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감 정년 36.5세 시대
  • 장영희 (mtview@sisapress.com)
  • 승인 2003.10.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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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원 칼바람 상시화…“조건 좋을 때 나가자” 조기 퇴직도 확산
한국 최대의 통신업체인 KT가 1회 감원 규모로는 사상 최대인 5천5백5명(희망 퇴직 2백여명 포함)을 퇴직시키자 대부분의 언론은 직장인들이 충격에 휩싸였다고 보도했다. 1997년 경제 위기에 이은 제2의 대량 감원 바람이 불어닥쳤다는 분석도 내놓았다. 하지만 최근의 인력 조정은 IMF 위기와 같은 외부 충격이 아닌 회사 내부의 자발적 필요에 기인하고 있다는 점이 사뭇 다르다. 감원 방법도 자발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추세’를 이루고 있다.

경기도 성남시 정자동에 있는 KT 본사. 내부 분위기가 어떠냐고 묻자 한 과장은 “앞과 뒤 혹은 옆자리의 동료 5천명이 나갔는데 동요가 없을 수 있나. 사기가 많이 떨어져 있다”라고 말했다. 업무 재배치가 진행 중이지만, 나간 동료들의 업무 공백을 메우느라 퇴근 시간이 몇 시간 늦어지는 등 부하가 커졌다는 것이다.

KT 퇴직자 9.3%가 40대 이하

회사의 퇴직 종용도 있었다고 하지만, 경영진의 예상보다 두 배 가까이 많은 사람이 왜 제발로 걸어나가는 선택을 한 것일까. 퇴직을 결행한 한 부장은 “이런 좋은 조건(기본급의 45개월. 최대 76.5개월치)은 앞으로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결정적이었다”라고 귀띔했다. 어차피 정년(58세)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고 길어야 몇 년인데 그럴 바에는 조건 좋을 때 나가자는 정서가 팽배했다는 것이다.
KT최근 명예 퇴직을 단행한 두산중공업에서도 비슷한 흐름을 엿볼 수 있다. 과장급 이상 1천7백66명 가운데 21%에 달하는 3백65명이 명퇴를 신청했다(대리급 이하 현장직 대상 명예 퇴직은 앞으로 실시될 예정). 회사측은 명퇴자에게 연봉 2년치(기본급 기준으로는 40∼50개월치)에다 학자금 등 특별 혜택을 부여했다.

KT나 두산중공업의 사례는 노동 시장의 엄혹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평생 직업’은 있을지언정 ‘평생 직장’은 사라졌다는 사실이 새삼 확인된 것이다. ‘사오정(45세 정년)’ ‘오륙도(56세까지 남아 있으면 도둑)’ 같은 유행어가 결코 과장이 아닌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흐름은 퇴직 연령이 낮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KT의 경우 40대 퇴직자가 가장 많은 63%를 차지했지만 40대 이하도 9.3%에 달했다. 이들은 희망 퇴직, 즉 회사가 나가라고 하지 않는데도 제발로 걸어나간 경우이다.

최근 인터넷 취업 포털 사이트 ‘잡링크’가 직장인 3천1백26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체감 정년’은 36.5세(남성 38.1세, 여성 35.3세)였다. 직장인들은 가장 빠른 법정 정년 시점인 55세에 비해 19년, 평균 수명(76.5세)에 비하면 40년이나 빨리 ‘회사 인간’ 생활을 접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고용 안정성이 크게 흔들리는 상황에서 그마나 젊은 30대 직장인들은 전직이나 다른 삶이라는 비빌 언덕이 있다. 두산중공업 박희원 차장(40)은 ‘가야밀면이랑 돈까스랑’이라는 분식 프랜차이즈 사업을 경영해 보겠다며, 회사가 붙잡는데도 뛰쳐나왔다. 사실 그는 2년 전부터 창업 준비를 해왔다.

