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충성' 함정에 갇힌 DJ 인사
  • 안철흥 기자 (epigon@e-sisa.co.kr)
  • 승인 2001.06.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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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수 파문'으로 또다시 허점 노출…'비공식 라인' 의존도 문제


충성 문건 파문 과정에서 거짓말을 한 것이 문제였을 뿐, 인선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안동수 법무부장관이 경질된 이후, 청와대 관계자들을 만나면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청와대의 시각과는 정반대다. 임명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 '항명' 세력을 포함한 여권 내 다수의 시각이다. 일단은 비판의 화살이 '비공식 라인'에 집중되고 있지만, 과녁이 언제 김대중 대통령을 향하게 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분위기다. 이번 인사만큼 DJ식 인사의 특징과 문제점이 응축된 사례도 없기 때문이다. '명분과 충성도'라는 DJ식 인사의 이중 잣대가 한계에 다다른 느낌이다.


"안동수 장관, 인권 이미지 노린 DJ 회심의 카드"




5월21일 안동수 법무부장관-신승남 검찰총장이라는 인사 결과가 발표되었을 때만 해도, 안동수 카드는 신승남 총장을 세우기 위해 급조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사실 안장관 인선은 신총장 임명 못지 않은 DJ 회심의 작품이었다. "DJ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했다." 여권 관계자의 말이다. 호남 출신인 신승남 총장이 검찰권을 확실히 장악하기 위한 카드였다면, '인권 변호사' 출신인 안동수씨는 인권 국가를 상징할 카드였다는 것이다.


지난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이후 인권 국가를 강조하는 DJ의 발언은 수시로 이어졌다. 4월 국회에서 인권법을 반드시 처리하라고 당에 주문한 것도 그였다. 인권 국가를 상징할 수 있는 장관을 대동하고 인권법에 서명하는 대통령, 이것은 '명분주의자' DJ가 취할 수 있는 화룡점정 카드였다. 더구나 안동수씨는 이런 조건에 충성심까지 갖춘 인물이었다.


김주현 공직기강비서관-신광옥 민정수석-한광옥 청와대 비서실장을 통해 올라오는 '공식 라인'의 존안 자료는 처음부터 주요 검토 대상이 되지 못했다. 대신 DJ는 '비공식 라인'을 통해 새로운 인물을 찾았고, 안동수씨는 이런 과정을 통해 발탁되었다. 따라서 안씨는 존안 자료를 통한 검증을 충분히 거치지 못한 상태에서 발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때문에 비공식 라인이 누구인지가 정가의 초점으로 떠올랐다. 권노갑 고문, 한광옥 비서실장, 박지원 정책기획수석 등은 DJ가 지난 인사 때 의견을 수렴하는 주요 비선 라인이었다는 이유로 이번에도 거론되는 인물들이다. 또한 신 건 국정원장은 안씨의 후원회장을 지냈다는 점이, 남궁진 정무수석은 안씨와 중앙고 선후배 사이라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안씨 추천과 관련된 비공식 라인이 누구인지는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고, 앞으로도 밝혀지지 않을 공산이 크다. 사실 비공식 라인이 누구인가는 부차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누가 추천했건 결국 최종 책임은 인사권자인 DJ 몫이기 때문이다.


"충성-배반 콤플렉스가 원인"


이번 법무부장관 인사 파동은 또한 명분을 중시하는 DJ의 인사 잣대가 자체로도 얼마나 빈약한 것인가를 동시에 보여주었다. 인권 변호사라는 점이 안씨를 발탁한 주요 이유였지만, 사실 안씨의 인권 변호사 경력은 상당 부분 과장되었다는 것이 법조계 안팎의 지적이다(33쪽 상자 기사 참조). 이 때문에 여권에서조차 내용을 갖춘 인권 변호사 출신 장관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인권 변호사 딱지가 붙은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라는 냉소가 나오기도 했다. 내실보다는 이름표를 중시하는 DJ식 명분주의는 현정부의 정책 실패에도 여러 차례 원인으로 작용했다. 민주당의 한 최고위원은, 외환 위기의 급한 불만 끈 상태에서 성급하게 IMF 극복을 선언하거나, 복지 국가라는 명분을 얻기 위해 준비 부족 상태에서 의약 분업을 강행하는 등 지나치게 명분에 집착하고 있다고 DJ식 명분주의를 비판했다. 이번 인사 파문도 DJ의 이런 명분 콤플렉스가 빚어낸 사례라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명분 못지 않게 DJ식 인사의 중요한 코드는 '충성도'다. 그러나 충성의 잣대 또한 지나치게 협소하다. 동교동계이거나 호남 출신이 아니면 100%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 여권 내부에서조차 불만으로 지적되곤 한다. 특히 사정기관 책임자를 임명할 경우 이런 폐쇄적인 충성 잣대는 거의 '원칙'이 되다시피 하고 있다. 신승남 총장을 임명함으로써 대부분의 사정기관 책임자가 호남 출신으로 바뀐 것이 대표적이다.


