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씀씀이 대통령’ 권노갑
  • 안철흥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2.03.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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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지출 수천만원 이상”…정치자금 받을 때도 “상당히 세련”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의 ‘양심 고백’으로 시끄럽던, 또한 권노갑 전 고문의 기자 간담회 내용으로 설왕설래하던 지난주 어느 날, 민주당 기자실 구석에는 ‘본질과는 상관없는’ 대화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화제는 그 날 신문에 실린, 진홍색 점퍼와 청색 모자 차림으로 멋을 낸 권씨의 옷차림이었다. 정치인들에게 캐주얼 차림이 낯설어서만이 아니었다. 권씨가 입은 옷은 고급 골프 의류로 유명한 ○○○패션 제품이었기 때문.





‘롯데에서 벌고 신라에서 쓴다.’ 이 또한 본질과 별 상관없는 권씨 이야기다. 롯데는, ‘부인이 번 돈으로 썼다’는 그의 해명 때문에 유명해진 돈가스 식당이 자리한 백화점 이름이다. 또한 신라는 그가 지난해까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애용했던 호텔 이름이다. 이런 말장난이 퍼지면서 정가에는 이른바 ‘권노갑 브랜드’라는 신종 유행어까지 등장할 조짐이다. 그만큼 그의 돈 씀씀이는 초점이 되어 있다.


그의 씀씀이는 민주당 안에서도 손이 크기로 유명하다. 이번에 김근태 고문이 액수까지 밝혀서 문제가 되었지만, 사실 지난 8·30 최고위원 선거 때 권씨가 일부 후보를 지원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에 속했다. 또한 지난 4·13 총선 때도 권씨는 많은 출마자들을 물심 양면으로 지원했다. “당시 불안한 지역에는 당의 공식 지원 외에 권씨의 지원이 따로 내려갔다. 몇몇 후보는 직접 기업체와 연결해 주는 경우도 있었다고 알고 있다.” 당시 당의 선거 참모로 일했던 관계자의 말이다. 주로 386 후보 등 소장파 출마자들의 상당수가 이런 식으로 권씨의 ‘관리’를 받았다.


권씨는 또한 초·재선 의원들의 연구모임 사무실을 구해주기도 했다. 당시 이 사무실에 관여했던 여권 관계자는 총선 이후 쇄신 파동이 날 때까지 한달에 1천만~2천만 원씩을 권고문으로부터 지원받았다고 밝혔다. 의원들의 후원회도 권고문이 반드시 챙기는 행사. 그가 내미는 후원금은 최소 50만원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특별히 챙기는 경우 따로 불러 수백만원을 건네기도 한다는 전언이다. 권씨가 이후 당 쇄신 과정에서 더욱 큰 배신감을 느낀 데에는 이런 인연이 한몫을 했다(42쪽 상자 기사 참조).


당직자 눈에 띄면 지갑에서 돈 꺼내주기도


권씨의 ‘애정’은 의원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과거 권씨가 당에 상근할 때는 당사 8층 주위를 기웃거리는 당직자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8층은 권씨의 사무실이 있던 층으로, 권씨와 마주치면 ‘좋은 일’이 종종 일어났기 때문. “마주치면 구석으로 데려가 ‘대통령님을 위해 열심히 하소’라고 말하며 지갑에서 돈을 꺼내주고는 했다.” 한 당직자의 말이다.




골프채나 상품권을 받은 사람도 꽤 있다. 권씨의 측근인 동교동계 한 전직 의원은 지난해 고급 골프채를 새로 장만했다. ‘권고문의 차 트렁크에 있기에 꺼내왔다’는 것이 입버릇처럼 달고 다닌 그의 자랑이다. 권씨로부터 선물로 들어온 양복 상품권을 건네받은 한 주변 인사는, 양복점 주인의 권유로 여벌 바지를 하나 더 맞추었다가 바지 값으로 80만원을 지불한 웃지 못할 경험을 전하기도 했다. 그토록 값비싼 양복인 줄 미처 몰랐던 것.


한국방정환재단 이사장, 동국대 총동창회 회장, 민주재단 이사장,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사업회 부회장. 한 언론사의 인물 검색 서비스에 올라 있는 권씨의 현재 직함이다. 돈 버는 직함은 없다. 정치권과 관련된 직함도 없다. 그는 이른바 경제적인 ‘실업자’ 상태다.


김근태 고문의 고백으로 이른바 ‘돈가스 게이트’가 불거지자, 권고문은 “최고위원 경선에 나갈 생각으로 집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번 돈 2억원을 준비했고, 주변 친지들이 도와준 데다 다른 것을 플러스해서 갖고 있던 돈이 있었다”라고 해명했다.


권씨의 부인이 운영하는 식당은 두 군데. 영등포 롯데백화점에 있는 돈가스 전문 식당인 ‘오메가’는 1988년 분양받은 것이고, 롯데백화점 강남점에 있는 비빔밥집 ‘예촌’은 최근 새로 낸 것이다. 이 돈가스는 국회 주변에 꽤 알려져 있다. 지금은 뜸하지만, 과거 국회 회기 중에는 민주당 의원들이 가끔 주문해 나누어 먹었다. 이 때 붙은 이름이 이른바 ‘권가스’이다. 권고문측은 이 두 곳 식당 매출액이 매달 수천만원에 달하며, 한 곳에서 최소 천만원 이상의 순익이 난다고 밝혔다.


