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뢰 그물에 걸린 동교동 ‘영원한 집사’
  • 나권일 (nafree@sisapress.com)
  • 승인 2002.03.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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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 여사와도 가까워…‘사랑의 친구들’에 깊이 관여
김대중 정부 출범 4주년을 기념하는 국제학술대회가 열린 지난 2월22일. 동교동 ‘아태평화재단’ 사무실은 한산했다. 국내외 학자들과 연구진 등 학계 인사 100명 남짓만 참석했을 뿐 그 흔한 방송사 카메라 한 대 보이지 않았다.





행사를 준비한 아태재단 관계자들은 전날부터 맥이 풀려 있었다. 김홍업 부이사장과 함께 재단을 운영해온 이수동 상임이사가 G&G 그룹 회장 이용호씨가 준 돈 5천만원을 받아 썼다는 사실이 드러나 불명예 사직했기 때문이다.


아태재단은 재단 주인을 대리했던 이수동씨가 이용호 게이트에 휘말려 구속될 처지에 놓이자 망연자실한 표정이다. 한 직원은 “충격이다. 대통령과 동고동락해온 점잖은 노신사가 이용호씨의 돈을 받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라고 침통한 분위기를 전했다. 김홍업 아태재단 부이사장은 이 날 외국의 유명 학자들을 초청해 놓고도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았다.


‘동교동의 영원한 집사’ ‘DJ의 충실한 심부름꾼’으로 불린 이수동 전 아태재단 상임이사(70)가 금품수수 혐의로 사법 처리를 앞두고 있다. 이수동 전 이사는 2000년 3월 이용호씨로부터 직접 5천만원을 수표로 받은 뒤 지인들에게 각각 3천만원과 2천만원씩 빌려주는 등 개인 용도에 사용했다.
특검팀은 5천만원이라는 큰 돈이 이수동씨가 이용호씨 계열사인 ‘인터피온’ 등에 대한 금융감독원의 주가 조작 조사를 무마해준 대가로 받은 성공사례금이라고 보고 있다. 이수동씨는 1999년 하반기에 아태재단 사무부총장을 지낸 황주홍씨(50·건국대 교수)를 통해 황씨의 광주일고 선배인 전 금감원 부원장보 김영재씨(55)에게 이용호씨에 대한 선처를 부탁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용호씨를 이수동씨에게 소개한 로비스트이자 아태재단 후원회원인 도승희씨(60)가 ‘인터피온’의 사외이사를 지냈고, 이용호씨가 김영재씨의 친동생을 한때 인터피온 전무로 영입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도승희씨는 특검에서 이수동씨에게 준 돈이 인터피온 주가 조작 조사에 대한 청탁 대가라고 시인했다.


이수동씨는 5천만원이 개인적으로 받은 돈이고, 너무 큰 돈이어서 1년 남짓 보관하고 있다가 급히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빌려준 뒤 다시 받을 계획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수동씨가 이용호씨의 부탁을 들어준 뒤 돈을 받아 사용했다는 점에서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알선수재 혐의는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이수동씨를 사법 처리할 수 있게 되어 특검팀은 또 한번 개가를 올렸지만 김대중 대통령 부부는 이형택씨 구속에 이어 큰 타격을 입었다. 이수동씨는 김대통령이 퇴임 후 복귀할 아태재단을 관리해왔을 뿐만 아니라 이희호 여사가 주도해 설립한 ‘사랑의 친구들’의 운영위원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1998년 8월 발족한 사단법인 ‘사랑의 친구들’(총재 최종옥)은 결식 어린이를 위한 모금과 봉사 활동을 하는 단체로 이희호 여사가 명예총재를 맡고 있다. 이수동씨는 매주 한두 차례 영부인을 만날 정도로 사랑의 친구들 사업에 깊이 관여했고, 운영위원회에서도 핵심 역할을 맡아왔다.


김대통령 부부, 이형택씨 이어 또한번 큰 충격





이수동씨는 특히 ‘사랑의 친구들’ 후원회장이자 운영위원인 (주)부영 이중근 회장과 친분이 두터운 데다 부영건설이 지은 59평 아파트를 당시 시가보다 4천만원 정도 싸게 매입해 유착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랑의 친구들’에서 일하는 한 직원은 “운영위원은 사무처 사업 자문에 응할 뿐이다. 이수동씨가 우리 단체에 후원금이나 물품을 기증한 사실은 없다”라며 불똥이 튈까 봐 염려했다.


이수동씨가 구속된 것은 민주당 실세인 동교동계 의원들에게도 부담이다. 경기도 일산 화정동에 있는 이수동씨 자택은 때때로 동교동계 인사들의 비밀 모임 장소로 이용되었다. 그런 이수동씨 자택에 2월23일 새벽 특검팀이 들이닥쳐 이씨의 수첩과 중요 서류들을 압수해갔다. 만약 동교동계 실세들이 무엇엔가 관여한 흔적이 드러난다면 또 다른 파문을 피할 수 없다.


이수동씨는 1997년 강삼재 의원이 ‘DJ 비자금’를 폭로했을 때 자신의 계좌에서 16억원이 입출금된 사실이 드러나 DJ의 정치자금 관리인이라는 의혹을 받았다. 한나라당은 이수동씨의 금품 수수 사실이 드러난 지난 2월21일 논평을 내고 현정권의 모든 문은 아태재단으로 통한다며 김홍업 부이사장과 이수동씨의 정치자금 관리 의혹에 대한 특검의 수사를 촉구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용호씨가 돈을 뿌린 시점이다. 이용호씨는 총선 직전인 2000년 3월에 민주당 후원회장인 김봉호 전 의원에게 5천만원을 준 것을 비롯해 박병윤 민주당 의원 등에게 2천만원을 후원금으로 전달하는 등 전방위 로비를 벌였다.


이수동씨가 돈을 받은 시점도 2000년 3월이다. 이수동씨는 돈을 받은 뒤에도 이용호씨를 만났고, 당시 이용호씨 계열사 계좌에서는 수천만원씩 수시로 빠져나간 흔적들이 드러났다. 이용호씨가 이수동씨를 활용해 정·관계에 로비 창구를 개설하지 않았느냐는 의혹을 살 만하다.


DJ 비자금과 관계가 깊은 것으로 알려진 이형택·이수동 씨가 동시에 이용호 게이트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남에 따라 특검팀의 수사는 정치 비자금을 뒤지는 쪽으로 급선회할 수도 있다.
이수동씨는 지난해 말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하늘에 두고 맹세하지만 이용호씨는 만난 적이 없다”라고 부인했다. 그러나 이씨는 1998년부터 이용호씨를 만나온 것으로 드러났다. 특검이 ‘30년 동교동 집사’의 입을 열게 한다면 민주당은 국민의 정부 4주년을 자축할 여유도 없이 파란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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