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강경식·김인호, 경제 책임 미루며 티격태격
  • 李敎觀 기자 ()
  • 승인 1998.0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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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과 전 참모들, 서로 책임 전가…김인호 “김대통령 책임 가장 크다” 주장

국제통화기금(IMF) 사태의 책임 소재를 둘러싸고 김영삼 대통령과 주변에서 서로 책임 떠넘기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국민 여론의 돌팔매가 가해질 경제 청문회를 앞두고 벌어지는 진풍경이 아닐 수 없다.

IMF 한파가 맹위를 떨치던 지난 1월12일 김대통령은 경제 파탄의 두 주역으로 지목받는 강경식 전 경제 부총리와 김인호 전 경제수석을 청와대로 불렀다. 만찬이었다. 이 자리에서 세 사람은 서로‘네 탓이오’라고 주장하며 경제 위기의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이 날 문제의 청와대 만찬이 책임을 전가하는 장소로 변질된 결정적인 이유는 IMF 사태의 모든 책임을 강 전부총리와 김 전수석에게 떠넘기려는 듯한 김대통령의 말 때문이었다고 한다. 만찬이 시작되자마자 김대통령은 왜 자신이 ‘IMF 사태’의 주범이냐며 경제 청문회가 열리면 강 전부총리와 김 전수석이 모든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느냐는 요지의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강 전부총리는‘각하!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라고 김대통령의 말을 받았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김 전수석이 강 전부총리의 말을 끊으면서 사단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김 전수석은 경제수석 재임 당시 김대통령에게 외환 위기의 심각성을 적시한 보고서들을 제출한 날짜가 적힌 일지를 내밀면서, 김대통령에게 책임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식의 반박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수석의 말이 끝나자 김대통령의 얼굴은 상기되고 일그러졌다고 한다. 세 사람은 두 달 전까지만 해도 대통령, 부총리와 경제수석 사이였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이 날 만찬 내내 외환 위기의 책임 소재를 놓고 감정적 언사를 주고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배석했던 임창렬 경제 부총리와 김영섭 경제수석마저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이날 만찬은 끝나고 말았다.

강경식, “나는 추락한 비행기의 조종사”

그러나 당사자인 강 전부총리와 김 전수석은 문제의 청와대 만찬에서 김대통령과 갈등을 빚었는지 여부에 대해 일절 함구하고 있다. 특히 취재진과 국회의원 회관에서 부닥친 강 전부총리는‘대통령 앞에서 설전이 가능하겠느냐’고 되묻고는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김 전수석 역시 어렵게 연결된 전화 통화에서, 청와대 만찬장에서 오고간 대화 내용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경제 청문회가 열려서 자신이 책임질 부분이 드러나면 얼마든지 감수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사실 강 전부총리와 김 전수석은 그동안 모시던 김대통령과의 관계를 고려해 당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말하기 곤란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김 전수석이 김대통령의 책임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피력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비공식 전화 인터뷰에서 재벌의 과다한 금융 차입과 문어발식 사업 확장으로 인한 부실 채권 양산을 제도적으로 막지 못한 정치권의 무능 때문에 외환 위기가 발생했다고 지적하면서, 김대통령의 책임이 가장 크고 국민회의와 한나라당 등 여야 정치권에도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정치 리더십이 없었던 것이 외환 위기의 주범이라는 것이 김 전수석의 주장이다. 오래 전에 재벌을 개혁해 외환 위기를 막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정치 리더십이 없어 그같은 기회를 놓쳤다는 얘기다. 그는 한 예로 통치권자와 정치 지도자들의 리더십 부재가, 자신이 지난해 초까지 공정거래위원장으로 있을 때 추진했던 재벌의 상호지급보증 금지 등 국제통화기금이 요구하는 정책을 좌절시킨 근본적인 배경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강 전부총리는 아직 뚜렷한 자기 주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단지 경제 청문회에는 나름대로 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강 전부총리는 자신의 처지를 추락한 비행기의 파일럿에 비유했다. 요컨대 경제라는 비행기가 추락한 원인이 조종사의 판단 실수 때문인지 기체 불량 때문인지 아니면 악천후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비행기를 조종했던 사람으로서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다. 청와대 만찬에서 김대통령에게 김 전수석 만큼 반박하지 않았던 배경도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강 전부총리와 김 전수석은 할말이 많은 것 같다. 자신들이 김대통령에게 외환 위기의 실상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는‘마녀사냥’식 비판만큼은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김대통령이 자신들로부터 외환 위기에 대해 정확한 보고를 받고도 이를 무시했다는 뜻이 담겨 있다. 김 전수석이 청와대 만찬에서 김대통령에게 따졌던 것도 이 때문이다.

