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대 국회신인] ⑤ 관료 출신 '행정 감투' 벗고 여당에 집중 포진
  • 崔 進 기자 ()
  • 승인 1996.06.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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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명 등원, 역대 집권당 ‘못자리’…의정 활동서 행정 전문가 몫 해낼지 의문
한국 정치에서 ‘관료적’이라는 용어는 보통 부정적인 의미로 많이 사용된다. 관료적 발상이니 관료주의에 젖어 있다느니 하는 말은 비민주적이고 획일주의에 빠져 있을 때 흔히 쓰는 말이다. 관료제의 발전과 민주주의를 역기능 관계로 파악한 막스 베버의 이론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관료 집단은 민주화에 순기능보다는 역기능 결과를 가져온 것이 사실이다. 군부가 정권을 잡는 순간 맨 먼저 눈독을 들인 대상이 관료 집단이었고, 정치권에 차출된 엘리트 관료들이 군부 정권의 충직한 일꾼 노릇을 해온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래저래 관료 집단은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이번 15대 총선에서도 관료 출신들이 많이 원내에 진출했다. 행정고시 등을 거쳐 제대로 관료 코스를 밟은 초선 당선자만 해도 20여 명이 넘는다. 이들은 대부분 신한국당이나 자민련 소속이다. 신한국당의 경우 주로 지방에 관료 출신들을 내보내 재미를 보았다. 정치 군인과 관료가 나라를 말아먹는다는 험구가 나돌 만큼 행정부 출신이 득세하던 5, 6공보다는 덜하지만, 집권 여당이 관료 출신을 선호하기는 과거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5,6공 때는 직업 정치인과 군 출신, 관료 출신 간의 구분이 비교적 명확했다. 그러나 현 정권 들어서는 정치권과 행정부의 왕래가 빈번해 그 경계가 모호해진 점이 특징이다. 수십 년 넘게 민주화 투쟁만 해온 상도동 가신들이 행정부 요직을 장악하는가 하면, 교수·언론인 출신이 총리와 장관 직을 차지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들까지 모두 합하면, 여당의 관료 파워는 단연 으뜸이다.

이홍구 대표는 서울대 정치학 교수를 지낸 학자 출신이지만, 일찍이 6공때부터 행정부에 몸을 담은 탓인지 그를 학자라기보다 행정가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대표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 발탁한 6공 인사이면서도 학자풍에 비교적 때묻지 않은 온건 개혁 이미지가 돋보여 현 정권 들어서도 줄곧 중용되었다. 이대표는 관리형 대표 라는 별로 명예롭지 못한 꼬리표를 달고 대표 자리에 올랐지만, 대통령이 갈수록 그에게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시장·지사 출신들,‘표밭 관리’유리

한이헌(부산 북.강서 을) 김기재(부산 해운대. 기장 을) 의원은 경제 전문 관료로 있다가 92년 대선을 전후해 YS 직계 부대로 들어가 자리를 굳힌 경우다. 대학에서 경제학과 경영학을 전공하고 줄곧 경제 관련 부처에 근무해온 두 사람을 행정가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들은 뒤늦게 정치권에 들어와 빠른 적응력을 보이며 YS의 총애를 받은 사람들이다. 경제기획원에서 잔뼈가 굵은 한의원은 지난 대선 때 김영삼 후보의 경제 가정 교사로 정치판에 첫발을 디뎠다. 총선 직전까지 청와대 경제 수석을 지낸 한의원은 금융실명제를 비롯해 굵직굵직한 경제 개혁을 주도함으로써 ‘경제 대통령’이라는 질시 어린 별명까지 얻었다. 김의원은 김대통령이 행정부에 세대 교체 바람을 불어넣기 위해 48세에 총무처장관 자리에 앉힌 민주계 핵심 테크너크랫 가운데 한 사람이다. 관료 출신 초선 당선자 가운데는 지방자치단체장을 지낸 사람이 많이 눈에 띈다. 신한국당 김기재 의원(부산시장)을 비롯해 이상배(서울시장) 강현욱(전북지사) 윤한도(경남지사) 전석홍(전남지사) 김광원(금릉 군수·경북 부지사) 박종우(인천시장), 자민련 이재창(경기지사) 이의익(대구 시장), 무소속 이해봉(대구시장) 의원이 모두 지방 행정가 출신이다. 이들 가운데 4명은 장관까지 지냈다. 이번 총선에서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지역개발론이 표의 향배를 크게 좌우했다는 점이다. 지명도가 떨어지더라도 지역구를 충실히 관리해 왔거나 지역 발전에 기여한 후보들이 대체로 유리했다. 시장·지사로 있을 때 알게 모르게 표밭을 일궈온 이들이 선거 때 그 덕을 톡톡히 본 것이다. 신한국당에 입당한 당선자들이 입당 명분으로 한결같이 지역 개발론을 맨 앞에 들먹이는 이유도 지역발전론의 위력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여당의 사각지대인 호남 벌판에서 혼자 살아 돌아온 강현욱 의원의 유일한 무기 역시 지역발전론이었다. 지난 6·27 지방 선거 때 전북지사와 농수산부장관이라는 행정 경험을 내세우며 전북지사로 출마했다가 고배를 마신 강의원은 이번 총선에서 패배를 설욕했다. 국회 재정경제위를 희망하는 강의원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공정한 게임을 할 수 있는 룰을 만드는 데 의정 활동의 역점을 두겠다는 포부다. 지방 선거에서 졌지만 총선에서 이긴 사람이 또 있다. 전석홍 의원(전국구)이다. 지사 재임 때 ‘전틀러’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추진력이 강했던 그는, 지난 지방 선거 때 전남지사로 출마해 분패했지만 YS가 직접 전국구로 낙점한 경우다. 시장·군수·도지사를 두루 지낸 정통 내무 관료 출신인 전의원의 의정 활동 목표는 중앙과 지방간, 지방자치단체 간에 대화와 협조 체제를 강화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일이다.
자민련은 노련한 행정가 출신들이 당선자의 주류를 이루어 정치 관료들의 집합처라는 말을 실감나게 한다. 초선도 그렇지만 재선 이상 중진 가운데 행정 경험이 없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자민련이 경기도에서 낚은 대어 두 마리는 공교롭게 둘 다 환경처장관을 지낸 허남훈(평택 을) 이재창(파주) 의원이다. 현 정부 초대 각료라는 상품성을 지닌 허의원은 공천 과정에서 한때 신한국당과 국민회의 입당설이 어지럽게 나돌기도 했으나 결국 JP의 품으로 들어갔다.

