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권 레이스 ‘JJ 다크호스’ 떴다
  • 이숙이 기자 (sookyi@e-sisa.co.kr)
  • 승인 2002.0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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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정몽준, 개혁 이미지·월드컵 바람 타고 급부상…유권자의 변화 욕구 반영…취약한 기반이 약점
'목하첨자(木下添子, 나무 아래 아들 자를 더하는 곳에), 목가병국(木加丙國, 나무에 병을 더하는 나라가 있을진대), 존읍정복(尊邑鼎覆, 존읍이 솥을 뒤집으려 한다).’


2000년 12월 김성욱씨가 출간한 전문 역학서 <매화역수>에 나오는 2002년 대선 관련 예언이다. 예로부터 <정감록> 같은 우리나라 비결서는 한자를 분리하는 식으로 암호를 만들곤 했는데, 이를 조합해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木 아래에 子를 더하라 했으니 李씨 성을 의미한다. 그가 나라(國)의 권력(柄)을 잡으려 한다. 그런데 존읍(尊邑), 즉 鄭씨가 나타나 그것을 깨뜨리려 한다.’




1997년 김대중 후보 당선을 공개적으로 장담하고 1998년 ‘동해안에서 천연 가스층이 발견될 것’(실제로 1년 후 동해안 대륙붕에서 천연가스층이 발견되었다)이라고 예언해 화제가 된 기(氣) 수련가 김영학씨도 비슷한 예언을 내놓았다.


“늙은 용 세 마리가 하늘을 향해 승천하려는 형국이다. 그 가운데 성에 목(木)자 들어가 있는 사람이 매우 유리하다. 그런데 대선 구도에 닭 유(酉)자가 들어간 성씨가 개입하면 그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이 두 예언은 모두 ‘이씨가 대권을 향해 줄달음치는데 정씨가 발목을 잡는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역술에 민감한 정가에서는 이를 두고 민주당 경선이 이인제 고문 대 정동영 고문의 싸움이 된다는 얘기라는 둥, 정몽준 의원이 신당을 만들어 이회창 총재를 견제한다는 얘기라는 둥 해석이 구구하다.


어쨌거나 2002년 대선 관련 점괘에 나타난 최대 변수는 ‘정씨’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새해 들어 정동영·정몽준 두 정씨 주자가 현실 정치판에서도 강력한 상승세를 타고 있다.

이인제측 “정동영이 노무현보다 훨씬 더 위협적”


지난해 12월5일 KBS가 발표한 ‘민주당 대선 주자 선호도’ 조사에서 정동영 고문은 5.2% 지지율을 얻었다. 그런데 한 달도 안되어 그에 대한 지지율은 10.9%로 비약했다. 정고문 처지에서는 처음으로 단순 지지율이 10%를 넘어선 기록이다. 이런 지지율 상승을 발판 삼아 정고문은 이인제·노무현 고문에 이어 여당 내 3강 구도에 안착했다. 2위인 노고문과의 차이는 불과 2∼4.9%여서 언제 2, 3위가 뒤바뀔지 모를 판이다. 1위를 달리고 있는 이인제 고문의 한 참모는 “국민 경선제 바람이 불 경우 노고문보다 정고문이 훨씬 더 위협적인 존재다”라고 경계심을 드러냈다.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와의 1 대 1 가상 대결에서도 정고문의 약진은 도드라졌다. 그는 전국적으로 25∼30% 지지율을 얻어 이총재에게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드러냈다.


예선보다 본선, 즉 그의 출마 여부 자체가 2002년 대선의 핵심 변수로 작용할 정몽준 의원 역시 새해 들어 몸값이 치솟고 있다.



지난 1월4일 정의원이 히딩크 감독을 비롯한 축구인들과 월드컵 16강을 기원하기 위해 가진 북한산 등반에는 행사 참가자보다 취재진이 더 많이 몰렸다.

