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길 걷는 친인척 정치인
  • 崔 進 기자 ()
  • 승인 1997.1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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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대선 이후에도 정치판의 갈라선 ‘혈육’들이 예전처럼 웃는 얼굴로 대할 수 있을지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대선 전쟁이 워낙 살벌하고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지만, 피보다 훨씬 진한 것이 정치인 것 같다.

금배지를 놓고 혈족 간에 혈투를 벌이는 모습이 비단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이번 대선에서는 골육상쟁은 아니더라도 대권을 놓고 정반대 길을 가고 있는 경우가 유난히 많다. 이들은 정당이 다르거나 자기가 지원하는 후보가 다르다고 상대를 비난하거나 손가락질하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사(私)는 사, 공(公)은 공이라는 얘기이다.

그러나 겉으로 내색은 않지만 죽기 아니면 살기로 덤비는 대선 정국에서 서로 다른 후보를 밀고 있다면, 그들의 속마음이 얼마나 불편할지 짐작할 만하다. 게다가 이들은 대개 이회창·김대중 양쪽으로 갈라져 있다.

정치권에서 가장 잘 알려진 혈족은 이수성·이수인 형제. 형인 이수성 전 총리가 지난 7월 신한국당 경선에서 이회창 후보와 싸울 때 동생인 이수인 의원은 민주당 소속이었다. 그러다가 이 전 총리가 10월 한나라당을 탈당하자마자 공교롭게 이수인 의원은 신한국당과 민주당이 합친 한나라당에 들어갔다. 형은 이회창이 싫어 떠나고, 동생은 이유야 어찌되었든 이회창을 도우러 입당한 셈이다.
이수성 전 총리의 가풍이 매우 보수적이고 형제간 우애가 유달리 끈끈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두 사람이 각자 다른 길을 가면서 얼마나 가슴앓이가 심했는지를 측근들은 지켜보았다고 한다.

이수성 형제 못지 않게 ‘기구한’ 사연을 갖고 있는 사람은 친남매인 고흥길·고은정 씨. 성우로 이름을 날린 누나 고은정씨는 DJ의 집권을 향해 뛰고 있는 JP의 특보이지만, 동생인 고흥길씨는 연초 <중앙일보> 편집국장을 그만두고 일찌감치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에 발벗고 나선 측근 중의 측근이다.

어렸을 적 “누나!” “흥길아!” 하고 부르며 다정했던 남매가 대권 바람을 타고 180도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요즘 고은정씨는 JP를 따라 전국을 누비고 다닌다.

각 후보 진영이‘죽은 박정희 끌어들이기 작전’에 열을 올리고 있는 가운데 DJ는12월5일 경북 구미에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를 방문했다. 박대통령 아들인 지만씨와 조카인 박준홍씨가 동행했다. 박준홍씨는 박대통령의 사위인 한병기 전 유엔대사와 함께 DJ 집권의 깃발을 들고 대구·경북 표밭을 부지런히 갈고 있다.
동서지간 박준병·이사철, 정치 얘기는 기피

그러나 장조카인 박재홍씨는 이회창 진영에서 뛰고 있다. 최근 이회창 후보가 박대통령의 딸 근혜씨를 만나도록 주선한 사람이 박재홍씨였다. 박정희 유족들이 12월 대선 강풍에 휘말려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는 것이다.

90년 현역 육군 소장 신분으로 <육군>지에 구타 금지 등 군 개혁안을 발표해 파문을 일으켰던 안병호 전 수방사령관. 그는 11월 국민신당에 입당하면서 “나는 장군 출신이지만 병장 출신인 이인제 후보를 도우러 입당한다”라고 밝혔다. 그런데 그와 사촌 형제인 안병규 전 의원은 PK 출신인데도 DJT를 막후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민련에서 일찌감치 DJP 연대의 물꼬를 튼 공신 두 사람을 꼽는다면, 아마 박준규 최고 고문과 박철언 부총재일 것이다. 특히 박 최고 고문은 한때 당무까지 거부하면서 DJP 연대를 강하게 주장했었다. 현정권 들어‘팽’당했던 그는 반드시 정권 교체를 달성해 YS의 아류인 한나라당을 응징해야 한다며 단단히 벼르고 있다.

