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교동 마당’에 균열이 보인다
  • 吳民秀 기자 ()
  • 승인 1995.05.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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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갑 의원·유종근씨·윤철상씨 선거 출마 싸고 ‘집안 갈등’…“DJ 영향력 줄어든 탓”
전남지사 선거에 출마한 한화갑 의원(전남 신안)은 지난 4월20일 권노갑 부총재 집에서 잤다. 동교동의 핵 이슈로 떠오른 김성훈 중앙대 교수 전남지사 후보 영입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 모두 30년 넘도록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을 그림자처럼 모신 가신이다. 권부총재의 별명은 ‘DJ의 분신’이고, 한화갑 의원은 김이사장의 몸짓과 어투까지 빼닮았다고 해서 ‘작은 DJ’로 불린다.

“동교동 내부 주도권 싸움 시작됐다”

그러나 이 날 두 사람은 매우 격앙된 상태에서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라고 동료 의원들은 전한다. 권부총재는 한의원에게, 김성훈 교수에게 양보하라고 거듭 종용했고 한의원은 완강하게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교동계 의원들조차 내부 분열을 염려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날 두 사람의 만남은 급작스럽게 이루어졌다. 광주에서 선거 준비에 여념이 없던 한화갑 의원은 밤 8시 비행기 편으로 서둘러 상경했다. 김대중 이사장이 두 사람을 급하게 찾았다. 한의원이 담판을 짓기 위해 일부러 찾아갔다는 얘기도 있다. 여하튼 두 사람은 함께 일산 자택에 머물고 있던 김이사장을 찾아갔다. 이 날 김이사장은 ‘비서 출신인 한의원은 후보 경선에 나서지 말고 중앙 정치에 전념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뜻을 전했다고 박지원 대변인이 언론에 밝혔다. 박대변인은 동교동계의 내분이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한 21일 저녁 동교동에 들러 김이사장의 의중을 파악했다. 그러나 한의원은 “발을 빼기에는 이미 늦었다”고 말한 뒤 바로 광주로 향했다.

김이사장이 이처럼 한의원에게 경선 출마를 포기하라고 종용하게 된 배경에는 동교동의 맏형인 권부총재가 있다. 권부총재는 전남의 동서간 지역 분열 현상을 내세워 김이사장의 마음을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3년 전부터 나돌기 시작한 전남 도청의 무안 이전 계획안으로 인해 전남이 동서로 나뉘었고, 따라서 중도적 외부 인사가 첫 도지사를 맡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전남 동쪽 지역의 이해를 대변한다며 경선에 나선 허경만 의원(순천) 역시 도청 이전 문제를 부각해 한화갑 의원을 압박하고 있다.

상황이 이쯤되자 한의원 지지 쪽으로 가닥을잡아가던 동교동계 의원들도 갈팡질팡했다. 그러나 한의원으로서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의원측은 ‘한솥 밥을 먹은’ 권부총재에 대해 서운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김이사장은 한의원이 전남지사 출마 의사를 피력했을 때 “한의원의 자질로 볼 때 훌륭한 도지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비서 출신으로서 보스의 허락 없이 거취를 결정하기란 쉽지 않다. 결국 권부총재가 한의원의 앞길을 가로막았다고 보는 것이다. 민주당 내에서는 권부총재가 한의원이 호남의 차세대로 부상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 김교수 카드를 고집했다고 보고 있다. 즉 동교동계 내부의 주도권 싸움이 시작됐다는 분석이다. 예전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조직 관리에 누수가 발생하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김성훈 교수는 4월22일 민주당 전남도지부에 후보 등록을 마쳤다. 광주에서 도지사 출마에 대한 기자회견도 했다. 이렇게 일이 벌어진 이상 한의원측으로서는‘김심’을 내세우기도 어렵게 됐다. 그러나 이제 문제는 경선의 향방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선거를 치르기도 전에 동교동 내부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다른 데도 아니고 하필이면 동교동의 텃밭인 전남지사 경선에서부터 문제가 불거졌다.

