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철 청문회, 깃털도 못 뽑았다
  • 김 당 기자 ()
  • 승인 1997.05.08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청문회, 김현철씨 이권 개입·대선 자금 의혹 등 ‘몸통’ 못 밝혀
뻔히 예상된 질문에 예상된 답변이었다. 4월25일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38)를 불러 진행한 국회 한보 청문회에서 특위 위원들은 새로운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 채 호통과 질책으로 일관했고, 증인 김씨는 알맹이 없는 답변을 되풀이했다.

그래서인지 이 날 저녁에 실시된 각종 긴급 여론조사에서는 ‘뻔뻔한 증인’에게 ‘변명할 기회만 제공했다’고 응답한 사람이 80∼90%에 이를 만큼 청문회는 실패작이었다.

그러나 총체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성과는 있었다. 김씨는 이 날 고위직 인사와 지난해 4·11 총선 공천에 개입하는 등 정부·여당의 인사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마지 못해’ 인정했다. 그것은 대개 널리 알려진 사실이거나 이미 물증으로 명백히 드러난 ‘깃털’ 같은 것이었다. 이를테면 새 정부 출범 초기에 전병민·이충범 씨 등 일부 인사를 공직에 추천한 것과, 여론조사 결과를 토대로 4·11 총선 공천 과정에서 일부 후보를 추천한 사실이 전자라면, 후자는 YTN(연합텔레비전뉴스) 사장 선임 문제를 이원종 정무수석 등과 협의하고 자신의 비서였던 정대희씨를 청와대에 근무하도록 부탁한 사실 정도였다.

오전 내내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로 일관한 김씨가 오후 이사철 의원(신한국당)의 신문에서 “아버님께 이성헌 위원장 등 야당 시절과 대선 때 고생한 분들을 말씀드린 적이 있다”라고 일부나마 공천에 개입한 사실을 시인한 것은 이 날의 하이라이트였다. 그러나 김씨가 부장 검사 출신인 이사철 의원의 노련한 신문에 말려든 것인지, 아니면 그렇지 않아도 김씨의 공천을 받았다는 의혹을 받은 자신의 경복고 선배인 이의원의 덫에 걸려 준 것인지는 불확실해 보였다.

그래서인지 김씨가 인사 및 공천 개입을 일부 인정한 것은 모든 의혹을 전면 부인하는 것은 국민여론상 좋지 않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이 뒤따랐다. 또 대통령의 오랜 ‘동지이자 정치 참모’인 그가 공천에 일부 개입한 것을 인정해도 검찰의 사법 처리와는 무관하다는 계산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후문이다.

일부 여당 의원, 변명 기회 주느라 급급

그는 때로는 명백한 물증도 마지 못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실수에 의한 회한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의사 박경식씨가 공개한 (실제로는 다른 사람이 공개했지만) ‘테이프 하나 때문에’라는 표현을 여러 번 사용해 국정 개입 의혹을 부인했다. 즉 그 테이프 하나 때문에 모든 의혹을 덮어쓰고 있고, 제3자가 그 테이프를 보면 누구나 의혹을 가질 수는 있지만 자기는 YTN말고는 인사에 개입한 사실이 없다는 논지였다.

그러나 이같은 해명은 사실상 김씨의 국정 개입을 반증하는 유일한 물증인 테이프에 나타난 ‘박관용 특보와 이원종 정무수석 그리고 오인환 장관’(모두 당시 직책)과 증인의 상관 관계를 설명하는 데에도 궁색했다. 그는 증인이 언론사 사장을 선임하는 데 세 사람과 의논한 까닭을 ‘사적인 만남을 갖기 때문’이라고 둘러댔다. 그는 또 측근인 정대희씨가 청와대에 무적 근무한 사실이 불거지기 전까지는 그런 사실을 몰랐다면서도 그 기간에 자기가 월급을 주었다는 모순된 논리를 전개했다.

