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후보 고르는 재미 ‘쏠쏠’
  • 이숙이 기자 (sookyi@e-sisa.co.kr)
  • 승인 2002.01.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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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국민경선’ 가상 참여기/입당·추첨으로 자격 얻 어 ‘정치 실험’ 동참
지난 1월7일 확정된 민주당 대선 후보 선출방안의 핵심은 국민경선제다. 한국 정치사상 처음 도입되는 국민경선제는 신선하지만, 다소 복잡하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가상 인물(이한국)의 국민경선 참여기를 싣는다.



“나도 한 표 던져 봐?” 제주도에 사는 회사원 이한국씨는 신문을 보고 솔깃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선출에 일반 국민도 동참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대통령 후보는 자기들끼리 뚝딱뚝딱 뽑는 줄 알았는데, 한국에서도 대통령 후보를 국민 손으로 직접 뽑을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경선 일정을 보니 제주도는 3월18일이 투표 날이었다. 월요일이어서 좀 걸렸지만, 회사에 양해를 구하거나 월차 휴가를 쓰기로 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에게 현장 학습을 시켜줄 좋은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다.


민주당 제주시지부에 전화를 걸어 등록만 하면 누구나 투표를 할 수 있는지 물었다. 그런데 등록을 한다고 다 투표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추첨을 해서 3백80명만 뽑는다는 것이다(오른쪽 표 참조). 민주당 관계자는 “특정 후보 지지자들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추첨하기로 했다”라고 설명했다.


민주당 “하루만 당원 노릇 해달라”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경선 참가 신청서를 보내달라고 했다. 그런데 경선 참가 신청서와 함께 입당 원서가 날아왔다. 경선에 참여하려면 일단 입당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생 정치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 웬 입당이냐 싶어 주춤했다. 민주당이 이 기회에 당원을 늘리려는 꼼수 아닌가 싶어 화도 났다. 제주도 선거관리위원회에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웬걸. 선관위측은 오히려 입당 원서를 써야 적법하다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민주당에서는 “현행 법이 그러니 하루만 당원 노릇을 해달라”고 사정했다. 아내와 상의한 끝에 새로운 정치 실험에 동참한다는 취지에서 일일 당원이 되기로 했다. 하지만 같은 회사 동료는 찜찜하다며 끝내 참여를 포기했다. 공무원과 언론인 친구는 정당 활동을 할 수 없다는 법 규정에 따라 아예 자격도 얻지 못했다. 이씨는 며칠 후 선거인단에 뽑혔다는 연락을 받았다.


3월8일과 9일 후보 등록이 끝나고 본격적인 선거운동이 시작되었다. 민주당 대선 주자들은 첫 경선이 열리는 제주도의 선거 결과가 중요하다며 뻔질나게 이곳을 찾았다.


민주당 경선은 인구 비례에 따라 제주·울산·광주·충북… 순서로 진행된다. 그런데 이를 두고 각 후보 진영에서는 서로 유리하니 불리하니 말들이 많았다. 개혁파 진영에서는 서쪽에서 먼저 경선이 치러지니까 호남과 충청 지역 지지도가 높은 이인제 후보에게 유리하다며 투덜대고, 반대로 이인제 후보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은 호남·충청 선거 결과가 오히려 영남 선거인단의 응집력을 높일 수 있다며 걱정했다. 누구 말이 맞든 승패는 선거인단이 가장 많은 수도권에서 갈릴 것이 뻔했다.


투표일이 다가오면서 이씨는 누구를 찍을지 고민했다. 이번 선거에서는 ‘선호 투표제’라는 새로운 집계 방식이 도입되어 1등부터 꼴등까지를 다 찍어야 한다. 선호 투표제는 1차 투표에서 1등이 과반수를 얻지 못했을 때를 대비한 방법이다. 과거에는 결선 투표를 다시 했지만, 국민 경선은 다시 치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ㄱ·ㄴ·ㄷ·ㄹ·ㅁ 다섯 후보가 출마했을 때 투표자는 1번-ㄱ, 2번-ㄴ, 3번-ㄷ, 4번-ㄹ, 5번-ㅁ 하는 식으로 모두 순위를 매겨야 한다. 그래서 1순위 지지표만을 집계한 1차 개표 순위가 ㄱ-ㄴ-ㄷ-ㄹ-ㅁ 순으로 나오고 ㄱ후보가 과반수를 득표하면 개표는 끝난다. 하지만 과반이 안되면 최저 득표자인 ㅁ후보 표를 다른 후보에게 분배해 합산한다. 즉 ㅁ-ㄱ-ㄴ-ㄷ-ㄹ 순서로 기표된 투표지는 ㄱ후보에게 합산하고, ㅁ-ㄹ-ㄴ-ㄷ-ㄱ으로 적은 투표지는 ㄹ후보에게 합산하는 식이다.

그래도 과반수 득표자가 없으면 이미 탈락한 ㅁ후보를 제외하고 최저 득표자인 ㄹ후보 표를 같은 방식으로 후보에게 분배한다. 미국 하버드 대학 웨어 교수가 제안한 이 제도는 다소 복잡하지만 실제 투표 과정에서는 전과정이 전산 처리되어 순식간에 결과가 나온다.


과반 득표자 없으면 2등 많이 한 사람 유리





일찌감치 1순위자를 정한 이씨에게는 나머지 순위가 고민이다. 언론에서는 ‘호·불호가 뚜렷한 후보가 불리하다’ ‘선두 그룹과 꼴찌 그룹 간에 연대가 추진되고 있다’ 같은 분석 기사가 쏟아지는데, 이씨로서는 도통 답이 안 나왔다. 분명한 것은 1차 개표에서 과반수가 없을 경우 2등을 많이 한 사람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는 것. 민주당 이낙연 대변인도 “올림픽에서는 은메달이 아무리 많아도 금메달 수 하나만 적으면 순서가 처지지만, 민주당 경선에서는 은메달 많은 후보가 최고다”라고 말했다.


투표 날 아침, 이씨는 일찌감치 딸 아이 손을 잡고 투표장으로 갔다. 민주당 경선의 첫출발을 장식할 제주 투표장은 오색 풍선과 각 후보 진영의 구호로 가득했다. 멀찍이 ㄱ후보의 산악회 회원들이 보였다. 장안에는 ㄱ후보가 자기 지지자를 최대한 많이 선거인단에 넣으려고 산악회원을 몽땅 당원으로 만들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ㄴ후보는 이미 선거인단에 뽑힌 사람에게 선물을 돌리려다 발각되었다는 얘기도 나돌았다.


투표권을 받아 기표소에 들어간 이씨는 후보의 얼굴이 가득한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후보의 얼굴을 꾹 눌렀다. 잠시 후 나머지 후보의 얼굴만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2순위 후보의 얼굴을 눌렀다. 그렇게 꼴찌 후보까지 누르고 나서야 투표는 끝이 났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4월20일. 이씨는 민주당 최종 경선을 텔레비전으로 지켜 보며 박수를 쳤다. 화면에는 그가 2등으로 찍은 후보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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