그는 KBS와 MBC의 간판 연예·오락 프로그램인 <시사터치 코미디 파일>과 <느낌표>에도 출연했다. <시사터치 코미디 파일>에서는 부인과 출연했고 <느낌표>에서는 정의원이 낙도 어린이를 찾아가 월드컵 입장권을 선물하고 길거리 특강을 하는 장면이 방송되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정의원이 월드컵 열기를 지나치게 개인의 정치 자산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비난도 나온다. 그러나 언론계에서는 2002년 최고 스타인 ‘정몽준 모시기’ 경쟁이 오히려 당연하다는 반응이다. 이런 인기에 힘입어 그는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에게 가장 위협적인 차기 주자로 떠올랐다.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폴앤폴이 최근 실시한 이회창 대 여타 주자들과의 1 대 1 가상 대결에서 정의원은 40.1% 대 35.3%로 이총재에 불과 4.8% 뒤졌다.


그렇다면 이렇듯 신년 정가에 ‘JJ 신드롬’이 불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선 정치판이 뭔가 확 바뀌기를 바라는 국민들의 변화 욕구가 그 어느 때보다 높다는 점이다.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솔직히 유권자들은 현재 여야의 유력 주자로 거론되는 이회창·이인제 후보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무응답층이 많은 것이나, 정계 개편 또는 제3 후보 출현을 바라는 응답자가 이상하리만치 많은 게 그 증거다”라면서, 이런 ‘정 줄 데 없는’ 표심이 결국 ‘JJ 바람’의 근원이 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둘째는 이런 국민의 변화 욕구를 담아낼 만한 대안으로 두 정씨가 성장했다는 점이다.

정동영 고문은 2001년 내내 쇄신의 선봉에 섰다. 그로 인해 당내 구주류측의 견제도 많이 받았지만, 국민들에게는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대통령에게 전달한 유일한 정치인’이라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한 정치학자는 “정고문 지지율은 갑자기 오른 게 아니다. 1년 동안 그는 국민들에게 가장 개혁적인 정치인이라는 인상을 심어 주었고, 그 성과가 이제서야 수치로 나타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른 주자군과 비교해 ‘정동영은 뭔가 다를 것이다’라는 유권자의 기대 심리를 자극하는 요소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 방송 기자와 뉴스 앵커를 하면서 보여준 신뢰감. 지금도 30~40대 유권자 가운데는 무너진 삼풍백화점 앞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현장 소식을 전하던 앵커 정동영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국민 사이에는 ‘정동영이 얘기하면 다 진실 같다’는 분위기가 있다.


또 하나는 기성 정치권에 오래 몸 담았던 사람들과 달리 정치적 빚이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눈치 저 눈치 보지 않고 확실하게 정치 혁명을 이룰 수 있지 않겠느냐고 기대하는 사람이 많다.

민주당이 새로 도입한 국민경선제는 비상하려는 정고문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다. 아무리 그의 잠재력이 막강해도 기존 전당대회 방식이라면 판세를 변화시킬 여지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정고문의 한 참모는 국민경선제가 이미지·연설·텔레비전 토론에 강한 정고문이 판을 뒤집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말했다.

정고문이 기존 정치권과의 투쟁 과정에서 도약했다면, 정몽준 의원은 ‘축구 정치’라는 외곽 때리기를 통해 급성장했다. 사실 월드컵 유치는 정몽준 개인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3년 대한축구협회장에 추대된 그가 2002년 월드컵을 유치하겠다고 나섰을 때 주변의 반응은 냉담했다. 정부조차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지만 그는 유치 경쟁에서 한 발짝 앞선 일본을 따라잡기 위해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 선거에 도전했고, 다양한 인맥과 국제축구연맹 내부의 권력 갈등을 활용하는 전략으로 결국 월드컵 공동 개최권을 따냈다.


