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의 주역으로 떠오르는 정당 대의원
  • 徐明淑 기자 ()
  • 승인 1995.05.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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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원들, 경선서 주인 노릇…이변·반란도 일으켜
지난 12일 정오 `‘민자당 서울시장 후보 선출대회’가 열리는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는 대회 시작 두어 시간 전부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모처럼 한 표를 행사할 기회를 갖게 된 민자당 서울시지부 대의원들이었다. 그들 가운데는 중앙 정치권에서 낯익은 얼굴도 더러 있었지만, 여느 정치 행사에서는 볼 수 없었던 `낯선 인물이 태반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중앙 당직자·국책 자문위원 등 이른바 중앙당이 임명하는 당연직 대의원을 제외한 대부분이 지구당위원장이 지명한 지역 일꾼들이기 때문이다.

성북 을지구당 대의원 박선구씨는 대회 사흘 전에 선거에 참가하라는 통보를 받고 자신이 운영하는 당구장을 맏아들에게 맡기고 대회장에 나왔다고 한다. 성북을 5투책인 그는 “모처럼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경쟁을 거쳐야만 정치도 발전하고 같은 후보라도 힘이 실리는 게 아니냐”고 반문했다.

종로구 대의원인 문영송씨는 서울 외곽의 한 종합 병원에 근무하는 의사. 하루 전에야 통보받았지만, 선거일이 때마침 쉬는 날이어서 투표장에 나왔다. 문씨 역시 모처럼의 큰 정치 행사를 앞에 두고 다소 상기한 표정이었다. 그런 대의원들을 겨냥해서 이명박 의원은 후보 연설에서 ‘여러분(대의원)은 우리 당의 주체이자 핵심’이라며 지지를 호소했다.

굳이 이의원의 `헌사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각당 대의원들은 4대 지방선거를 앞두고 벌어진 당내 경선에서 모처럼 정치 행위의 주역 노릇을 했다. 그 과정에서 ‘`대의원들의 반란’으로 말미암아 크고 작은 이변과 화젯거리가 생겨났다. 대의원을 통한 당내 후보 경선은 한국 정치 문화가 변화할 가능성과 함께, 본질적인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광역 단체장 후보 경선은 민자당에서는 모두 ‘예상 답안’대로 결과가 나온 반면, 민주당 경선에서는 몇 군데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민자당은 경기도·제주도·서울 세 군데서만 경선을 치렀기 때문에 이변이 일어날 가능성이 그만큼 적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대통령을 출발점으로 철저한 상명하복의 중앙집권적 통제가 이뤄지는 것이 집권당의 생리인 만큼, 아무리 대의원에 의한 직접 선출이라 할지라도 이변은 애당초 불가능한 정황이었다. 집권당으로서는 이변이 일어나는 것이 ‘이변’인 것이다.

민자당은 중앙 입김 여전

민자당 서울시장 경선의 경우, 정원식 후보 추대를 원하는 대통령의 뜻이 기자간담회를 통해 사전에 분명히 밝혀진 상태에서 경선이 치러졌다. 이는 중앙당의 사전 개입이나 조정이 불필요할 정도로 대의원들에게 당 총재의 뜻이 분명히 전달됐음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서울시의 44개 지구당 위원장들은 선거 2, 3일 전부터 지구당에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지구당 대의원들을 집중 접촉했다. 현장 선거가 안고 있는 `‘만에 하나의 위험’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이미 대의원들에게 거물 후보라는 이미지를 주고 있었던 정후보는, 대회장 연설에서도 능란하고 유창한 연설로 정치 초년생인 이명박 후보를 압도했다. 결국 정원식 후보의 압승은 당 총재인 김대통령의 의중, 지구당위원장들의 설득 작업, 대의원들의 `거물 후보 선호도 따위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인 셈이다.

