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정치 속에 '모래 시계'는 멈췄다
  • 김종민 기자 (jm@e-sisa.co.kr)
  • 승인 2001.0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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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 정치인' 개혁 실험 결산표/성과, 기대에 못미쳐

사진설명 초심만이 살길 : 소장파 의원들이 스타일의 차이나 당파성에 얽매여 불신하지 않고 정치 개혁의 초심으로 돌아가 힘을 모야야 한다는 소리가 높다. 사진은 2000년 5월17일 여야 소장파 의원들이 광주 망월동 묘지를 참배하는 모습이다.

2000년 봄은 화려했다. 경제 쪽에서는 벤처 열기가 뜨거운 기운을 내뿜으면서 30여 년을 내려온 재벌 중심의 전통 산업에서 정보통신 중심의 신산업으로 거대한 '부의 이동'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진단까지 나왔다. 정치 쪽에서는 16대 총선에서 이른바 386 후보들이 대거 출마해 정치 개혁의 기수로 여론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몇 년 후면 신산업의 부와 386 정치 세대가 결합해 한국 사회의 새로운 리더십이 형성될 것이라는 성급한 전망까지 등장했다.

그러나 386 정치인,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30, 40대 정치 신인들의 2000년 정치 실험은 기대에 못미쳤다는 것이 대체적인 여론이다. 16대 총선이 끝난 후 각종 언론의 인터뷰 공세를 받으며 이들이 국민 앞에 약속한 것은 대체로 이랬다. 1인 보스 정치·계파 정치·줄서기 정치에 순응하지 않겠다, 부당한 당론과 정치 관행은 거부하겠다, 크로스 보팅을 관철하겠다, 국회가 정쟁으로 파행을 겪으면 젊은 정치인들이 모여 여야 지도부에 저항하겠다, 초당적 사안에 대해서는 정책을 중심으로 여야를 뛰어넘어 연대하겠다 등등.

그러나 이러한 약속들은 16대 국회 개원 초기부터 지켜지지 않았다. 국회의장과 여야 총무를 자유 경선으로 뽑자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결과는 여야 지도부의 '오더'대로 되었다. 여야를 뛰어넘는 연대 노력도 지난해 5월17일 광주 망월동 참배 이후로 점점 약해지더니 날이 갈수록 각 당의 입장을 대변하는 분위기가 강해지고 있다. 최근에는 이들이 정치 개혁이라는 대의보다는 전략 전술상의 작은 차이에 매몰되거나 소속 정당의 틀에 안주하는 바람에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서 동질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인식 차이·내부 균열로 동질성 상실

이들의 균열 조짐은 우선 스타일의 차이에서 비롯되고 있다. 지난해 7월18일 민주당 김성호·정범구, 한나라당 서상섭·안영근 등 여야 의원 7명은 국회 공전 사태를 비판하면서 당 지도부의 공격수 역할을 거부하겠다고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의당 보여야 할 얼굴들이 보이지 않았다. 이 날 참여하지 않은 민주당 송영길 의원은 "바로 전날 전화 연락을 받았다. 이런 문제는 충분히 논의를 거쳤어야 하는데 너무 급하게 추진해 참여하기가 어려웠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8월 민주당 김민석 의원이 최고위원에 출마했을 때는 선거 슬로건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386의원들과 원외 위원장들이 김의원을 조직적으로 밀기로 결의했는데, 김성호·장성민 의원이 김의원에게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적극적으로 밀겠으나 '김민석과 함께 계파 정치 청산을'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야 한다는 요구였다. '동교동 독재'를 겨냥한 구호였다. 당사자인 김의원을 비롯해 우상호 위원장 등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괜히 당내 분란을 일으켜 지지 기반을 좁힐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들 두 가지 예에서 나타나듯이, 한쪽은 문제가 있을 때 바로 치고 나가자는 적극론자인 민주당 김성호·장성민·정범구 의원, 한나라당 김원웅·안영근·서상섭 의원이다. 다른 한쪽은 좀더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집단적인 힘을 축적해 가야 한다는 신중론자인 민주당 송영길·임종석·김민석 의원, 한나라당 김부겸·김영춘·원희룡 의원이다. 공교롭게 신중론자는 대부분 운동권 출신 의원이다.

