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풍’ 시들한데 ‘정풍’ 미덥잖고
  • 광주·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2.1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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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민심 현장 르포/“광주는 지금 정치적 공황 상태”



"어제 향우회 모임에 나갔는데, 한나라당에 있는 친구가 오랜만에 참석해서 ‘이번에야말로 이회창 후보가 집권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더라. 그런데 모두 듣고만 있을 뿐,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모습이었다.” 민주당 광주시지부 김선문 사무처장의 말이다. ‘이제 한도 좀 풀었고, 김대중 정부에서 덕본 것도 없고, 더구나 대선 전망도 어둡고 해서’ 선거 열풍이 쫙 가라앉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라앉아 있기로는 민심보다 ‘민주당심’이 더한 것 같았다. 광주시 남구 주월동에 있는 민주당 광주시지부에는 노무현 후보를 알리는 포스터나 유인물이 보이지 않았다. 지역 선거대책본부도 꾸려지기 전이다. 예전 이맘 때 같으면 밤중에도 사무실 불이 꺼지지 않았었다고 말한 당직자에게 대선이 며칠 남았느냐고 물어보니, 멈칫거리며 선뜻 답을 내놓지 못했다. ‘D-56일’에 방문한 광주지역 민주당사의 일반적인 모습이 이랬다.


시지부장인 강운태 의원이 이른바 ‘반노’ 쪽에 서 있다는 것도 이런 분위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10월13일 민주당 국민참여운동본부 광주·전남지역 발대식이 있었다. 노무현 후보를 비롯해 정동영·추미애·이낙연 의원 등 중앙당 대표단이 참석했다. 그러나 정작 호스트 노릇을 해야 할 강운태 의원은 보이지 않았다. 광주·전남 지역 의원 가운데 참석자는 정동채·전갑길·김태홍 의원(광주)과 천용택 전남도지부장 정도였다.


선거 분위기를 처음 느낀 곳은 한 시민단체 사무실이었다. ‘3·16 포럼’이라는, 노무현 후보가 승리한 민주당 광주 경선 날을 기념해 만든 이 단체의 사무실은 노후보의 얼굴이 새겨진 노란색 포스터로 곳곳이 도배되어 있었다. 이곳은 현재 국민참여운동본부 광주·전남지역 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이곳에서 만난 서대석씨는 “현재 광주에서는 ‘노사모’와 개혁국민정당, 재야 시민단체 인사들이 노무현 선거운동의 일선에 있고, 민주당은 뒤로 처져 있다”라고 했다. 서씨는 지난 2월까지 민주당 광주시지부 사무처장으로 있다가 지금은 개혁국민정당에 참여하고 있다.


확실한 것은 ‘반이회창 정서뿐’


민주당의 본거지 광주의 첫인상은 이렇게 역설적이었다. 지난 민주당 경선 때 노무현 후보를 1등으로 밀어줄 때만 해도 광주 사람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그러나 두 번의 지방 선거 패배와 노후보의 몇 차례 실수가 덧붙여지면서 이곳에서 ‘노풍’은 거의 사라졌다. 정몽준 의원이 떠오른 것도 이 무렵부터다. 그렇다고 아직까지 정의원이 확실한 대안으로 자리잡은 것도 아니다. 노무현과 정몽준 사이에서 이 지역 여론은 여러 달째 관망 중이다. 둘 중 누구로도 대선 승리가 어려울 것 같다는 것이 망설이는 이유다. <전남일보> 정치부 이건상 기자는 이런 모습을 지적하며 “광주가 정치적 공황 상태를 맞이하고 있다”라고 표현했다.





전남대학교 언론홍보연구소 민형배 특별연구원은 ‘이 지역에서 확실한 것은 반이회창 정서뿐’이라면서 현재 광주에는 두 가지 흐름이 혼재한다고 지적했다. 첫째는, 야당 할 각오로 원칙과 명분을 지키자는 쪽이다. 주로 시민단체나 진보 성향 지식인들이 이런 주장을 편다. 민씨 또한 여기 속하는 인물. “역시 제일 좋은 구도는 DJ 적자가 영남에서 나와 대통령이 되는 것이다.