일부 여당 의원들은 김씨의 논리적 모순과 ‘실수’로 위증 혐의가 불거져 나올까 안타까워하는 모습이었고, 친절하게도 이를 시정할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저녁 식사 후 속개된 신문에서 김씨의 위증 발언(민방 선정과 관련해 한창 관계자를 만난 적이 없다)을 번복케 하는 진술을 유도하고 ‘증인이 아까는 긴장해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을 것’이라고 해명까지 대신해준 김호일 의원(신한국당)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게다가 김의원은 의사 박경식 증인이 현철씨가 15년 대권 플랜을 세웠다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김대통령이 말한 ‘깜짝 놀랄 만한 후보’(97년 대선)는 현철씨라는 앞뒤가 안맞는 진술을 하고 있다면서 박씨를 ‘정신 나간 사람’으로 몰아가는 유인 질문을 했다. 그러나 박씨가 청문회에서 그런 진술을 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김의원의 신문은 의도적인 마타도어로 비쳤다. 그는 또 이미 김씨가 사과한, 녹음 테이프에 있는 이성재 의원(국민회의)에 대한 신체 비하 발언에 대해서조차 박씨의 ‘어법대로 따라 한 것’이라는 식으로 김씨의 진술을 유도했다.

여당 의원들의 비호와 ‘맞불 작전’은 신한국당 특위 위원들에게 배포된 김현철 의혹 ‘은폐 지침’ 문건에서 이미 예견되었다. 그러나 그것 못지 않게 실망스런 대목은 야당 의원들의 알맹이 없는 솜방망이 질문이었다.

검찰의 ‘덫’ 현철씨 가둘 수 있을까

야당 의원들의 주장대로 현행 청문회 제도에서 수사권이 없는 특위가 ‘연기’를 잡는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부 야당 의원은 온갖 시중의 설(說)을 다 끌어모아 김씨에게 들이대는 통에 역설적으로 증인의 부인(否認)이 상당 부분 신빙성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즉 묻지 않아도 될 의혹을 제기함으로써 김씨가 부인한 수많은 답변 중에서 그가 부인한 것이 참일 확률을 그만큼 높여준 셈이다.

그동안 김현철씨와 관련해 제기된 의혹은 크게 보아 △국정 개입 △이권 개입 △대선 자금 △대북 프로젝트 등 네 가지이다(위 표 참조). 이 중 가장 주목되어온 것은 안기부의 정보 보고를 이용해 각종 인사에 간여해 왔다는 국정 개입 의혹이다. 또 그중에서도 검찰의 사법 처리와 연결될 수 있는 대목은 안기부의 정보 보고 부분이다.

그러나 4월23일 증인으로 나온 김기섭 안기부 전 운영차장은 이른바 ‘정보 차단 원칙’을 들어 현철씨에 대한 정보 보고를 전면 부인했다. 김씨 또한 안기부로부터 정보 보고를 받았다는 의혹과 이를 이용해 대북 정책에 개입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전면 부인했다. 그러나 지난해 9월 김씨의 중국 방문 때 안기부 직원이 수행했다는 안기부 관계자들의 진술에 비추어볼 때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이권 개입 및 대선 자금 의혹에 대해서도 김씨는 부인으로 일관했다. 그는 이웅렬 회장(코오롱그룹)과 관련해서는 새 정부 출범 초기에 자신이 PCS 사업자 선정과 관련해 뒤를 봐줬다는 소문을 듣고 오히려 불쾌해 했고, 그 뒤로 기업인들과는 일부러 만나지 않아 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대선 자금 국내외 관리인으로 알려진 박태중씨(심우 대표)나 이우성씨(미국 뉴욕 교민)에 대해서도 절친한 친구이거나 아는 사이이지만 대선 자금과는 전혀 무관하거나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검찰은 최근 지역 민방 선정 등 일부 이권 개입 과정에서 수억원대의 금품을 받은 단서를 포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씨가 청문회라는 그물은 빠져나왔지만 검찰의 사법 처리라는 덫을 빠져 나오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