그러나 정당 풍토가 집권당과는 다른 민주당에서는 크고 작은 이변이 발생했다. 가장 큰 이변은 김대중씨의 아성인 전남지사 후보 경선에서 `‘김심’을 업고 나온 김성훈 교수가 낙선한 대목이다. 김후보가 낙선한 데에는 동교동 가신그룹 간의 갈등 등 여러 요인이 거론되지만, 김후보에 대한 대의원들의 반감이 결정적인 요소였다. 김후보는 낙하산 공천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현지에 내려가 대의원들을 직접 접촉하면서 보성 등 일부 지역 대의원들과 언쟁을 벌였다. 이 사실이 다른 대의원들에게 알려지면서 표를 떨어뜨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김교수가 `김심을 업고서도 바닥 인심을 잃어서 패했다면, 민주당 인천시장 후보로 선출된 신용석씨는 대의원들의 마음을 얻는 데 주력해서 세 불리를 뒤엎었다. 뚜껑이 열리기 전까지만 해도, 신후보는 인천시장에 입후보한 세 후보 중 가장 약체로 평가됐었다.

전북지사 경선도 `현장에서 ‘이변’이 일어난 경우다. 대의원들은 결선 투표에서 1차 투표 패자 후보의 지원까지 얻어낸 최낙도 총장을 제치고 유종근 전 아태평화재단 사무차장에게 더 많은 표를 몰아주었다. 개표 광경을 지켜보던 대의원들조차 `믿을 수 없는 일이라는 반응을 보였을 정도였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런 몇 가지 이변을, 중앙 정치의 패권 구도가 지역 풀뿌리 민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라고 풀이한다.

연령층 높아 젊은 유권자 의식 반영 어려워

사실 현장 선거의 이변은 야당사에서는 흔히 보아온 일이다. 70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서, 김대중씨는 40대 기수론의 선두주자이자 유진산 당수를 비롯한 당 중진들의 지지를 업은 김영삼 후보를 물리쳤다. 2차 투표 직전 이철승 후보와의 연합도 주효했지만, 사실상 대의원 한사람 한사람과 부딪치는 ‘두더지 작전’이 가져온 승리였다는 것이 당시 정가의 분석이었다. 25년 전 `이변의 주인공이었던 김이사장이 이번 단체장 경선에서는 `이변으로 정치적 부담을 안게 된 셈이다.

민주화의 한 전형인 당내 경선을 바라보는 시각은 일단 긍정적이다. 정치 평론가 고성국씨는 “경선은 일단 긍정적인 현상이다. 어설픈 경선이라도 안하는 것보다는 낫다. 언론과 국민 여론이 당 지도부로 하여금 하기 싫은 경선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앞으로 공직 후보들에 대한 전면 경선은 거부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라고 내다보았다. 민자당의 한 중진 의원은 “지방 선거 후보 경선은 정치 문화를 탈바꿈시키는 계기로 작용할 것이다. 9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누구도 경선 없는 후보 지명을 원할 수 없게 되었다”라고 지적했다.

과거와 달리 투표를 비교적 깨끗한 분위기에서 치렀다는 것도 높이 평가받는 대목이다. 물론 지역에 따라 후보의 선전용 책자, 도서상품권, 구두 티켓 등이 오갔다. 그러나 과거처럼 대회 직전에 `돈봉투를 뿌리는 풍경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다만 15일 민주당의 경기도 지역 경선에서 돈봉투 시비가 터져나온 것이 ‘옥의 티’였다.

그러나 이번 당내 경선은 대의원 선거의 문제점과 한계도 드러냈다. 우선 한국의 유권자 분포를 보면 20, 30대가 60% 가까이를 차지하고, 그 비율은 날로 높아가고 있다. 그러나 정작 여야당 대의원 비율을 보면, 지역에 따라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40대 이상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유권자 분포는 피라미드 구조인데도 대의원 분포는 역피라미드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서울시장 후보에 출마했던 민주당의 한 최고위원은 “유권자들의 연령비와는 거꾸로 가는 대의원 구성이 유지되는 한 당내 예선전은 일반 유권자의 의식과 기호를 명확히 반영해내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연령 구조만이 아니라 정치 의식 또한 낙후돼 있다는 지적도 높다. 한 정치 평론가는 “정치적으로 가장 후진적인 구도가 다름 아닌 현 정당의 대의원 구성이다. 국민들의 일반적인 정치 의식을 따라가지 못하는 대의원 수준을 높여야만 진정한 당내 민주화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대의원들이 정치 행위의 주역으로 등장할 기회가 많을수록, 대의원들의 수준도 그만큼 높아져야 한다는 주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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