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질 듯 터질 듯하는' 합당론
  • 이숙이 기자 (sookyi@e-sisa.co.kr)
  • 승인 2001.03.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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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P 회동 후 '일단 잠복'…7∼8월 논의 본격화 예상

사진설명 합당 전주곡? : 지난 3월16일 DJP 회동 이후 잠복한 합당론은 머지않아 다시 떠오르리라는 전망이다. ⓒ연합뉴스

"단골 손님 납셨군!" 또다시 불거진 DJP 합당론에 대한 한 정치권 인사의 촌평이다. 그의 말처럼 여권의 합당론은 새로운 뉴스가 아니다. 그동안 여러 차례 수면 위로 떠올랐지만 그때마다 갖가지 추측만 남긴 채 잠복하기를 거듭했다. 그런데도 합당론이 돌출할 때마다 정치권이 긴장하는 것은 그 파괴력 때문이다. 정치사적 의미 같은 거창한 이유는 둘째치더라도 DJP 합당은 당장 차기 대선에 최대 변수가 된다.

최근의 합당론은 자민련 송석찬 의원의 '사미인곡'에서 촉발되었다. 민주당에서 자민련으로 이적한 그는 지난 3월12일 양당 합당을 건의하는 장문의 편지를 김대중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송의원 개인의 돌출 발언으로 끝날 것 같던 합당론은 민주당 이인제 최고위원의 지원 사격으로 더욱 힘을 얻었다. 이위원은 송의원의 편지가 공개된 다음날 "정치인들이 비전과 철학, 정책과 노선을 기준으로 2개의 큰 산맥(정당)으로 재편해 나아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라며 양당 체제로 개편할 것을 강조했다. 그는 또 합당론을 제기한 송석찬 의원의 생각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며 노골적으로 합당론을 지지했다.

이런 두 사람의 발언에 대해 민주당과 자민련은 여느 때처럼 '개인 의견'이라며 서둘러 덮으려는 분위기다. 민주당 김중권 대표는 "자민련과 공조해 현안을 풀어갈 수 있기 때문에 합당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여건도 충족되지 않았다"라고 부인했고, 자민련 변웅전 대변인은 '개인 차원의 의견'이라며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3월16일 DJP 회동에서도 '밀접한 공조'만 합의했을 뿐, 합당은 논의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송의원과 이위원이 합당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쉽게 짐작이 간다. 송의원은 출신지만 충청도일 뿐이지 골수 DJ맨이다. 이 때문에 자민련으로 간 후에도 국가보안법 개정 같은 민감한 정책 사안에 대해 자민련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등 '몸은 자민련, 마음은 민주당'인 행보를 보여 왔다.

이인제 위원의 경우는 더욱 절실하다. 그의 한 측근은 양당제가 이위원의 평소 지론이며 합당도 그런 맥락에서 필요하다는 얘기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위원 처지에서 보면 DJP 공조는 계륵이다. DJP 공조를 안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충청도 대표성을 놓고 JP와 겨루는 것은 이위원에게 손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4·26 보선을 앞두고 벌어지고 있는 논산시장 공천 잡음이 대표 사례다. 현재 그는 진퇴양난 처지에 놓여 있다. 논산 시장을 고집하자니 JP에게 밉보일 것이 뻔하고, 양보하자니 이 지역 민주당 당원들의 반발이 거세기 때문이다. 민주당과 자민련이 내년 지방 선거에서 연합 공천을 하기로 할 경우 이위원과 JP의 마찰은 더욱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이미 자민련 오장섭 총장은 최근 민주당 박상규 총장을 만난 자리에서 "충청은 자민련, 호남은 민주당이 공천하고 나머지 지역은 양당이 상의해 결정하자"는 입장을 밝히며 충청권에 대한 자민련의 배타적 권리를 주장했다. 따라서 이위원으로서는 차라리 합당을 해 JP를 총재로 받들고 자신은 충청권 맹주 자리를 독차지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정가에서는 이번 합당론이 단순히 두 사람의 이해득실 때문에 불거진 것만은 아니라는 해석이다. 이미 DJP 사이에는 합당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고, 그 와중에 성미 급한 두 사람이 총대를 멨다는 것이다. 한 민주당 의원은 "아무리 경칩이라지만 개구리가 너무 일찍 나온 것 같다"라고 말했다.

