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비서실 '박지원 천하'
  • 김종민·이숙이 기자 (jm@e-sisa.co.kr)
  • 승인 2001.09.24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당·정 개편으로 비중 더 높아져…"동교동계 대리인" 반발도
'박지원의 청와대'. 이번에 개편된 청와대 비서진 진용에 붙은 별명이다. 박지원 정책기획수석은 이번 당·정 개편 과정에서 자리 변동이 없었다. 그러나 다른 자리가 그를 위해서 움직였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청와대 내에서 그의 위상과 비중은 부쩍 커졌다.




이상주 신임 청와대 비서실장도 만만치 않은 인물이라는 평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정치는 전공이 아니다(57쪽 상자 기사 참조). 유선호 정무수석 역시 경량급이다. 초선 출신에 원외인 유수석이 임명되자 여권 내부에서는 대부분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일각에서는 '경기 군포 재·보궐 선거에 대비한 경력 관리 차원의 인사'라는 해설이 나온다. 16대 총선 때 경기·군포에서 유수석을 누르고 당선된 한나라당 김부겸 의원은 선거법으로 기소되어 1심에서 벌금 2백50만원을 선고받은 상태.


이 때문에 정가에서는 DJ가 정무수석 자리 자체를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얘기가 나온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대통령이 정치 문제는 자신이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정무수석은 그냥 심부름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라고 분석했다. 웬만한 일은 대통령 본인이 판단하고 비중 있는 일 처리는 박수석에게 맡기려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다.


사실 정무수석의 역할에 대해서는 전임 남궁진 수석 때도 여야 모두 불만이 많았다. 동교동계 의원들조차 정무수석이 의원들을 너무 안 만난다면서 "대통령을 못 만나면 정무수석이라도 만나야 정치권 의견이 대통령에게 전달된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런 게 없으니 자연히 언로가 막혔다고 느끼게 된다"라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이에 반해 DJ가 유독 박수석의 활동 공간을 넓혀 준 것은 그만큼 그에 대한 신임과 의존도가 크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과도한 밀착성 때문에 '박지원의 청와대'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다. 대통령이 시스템보다는 측근에 의존하는 '인치'를 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특히 박수석이 동교동계의 대리인으로 각인되어 있다는 점은 대통령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사실 박수석에 대한 정치권 안팎의 거부감은 박수석 개인에 대한 반감이라기보다 그를 앞세워 동교동계가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불만이기 때문이다. 이를 입증하는 사례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박수석은 지난 9월7일 기자들에게 개각 내용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자신이 비서실장을 마다했고 김옥두 의원 역시 해양수산부장관을 고사했다고 전했다. 박수석의 말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여권 내에서조차 '동교동이 뒤에서 다 해먹는 것 아니냐'는 볼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루 전인 9월6일에도 심상치 않은 사건이 벌어졌다. 청와대 공보수석실에서는 그 날 저녁 한광옥 대표 내정설을 언론에 알렸다. 차기 당 대표를 놓고 여권 내분 양상이 심해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몇 군데 언론사로부터 반발이 터져 나왔다. 특별한 취재원으로부터 정보를 듣고 '한광옥 대표-박지원 비서실장'이라고 1면 머리 기사로 올려놓았는데 미리 공개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동교동 쪽에서 개별적으로 이런 내용을 흘렸고, 신문사마다 자사 특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청와대 일각에서는 동교동계가 언론 플레이로 대통령을 압박하려 한 것 아니냐는 얘기가 흘러 나왔다.


"YS 시절 김현철-이원종 라인 전철 밟을라"


구로 을 재선거 공천 문제도 논란이 적지 않았다. 동교동 구파가 김한길 문화관광부장관을 강하게 민 것을 두고 당내에서는 남궁진 전 청와대 정무수석을 김장관 후임으로 앉히기 위한 포석이라며 반발이 거셌다.


여권 소식통들에 따르면 DJ는 YS의 임기 말을 반면교사로 삼고 있다. YS 정권 때 차기 경선에서 민주계 출신 후보들이 제각기 출마하고 이를 통제하기 위해 정치발전협의회(정발협)를 급조했지만 결국 내분으로 치달았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것이다. 자신의 친위 세력을 모아 '중도개혁포럼'을 일찌감치 만들어 놓고, 차기에 뜻이 있는 한화갑 최고위원에게 대표를 맡기지 않은 것에는 이런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DJ는 아직 '김현철-이원종 라인'의 교훈을 새기지는 못한 것 같다. YS는 임기 말에 접어들면서 가장 믿을 수 있는 비선 라인인 아들 김현철씨와 그의 청와대 연결 사슬인 이원종 정무수석에게 과도하게 의존하다 일을 그르쳤다. 민주당 안팎에서는 '권노갑-박지원 라인'이 그 전철을 밟는 것 아니냐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