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표심’은 안개에 잠겨…
  • 제주·이숙이 (sookyi@sisapress.com)
  • 승인 2002.03.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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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판세 현장 취재/‘한화갑 득표력’ 따라 대결 구도 달라질 듯
"곧비행기가 착륙하겠습니다.” 기내 방송과 함께 푸르디 푸른 제주 앞바다가 시야에 확 들어왔다. 요즘 제주 공항에는 관광객보다 정치인이 더 많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민주당 국민경선이 가장 먼저 열리는 제주도에 7룡과 그의 추종자들이 뻔질나게 드나드는 탓이다. 덕분에 제주행 비행기를 타는 기자들도 부쩍 늘었다.


시내로 들어가는 택시 안에서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운전기사에게 넌지시 경선 얘기를 꺼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관심 없수다.” 대체로 지역 여론에 밝은 택시 기사에게서 귀동냥이라도 하려던 기자는 머쓱해지고 말았다.





기자가 특별히 무뚝뚝한 운전기사를 만난 것은 아니었다. 제주에 머무르는 동안 10여 차례 택시를 타면서 매번 비슷한 경험을 했다. 언론이 떠들어대 제주도에서 가장 먼저 민주당 경선이 치러진다는 사실은 알지만, 국민 선거인단으로 참여하거나, 누구를 꼭 찍어야겠다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무관심은 한라산 남쪽으로 갈수록 더 심했다. 표선면에서 밭농사를 짓는 조 아무개씨(여·41세)는 “농사 짓는 사람들은 일찍 일 나가고 일찍 자기 때문에 뉴스 볼 새가 거의 없다. 사람들의 관심은 오로지 먹고 사는 문제다”라고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러나 제주 정치의 1번지로 불리는 제주시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인구 밀도가 높고 관공서와 언론사가 밀집한 제주시는 정치 민감도가 높아서인지 경선 열기가 상당했다. 신제주 시내에 있는 웬만한 호텔은 양복 입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선거운동을 위해 내려온 외지인과 그들의 공략 대상인 현지인이 뒤섞여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근처 약국에서 국민선거인단 참가신청서를 냈다는 30대 약사 부부를 만났다. 대통령 후보를 내 손으로 뽑는다는 것이 기대된다는 이 부부는 남편은 노무현 아내는 정동영 지지로 나뉘어 서로 상대방을 설득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런 경선 열기의 중심에는 이도 2동에 자리 잡은 민주당 제주도지부가 있다.



국민경선 홍보에 열중하던 민주당 제주도지부는 최근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지난 2월16일 원외인 정재권 위원장(제주시)이 고진부(서귀포·남제주)·장정언(북제주) 두 현역 의원을 제치고 도지부장으로 선출되는 과정에서 ‘대선주자 개입설’이 제기된 것이다. 제주MBC의 한 기자는 “한화갑 고문과 가까운 고진부 의원이 재임할 뜻을 비치자 이를 견제하려는 동교동 구파와 이인제 고문측이 변칙으로 정위원장을 밀어붙였다는 게 논란의 핵심이다”라고 귀띔했다.



도지부장 선거가 있던 시각에 정위원장이 이인제 고문의 제주 경선 발대식에 참가하고 있었다는 것도 오해를 부추겼다. 이를 의식한 정위원장은 2월21일 임시 대의원 대회에서 “줄 서지 않겠다”라고 여러 번 강조했다. 하지만 대회에 참석한 김근태 고문은 ‘가망 없는 대세론’을 내세워 줄서기를 압박하는 것은 국민경선의 취지를 훼손하는 것이라며 경계심을 나타냈다.



사실 제주도 선거인단은 총 7백93명(일반 국민 3백78명)이어서 대세를 가르기에는 극소수다. 그런데도 각 주자 진영이 제주 경선에 치열하게 매달리는 이유는 바로 상징성 때문이다. 첫 선거여서 그 결과가 다른 지역의 투표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은 데다, 역대 선거에서 제주도의 득표율이 대부분 전국 평균과 비슷하게 나왔다는 이유에서다.


이 때문에 7룡은 국민 경선이 확정된 이래 최소 서너 번은 이 곳을 방문해 애정을 쏟고 있다. “이름을 얘기할 때 마지막 ‘제’는 늘 제주 제(濟)라고 소개한다.”(이인제 고문) “대통령 비서실장 시절 국제자유도시 특별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제주도지사와 대통령과의 면담을 주선했다.”(김중권 고문) 등 제주와의 인연을 강조하려는 수사도 가지가지다. 정동영 고문은 아예 제주도민이 되다시피 했다. 2월 한 달 가운데 설 연휴를 포함해 보름 이상을 제주에서 보냈다. 한 측근은 “바람 선거에 기댈 수밖에 없는 정고문 처지에서는 첫 선거에서의 승리가 그 어떤 후보보다 절실하다”라고 제주에 집착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2월22일 현재 제주 지역 판세는 한마디로 오리무중이다. ‘한화갑 변수’ 때문이다. 한고문은 5년이 넘게 제주도지부 후원회장을 맡으며 이 지역 당원들과 교감해 왔다. 제주도지부의 한 간부는 “2만 당원 가운데 야당 시절부터 제주도를 물심 양면으로 도와준 한고문 고정 팬이 형성되어 있다. 특히 고진부 의원 지역구에서는 한화갑 표가 많이 나올 것이다”라고 관측했다. 그렇게 될 경우 선두 다툼은 한화갑 대 이인제의 조직 대결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한때 ‘제주도 선거는 포기했다더라’는 얘기까지 나돌았던 이인제 고문은 2월16일 제주 발대식을 기점으로 상승세를 타고 있다. 이인제 지지를 표명한 현성익 제주도의회 부위원장은 “도의원 절반 이상이 이고문 진영에 합류하면서 세 확산에 가속도가 붙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고문측은 제주도에서도 ‘대세론’을 최대 무기로 삼고 있다.



국민선거인단 확정돼야 ‘진짜 싸움’ 시작





하지만 한화갑 고문의 실제 득표력이 그리 높지 않으리라는 관측도 만만치 않다. ‘후원회장은 후원회장이고 대선 후보는 대선 후보’라는 이중 잣대가 작용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선두 다툼은 이인제 대 노무현, 또는 이인제 대 정동영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한화갑 지지표는 한고문을 찍지 않을 경우 개혁 세력에게 돌아갈 확률이 높다”라고 말했다. 최근 한 주간지의 제주 지역 여론조사에서 이인제·정동영·노무현·한화갑 순으로 지지도가 나온 것도 바로 이런 역학 관계를 반영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정고문이 도민들과 자주 접촉하면서 교감을 나눈 것이 서서히 효과를 발휘해 2위에 오른 모양이라고 풀이했다.



그러나 한화갑 고문의 득표력보다 더 큰 변수는 선거인단이 초미니라는 점이다. 누가 선거인단에 뽑히느냐에 따라 전체 판세나 특정 주자의 동원력이 무의미해질 가능성이 큰 것이다. 따라서 진짜 싸움은 국민선거인단이 확정되는 2월26일부터 경선이 치러지는 3월9일 사이에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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