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노당, 열심히 뛰었으나…
  • 고제규·차형석 기자 ()
  • 승인 2004.1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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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섭단체 한계에 막혀 악전고투…전략·전술 부재도 큰 문제
권영길 의원이 국회의사당 입구에서 단식 농성을 벌인 지 7일째인 지난 12월5일. 휴일인데도 민주노동당은 안팎으로 분주했다. 오전부터 총리실과 연락이 긴박하게 오갔다. 경찰이 공무원 노조 간부를 체포하기 위해 권의원 사무실에 난입한 것에 대해 총리가 어느 수준까지 사과할지 의견이 조율되었다.

게다가 이날은 민주노동당이 창당 4년 만에 처음으로 당원 총진군대회를 연 날이다. 정국이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대치 국면으로 흐르면서 취약해진 원내 입지를 만회하기 위해 기획된 ‘장외 투쟁’이었다. 권영길 의원은 “여기 앉아 있으면 여의도 농성 천막이 보인다. 1년 전만 해도 저기 앉아 ‘국회 안에 우리 의원 한 명만 있었어도’라고 생각했는데, 10명이 들어갔는데도 근본적 한계가 있다”라고 말했다.

사상 초유의 국회의사당 앞 농성은 이 날 오후 5시 이해찬 국무총리가 사과하면서 마무리되었다. ‘원내 정당’인 민노당으로서도 ‘운동권식’이라는 일부 비판이 내심 부담스러운 데다가 정부·여당과 계속 대립하는 것이 바른 선택인지에 대해 당 내에서도 이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여당도 4대 입법 처리와 임시 국회 소집을 앞두고 민노당의 협조가 절실했기 때문에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정부·여당과 꼬인 실타래가 어렵사리 풀렸지만 민노당이 처한 상황은 녹록치가 않다. 원내 진출 6개월 동안 성과도 거두었지만 ‘개혁 공조’와 ‘야 3당 공조’를 오가며 당 안팎에서 논란과 한계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맨땅에 헤딩’하며 연일 밤샘 공부

지난 6개월 동안 민노당은 국회 안에서 ‘실험’을 벌였다. 한 보좌관은 “진보 세력의 기대를 안고 원내에 진출했는데 초반에는 솔직히 막막했다”라고 말했다. 각 사회운동단체에서 수혈한 보좌진은 오랫동안 사회운동 경력으로 국회 밖에서는 ‘선수급’이었지만, 원내 활동은 초보였다.
심상정 의원실(재경위)의 손낙구 보좌관은 ‘맨땅에 헤딩하는 격’이라고 표현했다. 돌파구는 연일 계속되는 ‘밤샘’과 ‘학습’이었다. 운동권들이 학습하듯이 밤새워 ‘국회 공부’를 했다. 심상정 의원실만 해도 25년 동안 노동운동을 한 심의원과 민주노총 출신이 다수를 이룬 보좌관들은 1주일에 한 번씩 경제 공부를 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의원 10명은 대부분 언론의 상임위별 평가에서 상위권에 오를 정도로 초선답지 않은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또한 국회 문턱을 낮추는 등 국회 문화를 바꾸는 데도 일조했다(23쪽 상자 기사 참조).

당 소속 의원이 적기 때문에 파병반대 모임, 농촌의원 모임 등 의원 모임을 주도하며 ‘진지전’을 벌였다. 파병반대의원모임 간사를 맡은 이영순 의원은 “어쩔 수 없다. 의원들과 접촉면을 늘려 이슈마다 최대한 우리편으로 만들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개별 의원들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팀 플레이’에서는 한계를 보였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의원 20명이 있어야 구성할 수 있는 교섭단체 요건은 민노당에는 철벽이었다. 원내대표인 천영세 의원은 “대한민국 국회는 교섭단체 의원과 비교섭단체 의원으로 나뉘는 양원제다. 본회의에서 5분 발언을 하려고 해도 교섭단체 대표가 합의해줘야 가능할 정도로 국회 운영이 독점적이다”라고 말했다.

거대 양당이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면 비교섭단체의 설움은 더욱 커졌다. 개원 이후 상임위원장 배분을 둘러싸고 거대 양당이 대립하자 민노당 의원만 본회의장을 지키기도 했다.

지난 12월2일 열린우리당이 단독으로 공정거래법을 처리하려던 본회의에 불참한 것은 이러한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애초 민노당은 본회의에는 참석하고 기권한다는 방침이었다. 법안에 포함된 신문사 경품 고발에 대한 포상금 제도는 민노당 처지에서는 미흡하지만 그나마 상당히 진전한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민노당은 슈퍼맨인 척하지 말라”

조승수 의원은 “본회의가 열리기를 하루 종일 기다렸지만 어느 당도 도대체 왜 늦어지는지 연락하지 않았다. 열린우리당은 법적 권한도 없는 원탁회의에서 한나라당과만 협의하다가 본회의 정족수가 모자라니까 밤이 늦어서야 협조를 요청했다. 이런 상황에서 숫자를 채워달라는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결국 공정거래법은 정족수가 미달해 통과되지 못했다.
교섭단체 구성 요건 같은 외적 변수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내적 요인도 있다. 당내 전략과 전술이 없다는 지적을 받는 것이다. 민노당의 원내 진출은 1990년대 시민단체(NGO)가 생겼을 때를 연상케 한다. 시민단체들이 새로운 이슈를 제기했지만 ‘백화점식 시민운동’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것처럼, 민노당도 진보 의제들을 국회 안으로 끌여들이기는 했지만 우선 순위 없이 나열만 해 주요 의제로 부각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의제에 대한 선택과 집중 문제는 지난 11월4일 민노당 부설 진보정치연구소 주최로 열린 ‘민주노동당 의정활동 평가 및 방향’ 토론회에서도 도마에 올랐다. 조현연 교수(성공회대·정치학)는 당의 ‘슈퍼맨 콤플렉스’를 특히 경계했다. 그는 “기대 상승에 부응한다고 슈퍼맨인 척해서는 안된다. 모든 것을 다 쟁점화하려다 보면 결국 아무 것도 쟁점화하지 못한다. 당이 가장 잘할 수 있고 잘해야 하는 것을 선택하고 집중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당내 권력 구조나 자주 계열(NL)과 평등 계열(PD)의 복잡한 역학 관계는 ‘각론 만개, 총론 부재’의 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민노당은 권력 집중을 막기 위해 공직과 당직을 겸임하지 못하도록 했다. 독일 녹색당의 경험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의원단과 당 지도부인 최고위원회가 두 축을 형성한다.

