 정권의 실정(失政)과 자신에 대한 명예 회복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면서까지 이들이 한사코 총선에 뛰어들려고 하는 진짜 이유는 ‘언제까지 물러설 수만은 없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다’라는 위기감이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 많다. 물론 현 정권의 인기가 날로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는 점도 이들로 하여금 모험을 감행하도록 부추긴 요인이라는 지적이 있다. 사실 국회 진출이야말로 이들에게는 신분상 안전을 담보하고, 나아가 정치세력화를 꾀할 최적의 공간인 셈이다. 12·12와 5·18의 핵심인 민자당 정호용·허삼수·허화평 의원과 자민련 박준병 의원이 문민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중견 정치인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도 사실 국회라는 튼튼한 울타리 덕분이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런 인물들을 영입하려는 정치권, 특히 민자당의 정결하지 못한 태도에 있다는 지적이다. 민자당은 지난 9월 야권으로부터 테러리스트라고 비난 공세를 받았던 이진삼 전 육참총장을 부여 조직책으로 임명함으로써 ‘당선 가능성만 높다면 과거에 크게 개의치 않겠다’는 문호 개방의 뜻을 사실상 공개적으로 피력했다. 김윤환 대표와 강삼재 총장은 각각 “나라를 위해 일하겠다면 기회를 주어야 한다”거나 “20~30%는 구여권 인사로 채우겠다”고 말했다. 특히 강총장은 “우리는 다른 정당과 전쟁을 치러야 하는 정치 집단이다. 전쟁에서 싸워 이길 사람을 골라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해, 전투력이 뛰어나다면 흠이 있는 인물이라도 영입할 수 있다는 의사를 비쳤다.

물론 강총장은 그러한 전술적 공천이 마치 민자당이 개혁을 포기한 것처럼 비치는 데 대해서는 강하게 부정하고 있다. 그는 “100% 입맛에 맞는 공천을 할 수 있겠는가. 지역에 따라 이진삼 같은 사람도 필요하다. 한두 사람 때문에 문민 정부의 전체 이미지가 훼손된다고 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역사적 범죄자, 출마 자격 없다”

사실 총선 전망이 워낙 불투명하고 마땅한 인물을 찾기 힘든 민자당으로서는, 지명도가 높은 5·6공 인사에게 눈독을 들일 만도 하다. 더구나 이들을 영입해 보수표 끌어들이기라는 부수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출마 예상자들 중에는 부산·경남 출신이 많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김진영(충무) 박희도(거창) 안병호(진주) 조남풍(진주) 김용갑(밀양) 씨가 이른바 PK 인맥이다. 이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신군부 가운데에서도 PK만 구제하려는 것 아니냐”는 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민자당이 12·12나 5·18에 연루된 ‘명망가’들을 공천해서 과연 얼마만큼 효과를 얻을지 의문이다. 12·12와 5·18을 ‘하극상적 쿠데타’로 규정해 놓고 그 주체 세력을 공천한 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행위라는 비난 공세가 당장 야권으로부터 쏟아질 것이 뻔하다. 보수 성향의 표를 얼마나 긁어모을지도 알 수 없다. 민주계의 한 인사는 그나마 현 정권의 개혁을 지지하던 사람들의 표까지 떨어져 나갈지 모른다고 우려한다. 민주계 소장파 의원은 “군사 정권의 첨병을 바로 옆에 두고 어떻게 문민 정부와 권위주의 정권과의 차별성을 입에 올릴 수 있겠는가. 참으로 걱정된다”고 토로했다. 또 전·노 씨와의 의리를 생명처럼 여기는 신군부 심복들이 과연 YS에게 충성을 다할지, 대통령 선거와 같은 결정적인 순간에 당을 뛰쳐나갈 소지는 없는지도 민주계에게는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다.

5·6공 핵심들의 총선 출마는 그들의 소속 정당이 어디냐를 떠나 그 자체로도 역사적 가치 판단을 흐리게 한다는 지적이 많다. 김호진 교수(고려대·정치학)는 “12·12와 5·18이 이미 역사적 범죄로 규정된 이상 거기 관련된 인사들은 법적 출마 자격은 있을는지 모르나, 정치 도의적인 출마 자격은 이미 상실했다. 대중 민주주의의가 갖는 한계나 허점을 이용해 지역구 당선을 국민의 역사적 심판으로 호도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정치학자들은 5·6공 주역들이 문민 정부의 대로를 활개치며 돌아다닐 수 있는 더 근본적인 배경을, 한국 정치의 왜곡된 구조에서 찾고 있다. 예컨대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데 매번 실패했던 헌정사의 전례나, 12·12와 5·18 주역에 대한 단죄를 미루고 있는 현 정권의 태생적 한계, 그리고 그들에게 금배지를 달아주는 유권자들의 정치 의식에 궁극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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