이번 총선 때 대구에서는 무소속과 자민련 바람이 거세게 불어닥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예상이 다소 빗나가 자민련 바람은 불었으나 무소속 바람은 미풍에 그치고 말았다. 대구에서 무소속의 자존심을 세워준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이해봉 의원(달서 을)이다. 그는 공천 과정에서 여당의 집요한 영입 유혹을 뿌리치고 ‘나 홀로’ 출마해 승리한 고군분투파다. 이의원은 스스로를 대구 사람은 다 아는 외곬이라고 자처한다. 내무부 지방행정 분야 전문가로 알려진 그는, 국회에 들어가면 비대한 중앙 정부의 힘을 빼고 잃어버린 지방 정부의 권능을 회복하는 데 주력하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다.

“의정 활동 50위권에 관료 출신 전무”

국민회의의 초선 당선자 가운데 정통 관료 출신은 한 사람도 없다. 정책 정당의 면모를 과시하기 위해 외부 인사 영입에 심혈을 기울였던 국민회의로서는 대단히 아쉬운 부분이었다. 그러나 국민회의가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랜 세월에 걸친 지역 차별 정책으로 호남 인맥의 씨가 말라 영입할 만한 고위직 공무원 출신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다른 지역 출신 관료들은 또 한결같이 여당 체질이다. 우리는 국회 활동을 통해 사람이 아닌 정책으로 승부를 걸겠다.” 정동채 총재 비서실장의 얘기다.

그렇다면 관료 출신 정치인들은 어느 정도 정치 역량을 갖추고 있는가. 행정부에서 입법부로 자리를 옮긴 그들은 과연 국회에서 제몫을 해낼까.

물론 당사자들은 이구동성으로 행정부 내부 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행정부 견제 역할을 하는 데 대단히 유리할 것이라고 자신한다. 알아야 면장을 한다는 것이다. 전석홍 의원은 “행정상의 문제점이나 애로 사항을 직접 피부로 겪은 만큼 거기에 걸맞는 대안 제시나 입법 활동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내무부 출신인 이해봉 의원은 “내무 행정은 종합 행정이다. 내무 전문가는 팔방미인이어야 한다”라면서 행정 경험이 국회의 감시 기능과 입법 활동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장담한다.

그러나 현실은 많이 다르다. 5, 6공 시절 화려한 행정 이력을 자랑하던 사람들이 정치판, 특히 여당에만 들어가면 기를 못펴고 숨죽여 지내곤 했다. 여야를 막론하고 관료 출신 가운데 의정 활동이 돋보였던 사람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행정부를 잘 알기 때문에 그들을 잘 감시하기는커녕 정부를 감싸고 보호해 주기 일쑤였다. 최근 나라정책연구소(소장 김문조 고려대 교수)가 조사한 14대 국회의원 의정 활동 성적표에서도 상위 50명 가운데 관료 출신은 한 사람도 없다. 행정부에서 받은 훈장이 입법부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사실이 그대로 드러난 셈이다.

정치학에 B-A이론이라는 말이 있다. 관료주의(Bureaucracy)와 권위주의(Authoritarianism)의 머리 글자를 딴 합성어로, 관료들의 속성과 행태를 다분히 부정적으로 드러낸 이론이다. 관료들은 학문의 세계에서조차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시대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현 정부 들어 국회에서 여당이 정부를 향해 따가운 질책을 가하는 모습이 흔했다. 정치판에 첫발을 디딘 테크너크랫이 15대에서는 B -A이론을 뒤집을 것인지 눈여겨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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