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법 연장전’은 물 건너갔다?
  • 차형석 기자 (cha@sisapress.com)
  • 승인 2005.01.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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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 개혁파, ‘장기전’으로 방향 선회
2월 임시국회에서도 밀어붙이기 자제할 듯
지난해 12월31일 ‘국가보안법 1라운드’는 여야가 대치한 가운데 끝이 났다. 여야가 국보법 문제를 2월 임시국회로 미룬 후, 정가에서는 ‘국보법 2라운드’가 훨씬 강하게 전개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지도부가 국보법 유탄을 맞아 낙마한 상황에서 열린우리당 강경파의 목소리가 더욱 커질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 게다가 지난 1월3일 사퇴한 이부영 전 의장이 ‘당내 강경파와 과감한 투쟁을 벌여가야 한다’고 발언하면서 앞으로 당내 갈등이 더 증폭되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이런 예상과는 달리 국보법이 2월 임시국회에서 아예 의제에서 사라지거나, 논란이 되더라도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칠 공산이 커지고 있다. 국보법 2라운드에서 가장 큰 목소리를 낼 것이라고 예상했던 ‘240시간 의총’ 의원들 상당수가 유연한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240시간 의총 의원들 “작전상 후퇴”

이들이 기류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지난 1월4일부터. ‘국가보안법 연내 폐지’를 주장하며 국회에서 240시간 농성을 이끌었던 핵심 의원 15명은 1월4일 여의도의 한 식당에서 마지막 모임을 가졌다. 이 날 의원들은 ‘240시간 의총 모임’을 해산하기로 결정했다.

이 날 모임에서 국보법 문제를 언제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김원웅·선병렬·임종인 의원은 2월 임시국회에서 국보법을 다루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김원웅 의원은 “2월에 처리하지 못하면 대통령 임기 내에 처리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아름답지 못한 장면을 연출하더라도 한번 더 밀어붙여야 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2월 국보법 처리론’보다는 ‘국보법 장기전’이 더 우세했다. 박명광 의원은 “2월에 똑같은 상황을 되풀이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올해는 남북 관계가 진전해 국보법을 논의할 여건이 좋아질 것이다. 폐지 당론을 지키면 그때 충분히 다시 해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한 참석자는 “이 날 회의에서 2월을 고집하는 의견은 상대적으로 소수였다. 시간 여유를 갖고 상황에 따라 진행하자는 의견이 대세였다”라고 말했다.

이들이 방향을 전환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동안 240시간 의총 의원들로서는 당 안팎의 따가운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당내 온건파는 ‘정치는 협상이고, 한 발짝씩 나아가는 것인데 강경파는 모 아니면 도 식으로 접근한다’고 이들을 비판해 왔다. “옳은 일이었지만 손해를 본 것도 많다”라는 이경숙 의원의 평가에서 의원들의 고민이 묻어난다. 우원식 의원은 “우리는 강경파가 아니라 당론유지파다. 당론이 변질되지 않도록 당에 힘을 실어준 것인데, 일부 언론이 우리를 고립시키려는 의도로 강경파라고 매도했다. 진의 전달이 안돼 안타깝기도 하지만 지금은 당을 추스르는 게 급선무다”라고 말했다.

이들 개혁파가 ‘국보법 장기전’으로 방향을 튼 것은 2월에 국보법 논의를 다시 한다고 하더라도 당론을 관철할 뾰족한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 1월5일 한나라당이 국보법·과거사규명법·사립학교법 등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기로 결정한 이후 합의 처리는 더더욱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유시민 의원은 “17대 국회는 ‘박근혜 국회’다. 박근혜 대표의 결재를 받아야 일을 할 수 있는 꼴이다. 여기서 못 헤어나면 17대 국회에서 국보법을 처리할 방법이 없다”라고 말했다.

‘국민 화합’과 ‘경제 살리기’를 2005년 국정 기조로 정한 청와대의 방침도 240시간 의총 의원들의 태도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한 의원은 “2월25일이면 집권 2주년을 맞는데 이때 여야가 국보법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모습을 보이면 대통령의 국정 기조가 퇴색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2004년 12월에 국보법을 처리하지 못한 것은 열린우리당의 한계다. 원내에서 계속 이 문제를 놓고 선언적으로 싸우는 것은 힘만 빠지는 노릇이다. 지금 상태라면 한계를 인정하고, 당분간 논의를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라고 말했다.

처리 시기 늦춰도 대체 입법에는 강력 반대

2월은 시기적으로도 국보법 논의를 하기에 적절치 않다. 2월은 설날과 대통령 취임 2주년이 있는 데다 4월2일은 전당대회를 앞두고 당권 경쟁이 본격화하는 시기다. 재야파로 분류되는 한 의원은 “240시간 의총팀은 재야파와 개혁당계가 주축이다. 이 정도 선에서 물러나지 않고 새해에 이어 설날에 또다시 격렬하게 대치하면 당내뿐만 아니라 여론의 비판이 온통 재야파로 몰릴 수 있다”라고 말했다.

다른 의원은 “전당대회를 앞둔 채 국보법 논란을 주도하면 국보법을 당권 투쟁의 도구로 활용하려 한다는 비판을 살 수 있다”라고 말했다. 240시간 의총팀이 원내대표 경선과 국보법 문제를 분리하고 일절 관여하지 않기로 한 것도 하나의 계파를 이루어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240시간 의총 의원들은 국보법 문제를 다루는 시기에 대해서 유연해졌지만 대체 입법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김형주 의원은 “어중간하게 대체 입법을 하면 사문화하는 국보법에 링거를 꽂아주고 여야가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꼴이 되어버린다. 내버려두느니만 못하다”라고 말했다.

국보법에 대한 여당의 침묵은 이미 시작되었다. 지난 1월5일, 열린우리당 중앙위원회는 임채정 임시 지도부를 출범시켰다. 이 자리에서 중앙위원 가운데 아무도 국보법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정청래 의원은 “폐지론자와 대체입법론자들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한편 1천3백명 단식 농성을 주도했던 국가보안법폐지연대는 1월 말부터 보안법 폐지 운동을 재개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오는 2월 임시국회에서 국보법 논란이 지난해 말처럼 사생결단 식으로 격화할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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