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 의원들, 공부 모임 붐
  • 이숙이 기자 (sookyiya@sisapress.com)
  • 승인 1996.06.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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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재선 중심 공부 모임 붐, 정책 제시에 주력…“차기 대권 위한 장기 포석” 시각도
 
신한국당에는 요즘 초·재선 의원을 중심으로 공부 모임이 붐을 이루고 있다. ‘바른정치 모임’과 ‘생활정치 실천모임’ ‘경제를 생각하는 모임’ ‘푸른정치 젊은연대’가 대표적이다. 모임마다 다루는 주제나 구성원의 특성은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뚜렷한 공통점이 있다. 특정인 중심으로 인맥을 형성하는 계보 모임을 탈피해, 실천 가능한 정책 대안을 제시하려는 경향이 그것이다.

이재오·이신범·김영선·박성범·맹형규 등 수도권 지역 초선 의원 13명이 참여하고 있는 바른정치 모임은 주로 정치적 과제를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난 6월3일 국회 귀빈 식당에서 가진 두 번째 모임에서는 회원들이 각기 관심 있는 주제에 관해 발제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우재 의원과 김문수 의원은 지방자치단체 및 국회의원 선거제도의 문제점에 대해 발표했고, 이재오 의원은 농촌 지역 인구가 줄어들고 있는데도 지역 행정 공무원은 늘어나는 모순된 현상을 지적했다. 맹형규 의원은 과거의 취재 경험을 들어 국회의 예결 심의가 제대로 이뤄질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신범 의원은 정치 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유권자의 정치 의식을 높이기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날 모임에서 나온 아이디어는 ‘상시 국회 운용 방안’(안상수 의원)에서부터 ‘소선거구제 폐지’(김충일 의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 모임 간사인 안상수 의원은 대부분 선거를 치르면서 공감한 문제들을 제기한다며, 주제 별로 깊이 논의해 정책 대안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바른정치 모임이 정치적 사안에 관심을 갖는다면, 생활정치 실천모임은 교통·주택·환경 등 민생 문제에 좀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국민 생활과 밀접한 문제를 다루는 이 모임에는 간사인 박명환 의원을 비롯해 박범진·박주천·유용태·강성재·김명섭·이상현 등 서울 출신 초·재선 의원 15명이 참여하고 있다.

지난 6월4일 세 번째 모임에서는 서울시의 교통 문제와 재개발사업이 집중 논의되었다. 박범진 의원은 선거 기간에 만난 유권자들이 가장 많이 거론한 문제가 교통난이었다면서, 서울의 교통 문제는 근본적으로 여당 책임이므로 서울시장이 야당 출신이라고 내버려둘 것이 아니라 여당 의원들이 적극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용태 의원은 자기 지역구(동작 을) 사례를 들며 ‘재개발은 주민의 65%, 재건축은 주민 백%가 찬성해야만 사업에 착수할 수 있다’는 현행법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 법조항을 악용해 원만한 재개발 사업을 방해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박명환 의원은 재개발을 할 때 평당 분양가가 너무 높아 주민 80% 이상이 입주권을 포기하는 것이나, 등기 이전이 끝나야만 은행 대출을 받을 수 있어 중도금 마련에 쩔쩔매야 하는 점 등 부조리한 현실을 꼼꼼히 지적했다.

주로 재선 의원들이 화두를 던지고 초선 의원들이 맞장구를 치는 형식으로 진행된 이 날 모임의 결론은 한 가지다. 서울시의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울 출신 의원이 똘똘 뭉쳐 당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인구에 비해 농촌 지역에 국회의원이 과다 배정돼 국정 논의나 재정 배분 등이 왜곡돼 왔다’라는 지적이나, ‘서울시가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야 다음 선거에서도 여당 의원이 압승할 수 있다’는 주장들은 생활정치 실천모임의 정치적 의도를 암시한다. 유권자들이 ‘달라진 서울’을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 재선을 기약하겠다는 것이다.