하지만 40∼50대는 사정이 다르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경제 발전의 중심축으로 기능했던 이들은 고용 시장이 젊은층 위주로 재편되자 마땅히 갈 곳이 없는 위기의 세대로 전락하고 있다. 한 대기업 출신 부장(50)은 2년 전 명예 퇴직 했지만 아직도 새 직장을 잡지 못하고 있다. 봉급과 직급을 강등하는 ‘수모’를 마다하지 않았고 대기업에서 쌓았던 노하우를 강조했지만, 이미 그는 중소기업도 버거워하는 ‘고령자’였던 것이다. 국민은행 연수운영과 권오경 과장은 “특히 한 직장에서 오래 근속한 사람일수록 퇴직으로 인한 배신감과 무력감, 사회와의 격리감을 크게 느낀다”라고 말했다.

40대 중반인 한 전직 KT 부장은 제발로 걸어나왔지만 경영진을 비난했다. 회사가 망하는 것도 아닌데, 경영 상황을 조금 낫게 하려고 직원을 자르는 것은 무책임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감원을 동반한 구조 조정을 경제 논리로는 비난하기 어렵다. 회사가 살기 위해 혹은 기업 가치를 높이기 위해 상시 구조 조정이 불가피하다는 현실론이 득세한다.명퇴 직후 KT 주가가 뛴 것에서 드러나듯이 인력 조정은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는다. 대기업들이 위로금을 주며 명예 퇴직 혹은 희망 퇴직이라는 방법을 쓰는 것은 감원 과정의 파장을 최소화하고 기업 이미지를 나쁘게 하지 않으려는 고육지책일 뿐이다.

‘회사 브랜드’ 걷어내고 ‘경력 자산화’ 나서라

고용 불안 시대가 ‘36.5세 정년’으로 새롭게 정의되고 있는 가운데 40∼50대 조기 퇴직자 문제는 거의 방치되고 있다. 서울대 의대 신경정신과 정도언 교수는 “조기 퇴직자 문제는 산불과 같다. 초동 진화를 하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이 번진다”라며 사회와 기업이 동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내년부터 퇴직자 장려금 제도를 시행하고 몇몇 기업이 ‘아웃플레이스먼트’ 같은 전직(轉職) 프로그램 등을 가동하는 것은 조기 퇴직자에 대한 배려라고 볼 수 있지만, 아직 미미한 수준이다.

고용 컨설턴트들은 직장인 스스로가 기업(조직)의 이해와 개인의 이해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라고 강조한다. 또 자기가 어떤 회사의 직원이라는 ‘회사 브랜드’를 걷어내라고 조언한다. 퇴직하자마자 회사 브랜드라는 거품은 사라진다. 외부 노동 시장에서의 자신의 상품 가치를 똑바로 인식하지 못했던 탓이다. 컨설팅 전문가들은 회사 인간일 때부터 이른바 ‘경력 자산화’를 시도하라고 조언한다. 자신의 자산을 유형 자산(외국어나 컴퓨터 구사 능력, 각종 자격증)과 무형 자산(대인 관계 노하우, 관리 능력, 친화력 따위)으로 분류해보면 자신의 몸값이 보인다. 그 다음 전직에 성공하기 위한 ‘자산 건전화’를 시도하거나, 아니면 다른 삶을 살기 위한 준비에 착수하라는 것이다.

일찍이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2%대 실업률, 정상적인 정규 노동, 직장을 통한 생활 안정은 이제 역사가 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잡 노마드 사회〉를 쓴 미래 사회학자 군둘라 엥리슈 역시 독일의 예를 들면서 2010년이 되면 전일제 정규직은 거의 자취를 감출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미 일자리를 많이 제공하는 곳은 자동차 회사나 의류 회사가 아니다. 미국의 ‘맨파워’ 같은 임시직 알선 회사들이다.

산업화 시대의 코드인 정착과 안정의 미덕은 이제 유목과 유동화라는 새로운 추세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이제 직장인들은 언제라도 길 떠날 유목민이 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울리히 벡은 미래의 노동이 삶과 일이 결합된 형태가 될 것이라고 갈파한 바 있다. 일하는 것이 취미 활동이자 일이 곧 생활이 된다는 것인데, 일 위주의 노동이 아니어서 직장 노동에 익숙한 기성 세대로서는 낯설고 두려운 체험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미 노동 시장이 그쪽으로 진입해 있고 이른바 유연화는 갈수록 심해지리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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