권씨 정치자금의 비밀, 신군부의 ‘고문’도 못 풀어


그러나 권씨의 씀씀이로 볼 때 식당 수익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정치권 인사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권씨가 지난해까지 거의 매일 호텔 커피숍에서 사람들을 만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또한 소장파들의 공격 목표가 되었던 ‘마포 사무실’도 운영하고 있다. 아직까지 3~4명 정도의 보좌진도 거느리고 있다. 그런 것만으로도 권씨의 씀씀이는 당 중진 의원들의 수준을 훨씬 웃돈다는 것이 대체적인 관측이다. 이 정도의 씀씀이를 메우기 위해서는 수천만원 이상 들어갈 것이라는 것이 정치권 인사들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그 많은 돈을 만들어 쓰며 ‘정치 활동’을 계속할 수 있을까.


아직까지 그의 정치자금과 관련된 비밀이 노출된 적은 거의 없다. 1980년 신군부의 혹독한 고문도 그의 입을 열지 못했다. 1997년 한보 사건이 돈과 관련해 그가 옥살이를 한 유일한 경우다. 그러나 그 때도 검찰은 대가성을 입증하는 데 실패했다. 결국 그가 뒤집어쓴 죄목은 당시까지는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게만 적용되었던 포괄적 뇌물죄. 따라서 그를 구속한 것은 당시 홍인길 청와대 총무수석을 구속하면서 여야 균형을 맞추기 위한 정치적 단죄였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관리하는 정치자금, 과거 비하면 새발의 피”


권씨의 최측근으로 통하는 이훈평 의원은 “한보 사건이 정치자금을 대하는 권씨의 태도에 큰 영향을 미쳤다”라고 말했다. 기업 돈이나, 대가성이 의심되는 돈, 인사 청탁과 관련된 돈은 절대 받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는 것. 이의원은, 한 기업이 권씨에게 돈을 싸들고 왔으나 돌려보낸 일도 있다고 말하면서, 최근 떠도는 소문들은 모두 사실이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권씨의 추천으로 정부투자기관 임원이 되었던 한 인사도 사례를 한다며 봉투를 내밀었다가 권씨에게 호통만 받았다는 말을 전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권씨는 직접 받는 대신 당 후원회에 가져가라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직접 받는 경우에는 꼭 영수증을 써줬다”라면서 상당히 세련되고 믿음이 갔다고 전했다.


권씨가 관리하는 정치자금이 과거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는 반론도 있다. 과거 정권의 실세들은 보스로부터 이른바 통치자금을 받아 사용했다. 그러나 현정권은 애초부터 통치자금을 만들지 않았고, 따라서 권씨도 ‘소소한’ 액수를 자체 조달하는 정도였다. 대기업의 한 관계자는 권씨가 보통 합법적인 후원금 수준 내에서 정치자금을 받아갔는데, 이 액수는 과거에 비하면 동그라미가 하나 둘 적은 것이라고 밝혔다.


그렇지만 정치권에는 이런 해명을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들도 많다. 특히 한나라당은 권씨를 비리의 온상으로 여기는 분위기다. 한 부대변인은, 관련된 제보가 많이 들어온다면서, 권씨가 실세이고 힘이 있으므로 이권과 인사 청탁이 줄을 잇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한나라당은 궁극적으로 권씨의 자금을 캐면 DJ 비자금까지 드러날 것으로 믿고 있다. 하지만 증거가 없는 것은 한나라당도 마찬가지. 이 아무개 의원은 결정적인 증거가 없이 소문만 무성하다면서 안타까워했다. 그렇더라도 한나라당은 ‘권노갑 특검’ 요구를 정치 쟁점으로 삼아 여권 공격의 수위를 높여갈 작정이다.


권씨는 파문이 확산되자 ‘정치자금 정거장론’을 거론하며 해명에 나섰다. 측근이 밝힌 권씨의 정치자금 수수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구린 돈은 받지 않는다. 둘째, 받게 될 경우 나누어 쓴다. 셋째, 축재하지 않는다. 이른바 DJ의 정치자금 원칙으로도 알려져 있는 이것을 권씨도 철저하게 지켰다는 것이 주변 인사들의 말이다. 김옥두 의원은 “술집이나 증권가 정보지에 나도는 말로 사실무근이고 일고할 가치도 없다”라고 권씨의 축재설을 부정하면서, 만약 밝혀진다면 대신 감옥에 가겠다고 장담하기도 했다.


정치자금 정거장론을 처음 편 사람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다. 그는 1992년 관훈토론회에서 “후원금을 받긴 받는데 곧바로 다른 사람에게 줘버리기 때문에 내 몸에 돈이 남아 있을 때가 없다”라며 정거장론을 폈다. 이밖에도 이른바 정치권 실세들은 나름의 정치자금 철학이 있다. 이를테면 김상현 전 의원은 “정치자금은 생선 먹듯이 해야 된다. 가시 있는 생선을 먹으면 목에 걸리고, 썩은 생선을 먹으면 배탈이 난다”라고 강조한 바 있다. 홍인길 전 의원도 “정치에서 돈은 피와 같다. 한 곳에 멈추면 썩고 탈이 난다. 돌고 돌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들 중 김·홍 두 전직 의원은 권씨와 같은 한보 사건으로 옥살이를 했다. YS 또한 자식의 구속을 지켜 보아야 했다. 모두 지난 정권 말기에 당한 일들이다. 또다시 정권 말, 권노갑 정치자금의 비밀을 간직한 판도라의 상자는 과연 열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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