그래야만 지역주의로 흐르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민형배씨의 주장이다. 그는 또한 노후보 지지율이 회복될 기미만 보인다면 이 지역에서 다시 한번 노풍이 불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국재정관리학회장을 맡고 있는 조 담 교수(전남대·경영학)는 “정치 발전을 위해서도 이회창 대 노무현 대결이 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두 번째 흐름은, 정권 재창출이 최대 선이고, 따라서 후보 단일화를 해서라도 한쪽으로 표를 몰아주어야 한다는 쪽이다. 주로 민주당과 정몽준 지지자들이 이런 주장을 편다. 바닥 정서도 이쪽에 기울어 있는 편이다.


“야당 할 각오” “정권 재창출” 여론 엇갈려


이 지역의 대표적인 재야인사였던 정용화 5·18기념재단 상임이사가 얼마 전 정몽준 지지를 선언했을 때 이 두 흐름은 처음으로 충돌했다. 재야와 시민운동단체의 인터넷 사이트에 정씨를 비난하는 글과 소수이지만 옹호하는 글이 빗발친 것. 정씨는 자기가 ‘중도 우파’라면서, “백지에 새 그림을 그리고 싶은 심정으로 정의원을 택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욕먹을 것을 알면서도 커밍아웃을 감행하는 이들이 늘고 있는 것도 이 지역에서 벌어지는 ‘DJ 이후’ 현상의 일종이다. 정상용 전 의원도 서울에 거주하면서 이 지역 개혁파 인사 영입에 적극 나서고 있다. 자원봉사 단체인 비전 코리아는 회원 수만 3만2천명을 확보했다. ‘정사랑’ 등 각종 정몽준 지지 모임에 참여하는 숫자를 더하면 지역 인사 중 정몽준 지지를 선언한 사람이 5만명에 달한다는 것이 국민통합21측 주장이다. 장헌일 비전코리아 정책기획단장은 “앞으로 후보 단일화를 위해 서명운동을 벌이겠다”라고 말했다.


여론 주도층이 치열한 ‘노·몽 논쟁’을 벌이고 있는 데 비해 바닥 민심은 여전히 싸늘한 편이다. 개인택시 기사 김인호씨(47)는 “신경 꺼버렸다. 다 똑같다”라면서 대선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를 꺼렸다. 거리에서 만난 시민들의 반응도 대동소이했다. 그러면서 바닥에 정몽준 지지 정서가 퍼져 있는 것 또한 다른 지역과 같았다.


정몽준 의원은 아직 광주를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대신 정의원의 부인 김영명씨는 10월17일과 25일 두 번이나 광주를 찾았다. 17일 그녀는 대표적 재래 시장인 양동시장을 방문해서 상인들과 일일이 악수했다. 그 날 김씨를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는 양동시장 상인 김 아무개씨(52·여)는 “재벌 사모님이라고 해서 어려워했는데, 서민들과 어울리는 것이 참 보기 좋았다”라며 김씨 칭찬에 열을 올렸다.


반면 택시기사 이광정씨(60)는 떨어지더라도 노무현을 미는 것이 광주 사람의 자존심을 찾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김선문 민주당 광주시지부 사무처장은 “남자들의 경우 아직 노무현 지지자가 많지만, 여자들은 6 대 4 정도로 정의원에게 기울었다”라고 보았다. 북구 갑 지구당에서 만난 임대정씨(김상현 의원 비서관)는 “여론 주도층은 노무현을 지지하지만, 시장 민심은 될 사람을 밀어주자는 쪽이다. 국민경선 때는 광주가 전국 여론을 선도했지만, 지금은 전국 흐름을 보며 따라가는 양상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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