DJ는 왜 그토록 충성도에 집착할까. 핍박받던 야당 시절에 생긴 보안 의식이 굳어졌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가장 일반적이다. 야당 시절 측근들의 배신을 여러 차례 경험한 DJ가 대통령이 된 다음에도 그런 충성-배반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다른 분석도 있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문민 정부 시절 김태정 검찰총장과 임재문 기무사령관이 중립을 지켰기 때문에 정권 교체가 가능했다고 지적하면서, "DJ로서는 선거를 앞두고 이런 내부 이탈을 막기 위해서도 동향 출신의 충성심이 보장된 인사를 발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충성-배반 콤플렉스가 극도로 반영된 최근 사례로 지난 4월30일 국무총리 해임안 표결을 들 수 있다. 이날 표결에 참석한 민주당 의원은 37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기권했다. 물론 당 지도부의 결정에 따른 일이었다. 국회 내 1석이 절박한 상황에서 DJ가 선택한 것은 믿음이 아니라 원천 봉쇄였다.


충성 콤플렉스는 민심이나 여론을 대하는 데에서도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민심은 편견에 사로잡힐 수 있고, 반드시 옳지도 않다는 것이 DJ 주변의 인식이다. 때문에 민심은 고려 대상이기는 하되 결정적인 변수는 못된다. DJ 주변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그 중 한 사람은 민심을 '퍼블릭 오피니언'(여론)과 '퍼퓰러 오피니언'(속론)으로 나누면서, 속론은 따를 필요가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민주당 안에서는 '폼 잡다가 망한다' '매 한번 맞고 말지'와 같은 말을 쉽게 들을 수 있다. 민주당 안에서 '여론에 따른다'는 말보다 '여론에 휘둘린다'는 말이 더 자주 들리는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민주당의 한 최고위원은 이런 의식이 결국 정치를 공학적으로 접근하게 만드는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DJ가 너무 똑똑해서 참모들이 제구실을 못한다는 점도 DJ식 인사와 관련된 오랜 정설이다. 현정권 초반 때 인사의 '공식 라인' 주변에 있었던 한 인사는, 과거 정권과 달리 현정권에서는 국정원 등의 존안 자료가 인사에 별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고 말했다. 물론 국정원이나 경찰의 인사 파일이 현정권의 실세들을 나쁘게 묘사한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DJ에게 신뢰를 주지 못한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DJ의 자체 인맥이 광범위했고, 또 존안 자료보다 자신이 해당 인물을 더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도 존안 자료가 대접받지 못한 요인이었다. 결국 정식 계통의 보고 기능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고, 비선 라인은 상대적으로 두드러졌다.


민주당 무기력 여실히 드러내


1999년 1월 법무부장관 임명 건이 대표적이다. 당시 국정원 존안 자료는 김태정씨를 기용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을 여러 측면에서 기술했으나, 결국 무시되었다. 청와대 일각에서 국정원이 신 건 당시 국정원 1차장을 발탁시키려고 김태정씨를 음해하고 있다는 문제 제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DJ는 국정원 존안 자료보다 청와대 측근의 말을 신뢰했으나, 결과는 옷로비 사건 파문으로 나타났다.


DJ가 야당 시절의 마이너리티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인사가 계속된다는 지적도 있다. 민주당 관계자는 집단 내에서조차 인정받지 못하던 사람이 갑자기 출세하는 것을 보면서 누가 인정할 수 있겠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결국 안동수-신승남 카드는 김대통령의 명분 콤플렉스와 충성 콤플렉스가 결합해 빚어진 인사였다. 그러나 명분도 살리지 못했고, 하반기 국정 흐름을 장악하려던 당초 의도도 어긋나 버렸다. 신승남 총장 체제에서의 '기획 수사'는 이제 물 건너갔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5월23일, DJ는 바라마지 않던 인권법 서명식에 참석했다. 그러나 인권 국가를 상징하는 법무부장관은 곁에 없었고, 대통령의 표정은 내내 어두웠다.


문제는 이번 인사 파문이 비단 DJ식 인사 스타일만 구긴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사 파문 과정에서 민주당은 또 한번 철저하게 소외되었고,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우왕좌왕했다. 5월22일 문건 파문이 불거진 다음에도 민주당 전용학 대변인은 하루 네 차례나 옹호 논평을 발표하는 등 안씨 변호에 나섰다. 안씨가 경질되기 전 민주당에서는 확대간부회의와 당4역 회의가 계속 열렸지만, 안씨 문제는 한 번도 의제로 채택되지 않았다. 당이 갈피를 잡은 것은 안씨 사퇴가 기정 사실이 된 22일 밤, 한광옥 비서실장이 김중권 대표와 만난 뒤부터였다.


이런 당의 무기력을 지적하면서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비마론(肥馬論)을 외치는 지도부가 진짜 비마할 기회를 놓쳐버렸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당이 확대간부회의에서 문제 제기를 먼저하고, 이를 김중권 대표가 받아 청와대에 전달하는 모양새를 갖추었어야 했다는 지적이다.
최근 민주당 안에서 불거져 나오기 시작한 당정 쇄신 주장도 이런 불만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초·재선 소장파 의원들이 연이어 성명을 발표한 데 이어, 최고위원들도 5월27일 밤 긴급 간담회와 28일 확대간부회의에서 격론을 벌였다. 한 개혁파 의원은 "당정 쇄신 요구가 반영되지 않을 경우 3차 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결의를 다지기도 했다.


이런 과정에서 당내 일부에서는 전면적인 당정 쇄신 대신 누군가가 상징적으로 책임지고 희생될 것이라는 관측까지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비공식 라인의 희생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가능성은 없다는 점이다. 결국 모든 책임은 DJ에게 있다는 목소리가 수면 밑에 잠복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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