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를 소 닭 보듯 하니…
  • 이숙이 기자 (sookyi@sisapress.com)
  • 승인 2002.07.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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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어설픈 언론 관리 문제…오해·비협조로 ‘아픈 기사’ 많이 실려


노무현 후보가 거국 중립 내각을 요구하는 ‘기습 기자회견’을 하고 돌아간 7월4일 오전 민주당 기자실. 이낙연 대변인은 출입기자 수십 명에 둘러싸여 연신 진땀을 흘려야 했다. 노후보 회견 내용에 대한 부연 설명 때문이 아니었다. 이 날 아침 회견이 왜 극비리에 추진되었는지, 그리고 그렇게 보안을 유지한 내용이 어쩌다 특정 신문에만 보도되었는지를 해명하느라 그랬다. 회견 내용은 물론 노후보가 기자회견을 한다는 사실조차 ‘물을 먹은’ 대다수 기자들은 연신 화를 삭이지 못했다.


사연은 이렇다. 노후보의 기자회견은 전날 저녁 김원기 정치고문을 비롯한 핵심 7인과의 만찬 회동에서 전격 결정되었다. 노후보가 승부수로 띄운 부패 청산 프로그램이 자칫 서해교전에 밀려 유야무야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시기가 좋지 않다는 일부 의견도 있었지만 꽤 오래 전부터 회견 시기를 저울질해온 터라 더 늦춰서는 안된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청산 프로그램의 한 축을 이루는 김홍일 의원이 7월4일 중국으로 출국한다는 사실도 고려되었다.


“노무현, 기자들에게 딱 걸렸다”


노후보 비서진은 회견 자체를 극비에 부치기로 했다. 심지어 한화갑 대표와 이대변인에게도 저녁 9시에 통보하면서 ‘보안’을 부탁했다. 기자 출신인 이대변인이 회견 내용은 아니라도 회견을 한다는 사실만큼은 언론에 먼저 알리는 것이 상식이라고 건의했지만, 후보 비서실에서는 7월4일 새벽 언론에 알려달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노후보의 한 측근은 “회견이 예고될 경우 언론이 취재 경쟁에 나설 것이고, 그러다 자칫 회견의 의미가 반감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대변인이 미처 기자회견 사실을 알리기도 전에 사단이 벌어졌다. <중앙일보>가 노후보 회견 사실을 1면에 특종 보도하면서 다른 언론사에 비상이 걸린 것이다. 추적 결과 노후보의 한 핵심 참모가 외부 인사 몇 사람에게 자문하는 과정에서 정보가 샌 것으로 드러났다.


노후보측의 어설픈 언론 관리는 결국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우선 대다수 방송이 노후보의 회견을 생중계하지 않았다. MBC만 생방송을 했는데 그것도 중간에 잘렸다. 다음날 아침 신문은 사정이 더 심각했다. 대다수 신문이 노후보의 회견 내용보다 청와대와 한나라당, 민주당 내부의 반발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했기 때문이다. 노후보 비서실에서는 당초 기대했던 효과의 10분의 1도 거두지 못한 것 같다며 낙담했다.


이에 대해 한 일간지 기자는 “안 그래도 노후보에 대한 기자들의 불만이 쌓여가던 차에 딱 걸렸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요즘 민주당 기자들 사이에서는 노후보에 대한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당 일각에서는 아직 구시대적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부 기자들이 노후보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주도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노후보가 이른바 ‘촌지’를 주는 일도 없고, 기자들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기 때문에 삐쳤다는 것이다.




언론을 극복 대상으로 여겨


하지만 상황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그동안 노후보에게 우호적이던 기자들조차 불평을 늘어놓는 경우가 잦아졌기 때문이다. 한 일간지 기자는 “기자들이 노후보에게 촌지 따위를 기대하는 게 아니다. 출입기자를 하다보면 후보와 최소한의 친밀감이라도 생겨야 하는데, 노후보는 기자들을 아예 소 닭 보듯 한다”라고 꼬집었다.


아닌 게 아니라 노후보는 후보가 된 후 기자들에게 밥 한끼 산 적이 없다. 당직만 새로 맡아도 기자들에게 먼저 ‘신고’하는 여타 정치인과는 딴판이다. 유종필 공보특보는 “언론인들과 만나는 일정을 수십 번 짜서 올렸지만 한 번도 채택된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노후보가 기자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 경우도 드물다. 특히 하루에도 서너 번씩 얼굴을 마주치는 카메라 기자 가운데 노후보가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보다 못한 대변인실이 ‘○○○ 기자 수고하십니다’ 하는 식의 메모까지 만들어 전달했지만 소용없었다. 한 사진 기자는 “이름은커녕 노후보로부터 눈인사 한번 다정하게 받은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노후보의 한 핵심 측근은 그 이유를 두 가지로 꼽았다. 우선 언론에 대한 피해 의식이다. <조선일보>와의 소송 등 거대 언론과 갈등을 겪으면서 노후보가 언론을 활용 대상이 아닌 극복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노후보는 기자들과 좀 친해지라는 건의를 들으면 “언론이 나를 응징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친해지느냐”라고 반감부터 표시한다.


또 한가지는 노후보가 원래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지 못하는 성격이라는 점이다. 후보가 된 후 동료 의원들과 쉽게 융화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노후보의 측근은 ‘후보는 후보로서 열심히 일하고, 기자는 기자로서 자기 역할을 하면 되지 양측이 굳이 친하게 지낼 이유가 뭐 있느냐’는 것이 노후보의 생각이라고 귀띔했다.


문제는 이런 기자들과의 거리 두기가 곧바로 기사에 반영된다는 점이다. 특히 기자들이 노후보의 화법이나 정서를 잘 몰라 노후보에게 불리한 기사가 나가는 것은 노후보에게 심각한 타격이 아닐 수 없다.
6월26일 주한 러시아대사를 만났을 때가 대표 사례다. 이 날 노후보와 러시아대사는 월드컵 얘기를 시작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회담을 마쳤다. 하지만 다음날 신문에는 노후보가 ‘외교 관례에 어긋나는 언행을 일삼았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한국과 독일전 때 한국을 열렬히 응원했다”라고 한 러시아대사에게 노후보가 “한국을 응원한 진짜 이유가 뭐냐?”라며 농담을 던진 것을 배석한 기자가 정색을 하며 질문한 것으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외교 역량을 의심받고 있는 노후보 처지에서는 매우 ‘아픈’ 기사였다.


7·4 기자회견이 언론의 ‘비협조’로 효과가 반감된 후 노후보나 비서진 모두 언론과 관계 개선이 필요하다는 쪽에 공감한 것으로 보인다. 노후보는 최근 특보단과 회의하는 자리에서 “내가 가장 자신 없는 부분이 기자들을 상대하는 것이다. 대변인에게만 맡기지 말고 특보단도 적극 나서 달라”고 부탁했다는 후문이다. 노후보 자신도 기자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 등 달라진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 중이다.
5공 청문회를 통해 스타 정치인으로 떠오른 뒤 누구보다 언론의 덕을 많이 보며 성장한 노후보에게 언론은 ‘가깝고도 먼 당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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