정몽준의 ‘2002년 MJ 플랜’ 이미 가동


월드컵 개최는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한껏 높여줄 것이다. 월드컵이 한국 경제에 미칠 파급 효과는 13조원이 넘으리라는 관측이다. 만약 이런 기대가 모두 현실로 드러날 경우 그 과실은 고스란히 정의원 몫이 될 전망이다.
정의원은 아직 대권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지금은 월드컵에 전념할 때라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2002년 MJ 플랜’은 이미 시작된 분위기다. 정의원은 지난해 12월18일 대규모 후원회를 열었다. 본인은 손사래를 치지만 대선 출마를 위한 세몰이 성격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대권에 대한 그의 발언 수위도 점점 높아가고 있다. 그동안 ‘나는 월드컵당’이라고 농담처럼 말해온 그는 최근 들어 “한국에도 환경 정당이 필요하다” “무소속으로 대권 도전 하지 말란 법이 있느냐”라는 둥 의미 심장한 말들을 쏟아내고 있다. 정가에서는 현대 계열로 출발한 <문화일보>가 최근 베테랑 정치부 기자를 갑자기 축구 담당으로 발령한 것도 MJ 플랜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런 ‘JJ 바람’이 거품이며, 찻잔 속의 태풍으로 그치리라는 전망도 만만치 않다. 각각 ‘호남 출신’과 ‘재벌의 아들’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대 함성득 교수는 호남 출신이 여권 주자가 될 경우 다음 대선에서는 영남인의 결집력이 훨씬 강해지리라고 주장한다. 또 재벌 출신이 대통령까지 되려고 한다면 다른 기업은 물론 국민들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그러나 이런 태생적 한계는 오히려 극복하기 쉽다는 반론도 있다. 실제로 정동영 고문은 호남색이 엷은 데다 영남 지역에서 지지율이 높은 편이다. 지난해 12월21~23일 <부산일보>가 실시한 부산·울산·경남 지역 여론조사에서 정고문은 이인제 고문보다 이회창 총재에게 더 경쟁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몽준 의원도 일찌감치 정치에 입문한 데다 체육인으로 많이 활동해 재벌 출신이라는 이미지를 많이 덜었다. 오히려 기업을 경영한 경험이 나라 경영에 보탬이 되지 않겠느냐는 긍정적인 시각도 있다.


전문가들은 두 사람 다 세력 기반이 취약하다는 점을 더 큰 걸림돌로 꼽는다. 한 선거 전문가는 “아무리 여론을 업고 있다 해도 대권 깃발을 꽂으려면 정치권 내에 최소한의 확고한 지지 기반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는 아직 ‘내 사람이다’ 할 정치인이 없다”라고 지적했다. 태생적 한계는 ‘바람’으로 극복할 수 있지만, 동조 세력 없이는 미풍을 돌풍으로 바꾸기 힘들다는 의미다.


정동영 고문이 최근 ‘바른정치모임’의 베트남 역사기행에 동참한 것은 바로 이런 우려를 염두에 둔 것이다. 쇄신파 일각에서는 전당대회 시기를 둘러싸고 이인제 대 반이인제 진영의 신경전이 팽팽할 때 웬 외유냐며 정고문에게 눈총을 보냈지만, 정고문 처지에서는 신기남·정동채·천정배 같은 재선 의원들과 자신의 거취 문제를 상의하고 지지를 구하는 것이 더 절실했던 셈이다.

‘세력화’는 늘 혼자 움직여 온 정몽준 의원에게도 최대 고민거리다. 그가 최근 ‘무소속 대권 후보’를 들먹이는 데는 그런 고민이 깔려 있다. 하지만 단기필마 정몽준은 그리 큰 변수가 되지 않으리라는 관측이다. 이 때문에 한나라당에서는 ‘대권 주자 정몽준’보다 ‘킹메이커 정몽준’에 더 신경을 쓰는 눈치다. 정의원이 월드컵 여세를 몰아 어느 한쪽을 지원할 경우 그 파괴력이 만만치 않으리라는 계산에서다.


이처럼 JJ 신드롬은 폭발성과 거품을 동시에 안고 있다. JJ 바람이 과연 병뚜껑을 날리고 솟구치는 샴페인이 될지, 거품 빠진 쓴 맥주가 될지는 젊은 정치를 부르짖는 두 사람의 주장에 유권자가 얼마나 호응하느냐에 달려 있다. JJ의 정치 실험이 성공하느냐 마느냐가 한국 정치의 나이를 가르는 시금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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