합당할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보는 쪽의 논리는 세 가지다. 우선 DJP 모두 지난 4·13 총선에서의 참패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과 자민련이 각자 후보를 냈다가 쓴맛을 보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반드시 공조할 것이다. 하지만 한두 군데 재·보선이라면 모를까 전국을 연합 공천하기란 낙타가 바늘 구멍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라고 말했다. 결국 합당밖에는 길이 없다는 뜻이다.

두 번째는, 1997년 대선과 달리 다음 대선에서는 DJP 양자 간의 맞교환 카드가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지난 대선 때 DJ는 JP로부터 선거 지원을 받는 대신 '공동 정권 구성'과 '내각제 개헌'을 약속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다르다. 내각제 개헌은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가 결사 반대해 현실성이 없는 카드다. 게다가 JP를 차기 공동 정권의 총리로 다시 쓸 수도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JP가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카드가 통합 여당 총재로서 당권을 장악하는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와 관련해 자민련의 한 고위 인사는 이렇게 반문했다. "만에 하나 DJP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을 때를 가정해 보자. 자민련을 유지한 채 DJP 공조에만 머무른다면 JP는 제3당 총수로 전락하지만, 합당을 한 상태라면 거대 야당의 총수다. JP가 과연 무엇을 택하겠는가?"


한나라당 비주류·JP '태도 변화' 심상찮아


3·16 DJP 회동 직후 나온 JP의 발언은 이런 관측에 더욱 힘을 실어주고 있다. 그는 대선에 출마하지 않고 킹메이커 역할을 하겠다는 뜻을 분명히했다. 본인이 직접 후보로 나섰다가 막판에 양보했던 1997년 상황과는 사뭇 다르다.

한나라당의 느슨해진 결집력이 상대적으로 DJP 합당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은 "이회창 총재의 포용력으로는 정계 개편을 방어할 힘이 없다. DJP가 합당할 경우 한나라당 비주류가 동요할 가능성이 크고, 그렇다면 자민련에서 이탈자가 몇 명 나와도 큰 지장이 없다"라고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 한나라당 비주류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 이부영 부총재와 손학규 의원은 3월14일 이총재를 직·간접으로 비판했다. 이에 앞서 김덕룡 의원은 "한나라당이 새로운 정책 대안을 제시하고 심판받아야 하는데, 이총재는 지하철 탐방 등 대선용 인기 관리에만 정신을 쏟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이부총재와 김의원은 3월22일에도 나란히 당 운영 방식의 문제점을 지적해 주위로부터 독자 행보를 위한 명분 쌓기에 나선 것 아니냐는 관측을 낳고 있다.

선거 공조만 확인한 DJP 회동을 기점으로 합당론은 다시 한번 잠복할 조짐이다. 하지만 DJ와 민주당이 합당을 열망하고, JP가 다른 대안을 찾지 못하는 한 합당론은 또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 것으로 보인다. 합당의 열쇠를 쥐고 있는 JP의 태도 변화도 눈여겨볼 만하다. 그는 과거처럼 합당론을 일축하는 대신 '올 봄에는 정치권에 큰 변화가 있을 것' '3당 연정을 가지고 뭘 그러나. 앞으로 큰 일이 얼마든지 많을 텐데'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싶다' 같은 심상치 않은 발언을 늘어놓고 있다. 정가에서는 정기 국회에서의 정책 공조와 내년 지방 선거에서의 연합 공천 문제가 불거질 올 7∼8월께 합당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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