청와대측이 강 전부총리와 김 전수석이 외환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듯한 입장을 처음 보인 시점은 지난 1월7일이다. 이 날 일부 언론은 청와대 고위 관계자의 말을 빌려 국제통화기금 구제 금융 신청은 당시 경제팀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김대통령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보도한 것이다. 그는, 김대통령이 지난 11월 초순 한 민간 금융 전문가로부터 외환 위기의 심각성과 IMF 구제 금융 신청이 필요하다는 보고를 받은 뒤 당시 강부총리와 김수석을 불러 구제 금융 신청 검토를 지시했다고 말했다.

이 청와대 고위 관계자의 증언이 가지는 의미는 크게 두 가지다. 바로 김대통령은 강 전부총리나 김 전수석으로부터 외환 위기의 실상에 대해 제대로 보고받지 못했으며, 따라서 외환 위기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책임은 강 전부총리나 김 전수석에게 있다는 주장이다. 이는 지난 1월12일 청와대 만찬에서 김대통령이 자신은 외환 위기와 관련해서는 책임이 없다면서 강 전부총리와 김 전수석에게 알아서 하라는 말을 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이 청와대 관계자의 증언은 사실과 다른 측면이 많다. 무엇보다도 김 전수석의 경우, 지난 11월7일 김대통령에게 재경원과 한국은행이 각각 만든 국제통화기금 구제 금융 신청 방안을 포함한 종합 대책을 보고했다. 사안의 성격상 이같은 종합 대책은 며칠 사이에 작성될 수 없다. 즉, 김 전수석은 김대통령의 지시를 받기 이전에 이미 종합 대책을 준비해 온 것이다.

더욱 납득할 수 없는 점은 청와대의 주장과 달리 민간 금융 전문가들이 재경원과 한은보다 정확하게 외환 위기를 분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한은의 외환 보유고와 국내 금융권의 단기 외채 실상을 정부 당국이 아니고서는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결국 청와대 고위 관계자의 증언은 경제 청문회에서 외환 위기 책임 소재를 규명할 때 김대통령을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나왔을 것이라는 의혹을 지울 수가 없다.

김대통령, 클린턴 전화받기 전까지 낙관

설령 김대통령이 한 민간 전문가의 보고로 외환 위기의 실상을 처음 알았다고 해도 문제는 또 있다. 김대통령이 11월28일 미국 클린턴 대통령으로부터 긴급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정부와 국제통화기금 협상단 간의 구제 금융 지원 조건 협상이 지지부진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언제 국가 부도에 직면할지 모르는 다급한 상황에서 구제 금융 협상이 답보 상태였다는 것은 김대통령이 당시까지 사태를 낙관적으로 보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정부는 구제 금융 신청 이후 국제통화기금 협상단의 지원 조건을 선별 수용하려고 했었다. 예를 들어 정부는 12개 종금사 폐쇄 요구에 대해 1개 종금사에만 영업 정지 명령을 내리는 것으로 넘어가려고 했다. 미셸 캉드쉬 IMF 총재가 한국 정부의 입장을 수용하지 못하겠다고 버틴 것도 이 때문이다. 김대통령이 사태의 심각성을 뒤늦게 깨닫고 국제통화기금의 요구 조건을 전폭 수용하도록 만든 계기는 클린턴 대통령의 전화였다.

청와대의 한 소식통은 지난 11월 말 클린턴 대통령이 김대통령에게 두세 번 전화를 걸어왔다고 밝혔다. 이 소식통에 따르면 11월28일 전화는 비정상적이었다. 원래 양국 정상간 전화 통화는 24시간 전에 통보하기로 되어 있으나 이 날 전화는 불과 2시간 전에 통보가 왔다. 게다가 클린턴 대통령의 언사가 직설적이라 모욕감을 느낄 정도였다고 한다. 즉‘우리 정보에 따르면 당신네 나라는 내주 말에 국가 부도에 처할 것입니다’라는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클린턴 대통령이 언급한 정보란 구제 금융 신청 직후 방한한 국제통화기금 실사단으로부터 보고받은 것으로 보인다. 실사단은 11월 말 한은의 달러 보유고가 고작 65억 달러밖에 되지 않아 곧 국가 부도에 직면할 것으로 보이자 워싱턴 본부에 연락을 취했고, 클린턴 대통령은 휴양지 캠프 데이비드에서 이를 보고받고 급히 김대통령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김대통령이 11월 초에 이미 외환 위기의 심각성을 이해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약한 까닭은 여기에 있다.

결국 김대통령이 외환 위기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국제통화기금과의 협상에서 완벽한 대처를 했다고 보기 어렵다. 강 전부총리나 김 전수석이 김대통령으로 하여금 외환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도록 보좌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거센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김영삼 정부 5년 동안 재벌 개혁과 금융 개혁을 통해 외환 위기를 미리 막을 수 있는 기회들을 여러 차례 놓쳐 버렸다는 사실이다. 김 전수석이 모든 책임을 자신과 강 전 부총리에게 돌리는 여론에 대해 억울해 하는 것이 이해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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