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과 투자자 함께 살찌는 ‘윈윈 펀드’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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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05.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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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지배 구조 펀드’ 6~7월 출범 “코리아 디스카운트 현상 해소에 큰 도움”
한국 최초의 기업 지배 구조 펀드가 생긴다. 올 6∼7월께 선보일 예정인 지배 구조 펀드의 운용 주체는 독일계 투자 은행인 도이치방크의 계열사이자 코리아펀드 운용사로도 유명한 도이치자산운용(도이치). 도이치는 자본금을 총 2억 달러 모으기 위해 세계은행 산하 기구인 국제금융공사(IFC)와 함께 국내외 기관 투자가들을 대상으로 한창 투자 설명회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도이치측은 이런 움직임과 관련해 취재 요청을 일절 거부했지만, 국내 한 증권사 관계자는 도이치의 투자 의사 타진에 긍정적인 견해를 표명한 기관 투자가들이 생겨나고 있다고 귀띔한다. 도이치에서 한국 기업을 대상으로 한 지배 구조 펀드를 만들자는 논의는 지난해 초부터 있었지만, 해를 넘기고도 펀드를 띄우지 못한 것은 자금 모집이 지지부진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비중이 큰 투자자이기도 한 국제금융공사가 도이치와 실무 작업을 같이 하고 있으며, 지난 4월 한국 최대 은행인 국민은행이 투자를 약속한 데다가 최근 긍정적인 의사를 밝힌 투자자들이 속속 나타나 한국 최초 지배 구조 펀드 탄생 전망을 밝게 하고 있다. 지배 구조 펀드란 무엇일까. ‘지배 구조 개선’이라는 공익적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상품 구조나 운용 과정이 일반 투자 펀드와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배 구조 펀드는 6개월 후 환매가 보장되는 일반인 대상 펀드와는 비교할 수 없이 호흡이 길다. 투자 기업 별로 고안된 지배 구조 개선 프로그램이 작동해 ‘개선’이라는 성과를 내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릴 수밖에 없다.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 지배 구조 펀드 운용 기간은 적어도 3년이 넘는다. 도이치의 지배 구조 펀드는 기업으로서 수익성과 성장성은 우수한데, 다시 말해 펀더멘털은 좋은데도 지배 구조가 좋지 않아 주가가 저평가되어 있는 기업을 대상으로 한다. 한국 주식 시장에 상장 혹은 등록된 20∼30개 중소 기업이 편입될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LG·SK·현대차 같은 재벌 그룹 소속 대기업을 투자 대상에서 아예 제외했다. 한국의 중소 기업을 투자 대상으로 하지만, 지배 구조 펀드가 설정될 곳은 한국이 아닐 공산이 크다. 펀드에 관한 한국의 규제 때문에 바하마나 케이먼 군도, 버진 아일랜드 같은 조세 회피 지역에 터를 잡을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기업의 지분 구조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지만, 도이치는 대체로 1∼10% 정도의 지분을 확보할 것으로 증권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그렇다면 해당 기업의 대주주는 긴장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도이치측이 기업 내용이 좋아 지배 구조만 개선되면 주가가 뛸 기업을 골라내지만 해당 회사의 대주주·경영진과 협의하는 우호적 절차를 밟기 때문이다. 도이치는 해당 회사 경영진이 지배 구조를 강력히 개선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으면 절대 투자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점에서 지난 3∼4월 SK(주) 주식을 대량 매집한 크레스트증권과는 구별이 된다. 크레스트증권의 모기업이자 운용 회사인 소버린자산운용은 자기네가 SK(주)의 지배 구조 개선을 위한 지배 구조 펀드라고 밝혔지만, SK(주)의 대주주와 경영진 의사와는 다르게 적대적으로 지분을 사들였기 때문이다. 지배 구조 펀드는 윈윈 게임이 될 수 있다. 투자자들은 투자 기업의 지배 구조가 좋아져 주가가 뛰면 시세 차익을 얻을 수 있다. 해당 기업도 자기네 주가가 기업 내용과 맞게 제대로 평가되는 기쁨을 맛볼 수 있다. 특히 한국의 중소기업은 그동안 외국인 투자가들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해 왔다. 외국인 투자가들은 한국 중소기업 주식을 사고 싶어도 이들에 대한 분석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따라서 지배 구조 펀드로부터 분석 및 감시 대상이 된다는 것은 그 중소기업에 새로운 자금 조달 길이 열린다는 의미도 된다. 성공적인 지배 구조 펀드 출현은 한국 경제 전체를 위한 청신호로 보인다. 한국의 대표적 소액주주운동가인 고려대 장하성 교수는 “시장에 지배 구조 펀드라는 또 하나의 견제 장치가 생기는 것이므로, 지배 구조가 나빠 기업 내용보다 주가가 저평가되는 이른바 ‘코리아 디스카운트’현상을 누그러뜨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지배 구조 펀드는 기관 투자가의 기업 감시 활동이 왕성한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벌써부터 유행하고 있다. 좋은 예가 세계 최대의 연금 기금인 캘퍼스(캘리포니아 공무원연금기금). 2002년 10월 말 현재 기금을 1천3백26억 달러 굴리고 있는 캘퍼스는 기관 투자가로서 자기네들이 직접 투자 대상 회사를 선정해 지배 구조 개선을 요구하는 기업 감시 활동을 펼치지만, 외부의 지배 구조 펀드도 적극 활용하고 있다. 현재 13억 달러를 간접 투자하고 있는 캘퍼스는 지난해 그 규모를 총 30억 달러로 늘렸다. 그동안 릴레이셔널 인베스터스와 같은 미국과 영국에서 활동하는 지배 구조 펀드에만 자금을 주다가 지난해 하반기부터는 액티브 밸류·허미스 인베스트먼트 매니지먼트·스팍스에셋 매니지먼트같이 유럽과 일본 시장에서 활동하는 펀드에도 자금을 위탁하고 있다.

미국 교사 연금인 TIAA-CREF도 지배 구조 펀드를 적극 활용해 투자 기업에 지배 구조 개선을 강력히 요구하는 ‘큰손’이다. 영국의 우체국과 최대 통신회사인 브리티시텔레콤 직원들의 연금을 운용하는 기관인 허미스는 지배 구조 펀드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1997년 말 경제 위기 이후, 지난 5년 동안 한국 기업의 지배 구조가 많이 좋아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지난 4월 크레디리요네이머징마켓(CLSA)과 아시아 기업지배구조협회(ACGA)가 발표한 2003년 아시아 기업 지배 구조 감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기업들은 특히 지난 2년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아시아 10개국(일본 제외) 3백80개 기업 가운데 10위 안에 포함된 기업이 4개(KT·KT&G·국민은행·삼성화재해상보험)에 달했다. 2년 전에는 상위 10위 안에 하나도 없었으며, 지난해에는 국민은행만 들어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 기업의 지배 구조 순위는 아시아에서도 중위권에 머무르고 있다(46쪽 표 참조).

세계 자본 시장의 심장부인 월가에서 활동하는 코리아 데스크들은 한국 기업에 대한 투자를 머뭇거리게 하는 최대 걸림돌로 북한 핵 문제와 함께 지배 구조를 지적하고 있다. 김우찬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기업 경쟁력의 원천인 지배 구조를 개선하지 않는 한 장기 성장은 없다. 지배 구조가 좋은 기업의 주가가 높은 것도 그 때문이다”라며 지배 구조 개선을 견인할 한국 지배 구조 펀드 1호에 기대감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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