적극론자에 속하는 김성호 의원은 "자신이 아무리 개혁적이라고 해도 지금, 여기서 발언하지 않고 좌고우면하면 기성 정치에 길들 수밖에 없다"라며 신중론을 주장하는 이들을 비판했다. 그는 또 김민석 의원이 전당대회 때 계파 정치 청산을 들고 나왔다면 지난 12월 정동영 최고위원의 권노갑 퇴진 발언으로 이어지며 소장 개혁파가 국민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반면 신중론자들은 전략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을 강조한다. 김부겸 의원은 "구정치의 관행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목소리를 낮추고 폭을 넓혀서 제대로 대항할 힘을 만들어 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김민석 의원은 민주당 소장파의 당쇄신 요구를 예로 들면서 "침로(針路)가 불투명했다. 우리의 요구는 단지 권노갑 최고위원에서 김중권 대표로의 변화가 아니라 시스템의 근본적인 변화였다"라면서 전략 부재가 이런 결과를 낳았다고 비판했다(28쪽 인터뷰 참조).

이러한 인식 차이는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적극적인 행동을 주장하는 한 386의원은 "386이라고 다 같은 게 아니다. 이제 알곡과 쭉정이가 구분될 것이다"라고까지 표현했다. 원희룡·임종석 의원같이 당직을 맡은 경우에는 이회창 왕당파니 동교동 막내니 하는 얘기도 듣는다.


적극론·신중론으로 갈리고, 당파성 못넘어

신중론을 주장하는 한 의원은 "치고 나가는 것이 시원스럽기는 하겠지만 그것도 1년이다. 올해에는 많이 사그라질 것이다"라고 적극론자들의 단명을 예고했다. 적극론자들의 경우 개인적 스타 의식에서 돌출하는 경향이 강해 결국 신뢰를 얻지 못할 것이라는 비판이다.

386 정치 신인들을 갈라놓는 또 하나의 벽은 당파성이다. 16대 개원 초에는 당을 뛰어넘어 서로 연대하고 네트워크를 짜보자던 의욕이 강했으나 국가보안법 폐지 발의안 등 몇몇 법안에 공동 서명한 것을 제외하고 그동안의 실험은 사실상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지난해 9월 초 여야 공동성명이 무산된 사건은 소장파의 개혁 의지가 당파성의 벽을 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당시 여야 소장파 의원 20여명은 국회법 날치기와 선거법 실사 개입 의혹 등으로 파행을 겪고 있는 국회를 정상화해야 한다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추진했다. 그러나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들은 선거법 실사 개입 의혹에 대한 특검제를 주장하는 한나라당의 당론을 고수했고, 민주당 소장파 의원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게다가 민주당의 한 의원이 여야 지도부 동반 사퇴를 포함시키자고 주장하자 한나라당 의원들이 "날치기 책임은 여당 지도부에 있는데 웬 물귀신 작전이냐"라며 이를 당략적인 암수로 보는 바람에 결국 거사 시도는 좌절했다.

서상섭 의원은 소장파 의원들의 균열 조짐에 대해 "나 혼자, 내 방식대로만 정치 개혁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높여야 하지만 이를 집단적 흐름으로 넓혀 가는 데 실패하면 그 목소리도 의미가 없다"라면서, 큰 틀에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소장파 의원은 "솔직히 양당 모두 패거리 정치 아니냐. 여당은 대통령이라는 권력의 압력에서, 야당은 당의 단합이라는 전가의 보도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패거리 정치니 권위주의니 하는 3김식 정치 구태의 뿌리에는 결국 자기 중심적인 아집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정치 개혁을 내건 소장파 정치 신인들마저도 작은 차이로 서로 반목하고 불신한다면 유권자가 그들에게서 정치 개혁의 희망을 찾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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