바른정치 모임과 생활정치 실천모임이 이미 본격적인 수업에 들어간 데 반해, 경제를 생각하는 모임과 푸른정치 젊은연대는 아직 회원 모집과 사업 구상 단계이다. 경제를 생각하는 모임에는 김덕룡 정무장관과 서청원 원내총무, 서상목 의원 등 중진급 의원들이 참여하고 있다. 총선을 앞둔 지난 3월21일 ‘서민 경제를 생각하는 모임’이라는 이름으로 첫 회합을 가졌던 회원들은 6월7일 다시 모임을 갖고 앞으로의 운영 방안을 협의했다.

이 날 모임에서는 수도권과 대도시 출신 의원으로 회원을 넓히고, 모임 이름에서 ‘서민’을 빼 중산층을 수용하며, 당정 협의를 원활히 하기 위해 여당만의 당내 모임으로 운영하자고 합의했다. “멱살 잡는 데만 관심을 기울일 것이 아니라 공부하고 일하는 국회를 만들어야 한다”라는 서상목 의원은, 여권 내부에서부터 침체된 경제를 살리는 정책 대안을 마련해 정쟁 중심의 정치에서 정책 중심의 정치로 분위기를 바꿔나가겠다고 모임의 취지를 설명했다.

 
현역 의원 8명을 포함해 40대 이하 젊은 당직자 24명으로 구성된 푸른정치 젊은연대는 정치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높이고, 정치에 새 바람을 불어넣기 위해 다양한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맹형규 의원이 회장을 맡고, 원내 간사는 홍준표 의원이, 원외 간사는 박홍석(관악 을) 위원장이 맡았다.

여권에 불고 있는 공부 바람은 과거와 매우 다른 양상이다. 지금까지 공부 면에서는 여당이 야당에 밀려왔던 것이 사실이다. 국회에 공부하는 풍토가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14대 때부터인데 주도권은 역시 야당이 쥐고 있었다. 그 결과 각종 언론 매체의 의정 활동 평가에서 야당 의원이 상위권을 휩쓸었다. 그러나 15대 들어 양상이 뒤바뀌고 있다. 여당 의원들의 각종 소모임이 활발한 반면 야당에서는 아직 뚜렷한 움직임이 없다. 대치 정국에 총력을 집중하느라 그럴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김대통령·이홍구 대표 ‘지원’ 약속

하지만 이러한 신한국당의 당내 모임을 순수하게만 보지 않는 시각도 있다. 단순한 공부 모임이 아니라 신한국당의 차기 대권을 위한 장기 포석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이런 시각은 몇 가지 점에서 설득력을 가진다. 우선 공부하는 여당 의원의 모습은 신한국당의 개혁 이미지를 극명하게 담아내고 있다. 또한 이 모임들이 지향하는 바가 신한국당의 집권 후반기 정국 구상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신한국당은 앞으로의 정치 과제를 민생 정치와 생활 정치에 맞추고 있다.

공부 모임이 수도권 의원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지금까지 여당의 전통적인 지지 기반은 농어촌 지역이었고, 따라서 농어촌 지역 의원들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신한국당은 지난 총선에서의 수도권 대약진을 발판 삼아 내년 대선에서도 수도권 압승을 만들어 낸다는 복안을 가지고 있다. 수도권 의원을 중심으로 당내 모임을 활성화하는 것도 이러한 수도권 득표 전략의 일환일 수 있다.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하듯 이홍구 대표는 지난 5월21일 고위당직자 회의에서 당 차원에서 이런 모임을 적극 장려하겠다고 지원을 약속했다. 또한 이원종 정무수석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이러한 모임을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대통령은 이 모임들의 건의가 정책에 적극 반영되도록 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한국당의 공부 모임은 원 구성을 놓고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와중에도 계속되었다. 야당이 개원 저지조 편성에 골몰하고 있을 때, 여당은 차기 집권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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