그 응징 대상인 한나라당에 박준규 최고 고문의 6촌 조카가 있다. 박 최고 고문의 사촌형 아들인 박종근 의원이다. 그는 자민련 대구시지부장까지 지냈지만, 지난 11월 안택수 의원과 함께 갑자기 탈당해 한나라당으로 가버렸다. 사전에 박 최고 고문과 탈당 문제를 의논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한 친척은 “그거야 자기가 알아서 결정했겠제!”라고 잘라 말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힘센 사람들끼리 자녀를 결혼시키는 정략 결혼이 있다. 사돈 관계를 맺어 힘의 상승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나 오늘날 정치권에서 이 봉건 제도의 유습은 거의 사라졌고, 오히려 사돈끼리 정치 노선을 달리함으로써 길항 작용마저 부르고 있는 실정이다. 중견 정치인들 가운데는 사돈을 맺은 사람들이 꽤 있지만 대부분 정치 노선을 달리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경우는 국민회의 이종찬 부총재와 한나라당 정재문 의원.

국민회의 대선기획단장인 이부총재는 과거 여권 핵심부에 몸 담았던 경력을 활용해 한나라당을 공격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한나라당의 최상층부인 중앙위원회 의장 정재문 의원이 이부총재와 사돈이다. 정의원 막내딸이 14대 대선을 불과 4개월 앞둔 92년 8월 이부총재의 막내 아들과 연애 결혼을 했다. 경기고 선후배 간이기도 한 정의원과 이부총재는 소속 정당은 다르지만 요즘도 집안끼리 종종 왕래할 정도로 사이가 돈독하다.
자민련 이태섭 정책위의장과, 한나라당에서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는 유흥수 전 의원은 경기고 동기동창에다가 사돈지간이다.“워낙 친한 친구이다 보니 부부 동반으로 온천이나 설악산 등지를 함께 놀러다닌 적이 많았어요. 자연히 자녀들끼리도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다가 7년 전에 결혼까지 이어졌지요.” 이의장 부인의 설명이다.

91년 수서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이의장은 지난 3월 수원 장안구 보궐 선거에서 야권 단일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어 DJP와 한 식구가 되었으나, 친구이자 사돈인 유씨는 최근 이회창 진영으로 들어갔다.

남편들이야 소신대로 각자 갈 길을 간다고 하지만, 그 와중에 남 모르게 애를 먹는 사람들이 바로 부인들이다. 부인들은 한결같이‘정치와 혈육의 정은 전혀 별개’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지만, 속마음이야 오죽하겠느냐는 것이 주변 사람들 얘기다.

자민련 김종필 명예 총재의 측근 중 측근인 김용환 부총재는 야권 단일화를 성사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그의 지론은 대통령제를 고수하고 있는 이회창은 절대 안된다는 입장이다. 이한구 대우경제연구소 소장은 이 절대 안되는 이회창 후보를 막후에서 돕고 있는데, 이소장은 김부총재와 동서지간이다. 한 사람은 DJ 대통령 만들기에, 한 사람은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서 있다.
‘대선 후유증’ 걱정하기도

독설 섞인 논평으로 DJP 죽이기 악역을 맡아 국민회의가 이를 갈고 있는 이사철 한나라당 대변인과 자민련 박준병 부총재는 사촌 동서지간. 즉 박부총재의 부인과 이대변인의 부인이 사촌 자매이다.

박부총재와 이대변인은 바쁜 대선 정국 와중에도 가끔 만날 정도로 가깝게 지내지만, 민감한 정치 얘기는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꺼내지 않는다고 한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친인척끼리 서로 정당을 달리하고 있는 경우는 많은데, 정작 같은 정당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점이다. 하긴 그래야 안전한 보험 들기가 될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세월 따라 정치판도 많이 달라진 것 같다. 혈육의 정을 유난히 중시하는 유교적인 관습이 적어도 정치판에서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고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정치 노선이 다르다고 해서 집안끼리 원수로 지내는 일은 없어진 것이다.

하긴 옛날 촉나라의 제갈량과 적국인 오나라의 제갈근은 친형제였지만, 그것 때문에 서로 으르렁거리거나 주군들로부터 의심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면, 우리 정치판은 ‘선진국형’으로 가고 있는지 모른다.‘피’보다‘대의’를 먼저 좇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대의가 민심과 명분에 합당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자신의 정치적 입지나 이해 관계를 따른 것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아울러 12월 대선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이들이 예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웃는 얼굴로 마주할 수 있을지, 그 후유증이 주변 식구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지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대선 전쟁이 워낙 살벌하고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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