그런데 최고위원회와 의원단 사이에 의사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형편이다. 그동안 의원단과 최고위원회는 견해를 달리한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이해찬 국무총리 인준 문제를 두고, 의원단은 과반수 이상이 찬성한 반면 최고위원회는 파병에 찬성하는 국무총리는 반대해야 한다는 입장이 다수를 이루었다. 결국 민노당은 임명동의안 반대를 당론으로 정했다. 최고위원회에서는 ‘당 지도부가 의정 활동에서 소외되었다’는 불만이, 원내 의원단과 보좌진들에게서는 ‘최고위원회가 의원 활동을 발목잡는다’는 불만이 나오고 있다.

최고위원회에는 당내 자주 계열이 대거 포진해 있다. 평등 계열에 속한 한 활동가는 ‘당원 번호’를 예로 들며 불신을 나타냈다. 이 활동가는 “최고위원 가운데 당원 번호 3000번 이내인 당원이 많지 않다”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당원 번호가 대략 3000번 이내인 사람들은 1997년 국민승리 21 시절, 진보 정당 독자 세력화를 위해 권영길 대선 후보를 지지했던 당원들이다. 당이 독자적 발전을 준비할 때 야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했던 인사들이 뒤늦게 지도부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당내 역학 관계가 이렇게 복잡하기 때문에 원내 전술에서도 각기 다른 방향으로 치닫는다. 지난 11월1일 열린 최고위원회에 제출된 문건 때문에 ‘2중대 문건 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열린우리당 2중대’ 소리를 듣더라도 국보법 폐지를 위해 열린우리당과 손잡아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문건이 최고위원회에서 논의된 것이 발단이었다. ‘2중대’ 부분이 삭제되기는 했지만 최고위원의 다수는 ‘반한나라당 연대 전선’이 지금 필요하다는 인식에 상당 부분 동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 홈페이지에서 자주 계열과 평등 계열은 이 문제를 둘러싸고 상당한 논란을 벌였다.

논란은 지면으로 이어졌다. 당 정책이론지 <이론과 실천> 12월호에는 ‘문건 파동’으로 나타난 당의 전술 기조에 대해 상반된 내용을 담은 두 글이 담겨 있다. 자주 계열 출신인 김창현 사무총장은 ‘현단계에서는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을 집중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국가보안법 폐지에 반대하는 조·중·동, 수구 기득권 세력 등과 결탁한 한나라당의 반민주적·반역사적 작태를 중단시키기 위해 반한나라당 전선을 최대한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PD·NL 계열, 전술 기조 엇갈려

반면 평등 계열이라 할 수 있는 김종철 최고위원은 “국보법과 관련해서 한나라당과 각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열린우리당의 기회주의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반한나라당 전선만 강조할 경우에는 노동운동과 진보 정당의 토대를 상실해 지지 기반을 잃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중장기적으로 노동 문제와 비정규직 문제 등 경제정책과 관련해 열린우리당과 분명히 맞서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의원들도 ‘반한나라당 전선’에 대해서는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 의원은 “개혁 공조와 야 3당 공조를 오갔다. 우리의 정치 폭을 넓힐 수는 있지만 행정수도 문제처럼 모호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지금은 개혁을 위해서라면 한나라당과 선을 긋는 개혁 공조가 효과적이다”라고 말했다. 다른 의원은 “국보법과 관련해서는 열린우리당의 진의가 의심스럽다”라고 말했다. 그는 “경제 정책을 보면 거대 양당간 차이가 별로 없다. 그런 상황에서 반한나라당 전선을 기본 축으로 하는 것은 반대한다”라고 말했다.

‘마의 지지율 20%’를 넘는 것도 과제이다. 그동안 민노당이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20%를 넘은 적은 총선 직후 단 한 차례. 여성들의 지지가 좀처럼 늘지 않는 것이 고민이다. 최근 코리아리서치 조사에서 남녀 지지율의 차이는 10% 포인트 대에 이르렀다. 조승수 의원은 “민노당 하면 ‘노동·투쟁 이미지’가 강하다. 여전히 대중적 스킨십이 부족해 나타나는 결과다. 20대 보수화 문제, 여성 지지도 저하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각론 만개, 총론 부재’ ‘마의 지지율 20% 돌파’ 등은 민노당이 해결해야 할 숙제다. 자주 계열과 평등 계열은 각기 다른 해법을 내놓으며 갈등하는 상황이다. 김혜경 민노당 대표는 “내년은 민주노동당이 창당 5주년을 맞는다. 내년 2월 전당대회에서 당내 각 의견 그룹 간에 공개적으로 대토론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당은 새로운 메시지를 기획하고 준비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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