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금 등쌀'에 정치인 '울상'
  • 이숙이 기자 (sookyi@e-sisa.co.kr)
  • 승인 2001.06.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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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언론사에 성금 내느라 '고역'…기자들 "우리는 앵벌이"


풍경 하나. 지난 6월12일 낮, 유력 정치인과 기자 서넛이 점심을 하는 자리에서 한 방송사 기자의 휴대 전화가 연달아 울렸다. 그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가 한참 후에 돌아왔다. "김중권 대표가 가뭄 극복 성금 모금 생방송에 나오기로 해놓고 안 나타난다고 회사가 난리네. 김대표 쪽에 연락했더니 행사가 좀 늦게 끝나서 지금 가는 중이래." 그 기자가 '후유' 하고 한숨을 돌렸을 때는 이미 정치 현안에 대한 얘기가 많이 오간 뒤였다.




풍경 둘. 6월13일 오후, 한 일간지 기자가 전화통을 붙잡고 씨름하고 있었다. "○○ 보좌관이세요? 저 ○○○인데요. 제가 왜 전화했는지 아시죠? 가뭄 극복 성금 좀 보내주셨으면 하고요. 신문에 난 계좌 번호로 넣어주시면 됩니다. 이름은 내일 신문에 실을 게요."


전국민이 온통 '가뭄과의 전쟁'을 치르는 사이 각 언론사 기자들은 성금 모금 캠페인에 시달렸다. 한 기자가 표현한 대로라면 '앵벌이'가 된 셈이다. 그는 "기사 마감하라는 것보다 성금 낼 사람 찾으라는 데스크 전화가 더 무섭다"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기자들이 총동원된 만큼 정치인의 시달림도 컸다. 김대중 대통령은 세 방송사의 성금 모금 생방송에 다 출연했다. 참모회의에서 대통령이 모든 방송에 나가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논의가 있었지만, 방송사의 간곡한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언론사들의 '사세 과시용' 압력에 시달린 것은 대통령만이 아니었다. 여야 지도부나 국회 상임위원장 같은 요직에 있는 인사들이라면 대부분 세 방송에 모두 얼굴을 비쳐야 했다. 중앙 일간지와 출신 지역 언론사에도 빠짐없이 금일봉을 보냈음은 물론이다. 아예 안하면 모를까, 어떤 곳은 보내고 어떤 곳은 빼면 훗날이 두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대변인이라는 이유로 모든 언론에 등장한 민주당 전용학 의원은 초선인데도 3백만원 가량이 들었다고 한다. 한 상임위 위원장은 "중앙 언론사만 챙긴다 해도 무려 4백만∼5백만 원이 필요하다고 해 아예 포기했다"라고 말했다.


'금일봉'은 대개 대표급이 100만원, 최고위원 같은 고위 당직자는 50만원, 기타 당직자는 20만∼30만 원 수준이라고 한다. 경제인에 비하면 그나마 정치인은 나은 편이다. 금일봉이어서 액수가 공개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반 의원 중에는 5만원을 넣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회창·이해찬, 언론사 요청 거절


그런데 이런 막강 언론의 압력에도 꿋꿋이 버틴 정치인이 있다.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와 민주당 이해찬 정책위의장이 대표적이다. 원래 언론과 그리 '친하지' 않은 이의장은 쇼하는 것 같아 싫다며 KBS에만 성금을 내고 말았다.


하지만 이총재의 경우는 사정이 좀 다르다. 그는 여야 지도부가 총출동한 6월12일 SBS 생방송에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SBS 간부들이 모두 나섰지만 요지부동이었다. 마침내 SBS 주주이자 이총재와 가까운 신영균 고문이 부랴부랴 찾아가자 이총재는 SBS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다.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이총재가 가뭄 현장을 찾아 논에 물 대는 장면을 보도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6월6일 현충일에 국기를 달지 않은 인사들을 비판하면서 이총재 자택 화면을 내보냈다는 것이다. 이 사건 이후 SBS는 이총재 보도에 무척 신경을 쓰는 눈치다. 이총재가 언론을 상대로 되치기한 셈이다.


성금 모금 때만 되면 비중 있는 인물을 등장시켜 사세를 과시하려는 언론과 이 기회를 적극 활용하려는 정치인이 만나 이번 가뭄에도 여러 가지 촌극을 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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