김이사장은 4월16일 일본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당원의 한 사람으로서 민주당 후보를 도와줄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정치 개입 시비를 일으켰다. 그때도 당내 경선에는 개입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며칠 가지 못했다. 이번에 한화갑 의원에게 출마 포기를 종용함으로써 스스로 말을 뒤집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동교동은 장남이 김이사장의 마음을 돌려놨고, 차남이 김이사장에게 항명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김대중 이사장은 스스로 ‘미스터 지자제’라고 자칭하리만큼 지방자치 선거에 관해서는 자주 정치적 견해를 피력해 왔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선거에 나선 동교동 식구에 대해서 정치권의 관심은 남다른 편이다. 현재 동교동 직계 중에 출사표를 던진 이는 한화갑 의원말고 두 사람이 더 있다. 전북지사 경선에 출마한 전 아태재단 사무부총장 출신 유종근씨와 전북 정읍시 시장 공천을 희망하는 윤철상씨가 바로 그들이다.

미국 뉴저지 주립대 경제학 교수와 뉴저지 주지사 경제자문관을 지낸 유종근씨는 김이사장이 미국 망명 시절 인연을 맺은 해외 인맥이다. 87년 대선 때는 평민당 정책·기획 담당 특보, 92년 대선 때는 민주당 홍보위원장을 맡았다. 유씨는 “선생님을 오래 모신 내가 혼자 결심으로 출마할 수는 없는 것”이라며 은근히 ‘김심’이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지원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전북 지사 출마를 허락했다는 얘기다.

유씨가 경제 전문가 경력과 배경을 내세우고 있지만, 사정이 녹록지는 않다. 우선 그는 선거에 관한 한 아마추어이다. 현재 유씨와 함께 도백 자리를 노리는 민주당 후보는 최락도 의원. 3선급인 데다가 지사 출마를 위해 适獵?사무총장 직책까지 포기했다. 현지에서는 최의원 우세를 점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관심거리는 경선 결과가 아니다. 즉 정치권에서는‘김심’이 어디로 움직일지, 그리고 과연 전북에서 동교동의 영향력이 얼마만큼 작용할지에 대해 귀추를 주목하고 있다.

전북 맹주 노리는 김원기 부총재 행보에 관심

정치권에서는 특히 전북에서 차기 맹주 자리를 노리는 김원기 부총재(전북 정읍)의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세력 확대를 꾀하던 김부총재가 자신의 계보인 김태식 의원(전북 완주)을 도지사 후보로 밀었는데 김의원이 민주당 사무총장 쪽으로 마음을 굳히자, 김부총재의 행보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졌다. 최락도 의원과 사이가 좋지 않은 김부총재로서는, 유종근씨를 밀자니 동교동 가신 그룹에게 지역을 내맡기는 꼴이 된다. 그렇게 되면 ‘전북 홀로서기’는 요원해진다.

그렇다고 동교동의 의중을 외면할 수만도 없다. 김부총재는 민주당내 차기 당권 주자이다. 동교동계의 지원 없이는 당권 경쟁에서 승산이 없다. 김대중 이사장은 김부총재를 만난 자리에서 여러 차례 전북 지역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다고 한다. 그게 유종근씨인지 윤철상씨인지, 아니면 두 사람 모두인지는 불분명하다. 아무튼 김부총재는 지역 여론을 예로 들면서 동교동의 희망 사항을 비켜가고 있다는 후문이다.

정읍시장 공천을 희망하는 윤철상씨는 민추협 시절부터 동교동 캠프에 합류해 김대중 이사장을 13년간 모신 비서 출신이다. 최근까지 아태재단 행정기획실장으로 지내다가 김이사장에게 출마 의사를 피력하고 사표를 냈다. 윤씨는 “선생님이 잘해 보라고 해서 결심하게 됐다. 그런데 지역 사정이 여의치 않다. 내 문제로 선생님께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면서 출마 포기 쪽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

정읍시장 공천 문제에 대해 김원기 부총재 쪽에서는 역시 지역 정서를 거론하고 있다. 윤씨는 지난 3월 말부터 지역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는데 ‘지역 여론이 좋지 않다’는 내용의 보고가 김이사장에게 전달됐다고 한다. 사실이라면 심상치가 않다. 정읍은 지난 세 차례에 걸친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에 대한 지지율이 전국에서 수위를 다퉜던 지역이다.

정치권에서는 김대중 이사장의 구상이 이번 지방자치 선거를 승리로 이끌어서 정국을 주도해 나가겠다는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정작 ‘허락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동교동 직계 세 사람은 당내 경선 문제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민주당에서는 동교동의 영향력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해석하는 사람이 많다. 김대중의 빈 자리를 차지하려는 주자들의 영토가 이미 넓어졌기 때문이라고 보는 이도 있다. 가신그룹 내에서조차 의견이 대립하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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