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 큰 사기꾼의 ‘봉’ 청와대
  • 崔 進 기자 ()
  • 승인 1995.10.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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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정권 출범 후 친인척 비리·청와대 사칭 44건 ‘전모’
6공 말 민정당의 한 돈 많은 중앙위원은 어느날 운좋게 청와대 특명반 한 사람을 알게 됐다. 여당 동태를 파악하라는 밀명을 받고 극비리에 활동하고 있다는 그 특명요원은 당이 돌아가는 사정에 훤했다. 중앙위원은 자기 동생을 승진시켜 주겠다는 그에게 안심하고 2억원을 건넸다. 그런데 몇달이 지나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뒤늦게 알아 보니 청와대 특명반원이라던 30대 청년은 민정당사에 출입하는 구두닦이였다. 꼬리가 잡히자 그는 동남아로 도망갔다. 그 구두닦이는 국졸 학력을 대졸로 속여 결혼하면서 결혼식 주례로 민정당 중진 의원을 모시리만큼 수완이 뛰어났다고 한다.

사기 성공률 90%, 피해액 1천5백억 넘어

쉬쉬해서 밖으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5,6공 시절 청와대 고위층을 사칭한 사기 사건이 꽤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청와대 앞길이 트이고 권위주의를 청산하려는 나팔소리가 요란한 문민 정부 들어서도 고위층을 들먹이는 사기 사건이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늘어나는 추세라면,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최근 법무부가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는, 대통령의 친인척을 사칭하거나 청와대 고위층을 가장한 이른바 청와대 사칭 사기 사건이 현 정부 아래서도 횡행하고 있으며, 그 피해액 또한 엄청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93년 2월25일 현 정권이 출범한 이후 95년 10월 현재까지 청와대를 사칭한 사건은, 김대통령의 친인척이 직접 개입한 2건을 제외하고도 무려 42건에 이른다. 이 가운데 미수에 그친 경우는 단 4건에 불과하고 38건이 성공해 90%라는 높은 성공률을 보였다. 93년에 7건이던 청와대 사칭 사건은 94년에 22건으로 크게 늘어났다. 금년에는 10월 현재까지 15건이 발생했다. 피해액은 부동산을 빼고도 1천5백억원을 넘어섰으며, 구속된 사기꾼만 백여 명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이다.

청와대 사칭 사건을 유형 별로 분류해 보면, 자신을 대통령 친인척이라고 사칭하거나(6건) 친인척과 친하다고 가장한 경우(2건), 청와대 직원이라고 사칭한 경우(9건)와 청와대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중재역을 자청한 경우(25건)로 크게 네 가지 형태이다. 대통령의 친인척을 사칭한 간 큰 사기꾼들은 대통령의 양아들이나 고종 사촌동생 그리고 손명순 여사의 이종사촌·사촌언니·조카·친척이라고 속였다. 청와대 직원을 사칭한 경우는 대부분 부동산 담당자로 가장했다. 토지처분집행관에서 체비지담당 보좌관, 관재부, 자금조성담당에 이르기까지 청와대에서는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그럴듯한 직함들이 등장했다. 부동산과 관련한 사기 사건은 20건으로 가장 많았다. 93년 10월 곽철암 등 7개 파 30여 명이 청와대가 정치자금을 마련하려고 소유 토지를 극비 매각한다고 속여 각 파별로 50억~5백52억원을 편취한 사기 사건은, 청와대 사칭 사기 사건의 전형으로 꼽힌다.

청와대 사칭 사건들이 이토록 빈발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범죄 전문가들은, 청와대 사칭 사건이 자주 일어나고 쉽게 성사되는 주된 이유를 사기꾼들의 치밀한 작전과 청와대 연줄을 통해 한몫 잡아 보겠다는 졸부들의 사행 심리가 맞아떨어진 데 있다고 진단한다. 사기꾼들은 “신분이 드러나면 당신이나 나나 끝장이다”라며 보안 유지에 만전을 기하는가 하면, 사무실을 차려 놓고 청와대 외곽팀으로 위장하기도 한다. 청와대 내부 사정을 잘 아는 민자당 간부조차 속을 정도로 사기꾼들의 위장술은 수준급이라고 한다.
청와대 인사 연루 ‘의혹’

여기에는 내부에서도 서로를 잘 모르는 청와대 특유의 구조도 한몫 거든다. 청와대의 한 비서관은 “서로 관련이 없는 비서실끼리는 누가 누구인지조차 잘 모른다. 어느 비서실에서 일한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 뿐이다. 과거와 달리 일반인들이 청와대에 드나들기가 쉬워져 청와대를 사칭하는 사건이 일어날 소지도 그만큼 커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청와대 문이 아무리 활짝 열렸다고 하더라도 선뜻 납득되지 않는 대목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따라서 정치권 일각에서는 청와대 관련 사건 가운데 상당수는 사칭이 아니라 실제로 청와대 인사가 연루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청와대 어쩌고 하는 말 몇마디에 몇억~몇십억을 내놓겠느냐는 것이다. 청와대의 일부 비서관조차 그런 개연성이 다분하다고 시인했다. 특히 청와대 민주계 참모들의 경우, 과거 야당 시절 오다가다 알고 지낸 사람들이 불쑥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거나 청탁을 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청와대의 한 비서관은 별로 친하지도 않던 중학교 동창이 찾아와 “일본 국채를 살 의향이 없느냐” “ 땅을 팔아주면 구전을 몇 억 받을 수 있다”면서 접근해온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고 말했다.

정치권은 또 청와대 사칭 사기 사건이 여전히 통한다는 사실은, 그만큼 많은 사람이 문민 정권에서도 대통령의 친인척이나 청와대 참모들이 이권에 개입한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의 인사 개입설과 민주계 실세의 재벌 관여설, 친인척이 개입한 사기 사건 등이 국민으로 하여금 ‘정권은 바뀌어도 청와대는 영원하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처럼 심각한데도 청와대는 뜻밖에 태연하다. 청와대의 한 사정 관계자는 “실명제 실시 이후 돈이 지하로 들어가면서 청와대 사칭 사건이 다소 늘었으나 93년말 사기범 일당 30여 명을 검거한 이후 청와대 사칭 사건은 거의 사라졌다. 대부분 미수에 그쳤고 사기 액수도 몇백만 원에 불과하다. 청와대를 사칭한 사람도 나쁘지만, 청와대를 통해 한건 해보겠다는 피해자 역시 나쁘다. 그들은 법의 보호를 받을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청와대의 오만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청와대 비리 사건을 집중적으로 파헤쳐 온 국회 법사위 조홍규 의원(국민회의)은 “흔히 통치자의 권위주의는 강한데 권위가 약해질 때 고위층을 내세운 사기 사건이 빈발한다. 현 정권은 지금 권위에 위기를 맞고 있다”고 진단했다. 청와대 사칭 사건이 일어나는 사회적 여건과 배경 자체를 원천 제거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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