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유권자들의 이유 있는 '반란'
  • 羅權一 광주 주재기자 ()
  • 승인 1998.06.18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남·북 기초단체장 36명 가운데 무소속 후보 12명 뽑혀…지구당위원장들의 독선, 공천 잡음 등 심판
6·4 지방 선거에서 여당인 국민회의는 수도권에서 압승한 반면, 안방인 호남 지역에서는 여수시 등 12개 지역 시장·군수를 무소속에 내주는 ‘수모’를 당했다. ‘무소속 돌풍’에 휘말려 텃밭에서 36개 기초단체장 가운데 3분의 1을 빼앗기는 예상 외의 ‘참패’를 당한 것이다. 이같은 선거 결과는, 여당의 텃밭인 호남 지역에서 유권자들 스스로 ‘국민회의 공천 = 당선’이라는 등식을 깼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국민회의는 광주에서 시장·구청장·광역 의원을 싹쓸이했다. 그러나 전남 22개 지역 가운데 여수·해남 등 7개 지역 단체장을, 전북 14개 지역 가운데 군산·김제 등 5개 지역 단체장을 친여 무소속 후보에 내주었다.

그나마 전남 신안·고흥·장흥·완도 군에서 국민회의 후보만 단독 출마한 것을 감안한다면, 국민회의는 전남 지역에서 사실상 11개 단체장 선거에서만 승리한 셈이다. 심지어 국민회의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목포시장 선거에서도 권이담 국민회의 후보가 무소속 김정민 후보(46·목포대 지역개발학과 교수)의 선전에 고전 8천여표 차이로 간신히 이겼다.

유권자들, ‘호남 대통령’ 선출 뒤 선택 폭 넓어져

과거 선거 때마다 DJ의 당에 표를 몰아주었던 호남 지역 유권자들이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사실 이번 무소속 돌풍은 예견되었던 일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선거 기간 내내 말썽이 끊이지 않았던 공천 잡음에다, 현직 단체장이라는 프리미엄을 안고 출마한 친여 무소속 후보들의 탄탄한 지역구 관리, 그리고 호남 출신 대통령을 배출한 이후 한결 선택의 폭이 넓어진 유권자들의 투표 성향이 빚어낸 합작품이라는 것이다.

우선 공천권을 쥔 국민회의 지구당위원장들의 독선과 전횡, 공천 잡음에 대한 유권자들의 냉엄한 심판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애초 지구당위원장들이 지역구 관리와 민심 파악에 소홀했던 데다, 소수 특정인으로 구성된 후보선정위원회를 통한 밀실 공천, 경선 과정에서 불거진 금품 수수 시비와 향응 제공 등 불공정 경선에 대한 시비가 선거 기간에 끊이지 않았다. 선거 직전 금품 수수 파문이 불거진 전남 나주지구당 사례가 대표적이다(아래 상자 기사 참조).

이번 선거에서 무소속 당선자를 낸 여수·김제·장성 등 12개 지역 대부분이 지구당위원장의 불공정 경선 시비 등 공천 잡음이 발생한 지역임을 감안할 때, 이러한 분석은 설득력이 높다.

이와 관련해 무소속으로 출마한 임흥락 화순군수 당선자는 “후보선정위원회가 공천 신청자에 대한 심의 과정을 생략하고, 특정 인사를 만장일치로 지정해 공천하는 게 무슨 합리적인 공천인가? 이번 선거 결과는 공천 잡음에 대한 유권자의 심판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지구당 경선에서 후보를 선출해 놓고 당선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로 후보를 교체했다가, 대통령 재가 과정에서 원래 후보로 바뀐 해남 지역도 이번에 무소속 후보에게 패했다. 이와 관련해 김봉호 의원(해남·진도 지구당위원장)은 “애초 김향옥 후보가 당선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했지만 원칙대로 공천해 지구당위원장으로서 최선을 다했다. 경선 직전에야 고향에 내려와 선거에 뛰어든 사람이 3년여 동안 지역 기반을 다진 무소속 후보를 이기기는 사실 어렵다”라며 패배를 시인했다.

경선을 거부하거나 탈락한 현직 단체장들이 대거 무소속 출마를 강행하면서 ‘당선 후 국민회의 재입당’을 선언해, 국민회의 공천을 받은 후보와 무소속 후보간 명확한 구별이 사라져 버린 것도 무소속 후보 돌풍을 몰고 온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이다.

95년 단체장 선거 당시 국민회의 후보로 출마했던 이들 현직 단체장을 순수한 무소속 후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유권자들로서는 사실상 국민회의 후보자 두 사람을 놓고 투표하는 상황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현직 단체장의 프리미엄이 작용할 소지가 많았던 것이다.

이번에 당선된 무소속 후보들은 전남 해남과 구례를 제외한 나머지 10개 지역이 현직 단체장 출신이다. 특히 구례군을 제외한 전남 지역 무소속 당선자 6명은 이미 선거 직전인 지난 2일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당선되면 국민회의에 복당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밖에 유권자들이 호남 대통령을 뽑아 정권 교체를 이루고 난 뒤, 선거에 대한 부담감에서 벗어나 정당보다는 인물을 보고 투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도 있다.

“호남 대통령 선출이라는 한을 푼 마당에 지역 일꾼까지 꼭 국민회의 후보를 찍을 필요가 있느냐. 이제는 지역 발전을 위해 제대로 일할 사람을 뽑아야 한다.” 무소속 후보를 찍었다는 나태주씨(70·장성군 삼서면)의 말이다.

“국민회의 잘못하면 2년 뒤 큰코다친다”

무소속 김정민 목포시장 후보의 선전에 놀랐다며, 목포 지역 원로 서한태씨(71·‘목포포럼’ 고문)는 “DJ의 심장부라고 자부해 온 목포 시민들이 선거 부담감에서 벗어났다는 증거다. 이번 선거에서는 대다수 유권자가 인물을 보고 투표했다”라며 이같은 주장을 뒷받침했다.

전남 해남의 민화식 당선자나 구례의 전경태 당선자는, 95년 선거에서 패한 이후 절치부심하며 지역구 관리에 공을 들여온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경우다. 또 주승용 여수시장 당선자는 경선에 탈락한 후보들과 연합해 과학적인 선거운동을 벌여 당선되기도 했다.

국민회의에게 참패를 안긴 이번 선거 결과에 따라 앞으로 무소속 당선자를 낸 호남 지역 국민회의 지구당위원장들의 입지가 상당히 위축되고, 2년 뒤 총선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관측된다. 호남 지역에서 지구당위원장 교체와 지역 정치권 재편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갈수록 커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이광우 교수(전남대·정치학과)는 “국민회의가 이번 선거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2년 뒤 총선에서 진짜 큰코다치는 유권자들의 반란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호남 지역민들은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지금이야말로 높은 민주 의식에 걸맞는 후보를 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