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A 변방’ 한국 자유무역 항로 열까
  • 장영희 (mtview@sisapress.com)
  • 승인 2003.10.28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본·싱가포르와 ‘협정 체결 추진’ 합의
한국은 과연 ‘자유무역협정(FTA) 외톨이’ 신세를 벗어날 수 있을까. 최근 태국 방콕에서 열렸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와 싱가포르 국빈 방문에서 보여준 노무현 대통령의 통상 외교는 이런 기대를 한껏 높여주고 있다.

노대통령은 10월20일과 23일, 각각 일본 고이즈미 총리, 싱가포르 고촉동 총리와 정상 회담을 갖고 양국 정부간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위한 협상을 시작하기로 합의했다. 일본과는 올해 시작해 2005년 체결을 목표로, 싱가포르와는 2004년 초에 시작해 가급적이면 연내에 협상을 끝내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에 따라 통상교섭본부는 협상 전략과 추진 주체를 선정하고 아젠더를 설정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한국과 일본, 한국과 싱가포르 정상 사이에 자유무역협정 추진이 갑자기 거론된 것은 물론 아니다. 일본의 경우 지난해 7월부터, 싱가포르는 올 3월부터 산·관·학(産官學) 공동연구회가 구성되어 각각 여덟 차례와 세 차례에 걸쳐 양국간 자유무역협정의 경제 효과 및 추진 타당성, 협상에 포함될 의제 등을 검토해 왔다. 지난 10월 비슷한 시기에 한·일, 한·싱가포르 산관학공동연구회는 그동안 논의한 결과와 빠른 시간 내 정부간 협상을 시작하라고 건의하는 최종 보고서를 각각 자국 정상에게 제출했다.

일본·싱가포르와의 자유무역협정은 한국의 사상 첫 자유무역협정인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에 비해 전도가 순탄하리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가장 중요한 ‘농업 문제’라는 민감성이 이들 나라에는 없기 때문이다. 한·일 자유무역협정의 경우 오히려 일본 정부가 자국 농민들을 얼마나 설득할 수 있느냐가 협상 체결의 최대 변수이다. 지난해 10월 두 나라 정부가 서명한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은 농민단체 반발을 이유로 한국 국회가 비준을 3개월째 미루고 있어 발효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현재 일정대로 무리 없이 진행된다면 일본보다 싱가포르와의 자유무역협정이 먼저 실현될 가능성이 크다. 2004년에 체결되어 2005년부터 발효되리라고 보는 것이다. 이른바 전략적 통상 국가인 싱가포르와의 자유무역협정은 경제 효과가 크지 않다. 하지만 동남아 시장에 진출할 교두보를 확보하고 한국 정부의 자유화 의지를 증명하는 차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는 것이 통상학자들의 분석이다. 또 싱가포르는 이미 적지 않은 국가와 자유무역협정을 맺고 있어 이른바 자유무역협정 노하우를 가진 나라이다. 이 때문에 삼성경제연구소 김경원 상무는 ‘학습 효과’를 강조한다. 자유무역협정 운용 노하우를 습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한·일 자유무역협정은 지각 변동에 비유될 정도로 경제적 파장이 크다. 1998년 당시 오구라 가즈오 주한 일본 대사에 의해 처음으로 한·일 자유무역협정이 제기된 이래 두 나라 정상이 구체적 추진에 합의하기까지 무려 5년이 걸린 것도 그 민감성 때문이다. 일본 전문가인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김양희 연구위원(동북아경제중심위원회 파견)이 한·일 자유무역협정이 두 나라 역사에서 식민 지배와 광복 이래 가장 획기적인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평할 정도다.

한국이 경제 선진국인 일본과, 일본이 인접국인 한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으려는 것은 물론 자유무역협정이 가져오는 효과 때문이다. 생산성 증대와 외국인 투자 유치, 특히 구조 개혁을 통해 경제 제도 투명화·개방화·선진화라는 동태적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어느 나라 정부나 구조 개혁을 단행할 때 엄청난 내부 저항에 직면하는데, 이를 돌파하기 위해 자유무역협정 같은 외부의 힘이 필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일본에 비해 한국 정부가 좌고우면을 거듭해온 것에는 난제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왜 하필 일본이냐는 뿌리 깊은 반일 감정은 차치한다 해도, 가뜩이나 심각한 대일 역조가 더욱 심해지고, 한국이 크게 뒤지는 핵심 부품·장비·소재 같은 자본재 산업에 큰 타격을 줄 것으로 예상하기 때문이다.

협정이 발효되면 한 해 1백50억 달러에 달하는 대일 무역 수지 적자가 더 늘어날 것이 분명하다. 다른 나라에서 사오던 것을 일본에서 수입하는 이른바 ‘무역 전환’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통상교섭본부 김병섭 다자통상협력과장은 “대일 적자에 대한 시각을 바꿀 때가 되었다”라고 주문한다. 대일 적자는 한국 기업들이 지리적 인접국이자 기술 선진국인 일본에서 기계나 부품을 사오는 것이 가장 유리하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부품·소재 분야의 중소기업이 직격탄을 맞게 되는 것은 불가피해 협상 과정에서 피해를 최소화하는 경제 정책적 디자인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WTO 국가 중 자유무역협정 없는 나라는 6개국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김양희 연구위원은 일본이 버거운 상대임에 틀림없으며, 한·일 자유무역협정이 최선이 아닌 차선책이라는 지적에도 동의한다. 그러나 김연구위원은 한·일 자유무역협정이 앞으로 동아시아 자유무역협정(EAFTA) 논의를 가속화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촉매제라는 점에서 성공적으로 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본에 이어 중국과 협정을 체결하고 그 다음 순서인 한·중·일 자유무역협정 논의에서 한국이 중재자 입지를 확보해야 생존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일본과 중국 사이의 역학 관계를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 최선의 협상 전략이라는 것이다.

한국을 둘러싼 아시아 주변국들의 움직임은 벌써부터 심상치 않다. 일본은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과 2005년에 자유무역협정 협상을 시작하기로 했다. 중국은 아예 2010년께 아세안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기로 합의해 아시아 맹주를 노리는 일본을 견제하고 있다.
자유무역협정의 중요성은 비단 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확보하는 데에만 있지 않다. 양자간 무역 협정을 맺지 않고는 더 이상 수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주력 시장의 경제 블록화 현상이 가속화하고 있다. 특히 미국과 유럽은 대륙 규모의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시도하고 있다. 미국은 2005년 출범을 목표로 아메리카 대륙 34개국을 한 경제권으로 묶는 범미주자유무역지대(FTAA) 결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자유무역협정의 원조인 유럽연합(EU) 역시 내년 5월 동유럽 10개국이 정식 회원국이 되는 시점을 기해 한층 확대하고 강화한 유럽 경제 블록을 만들려고 하고 있다.

올 5월 말 현재 1백53개나 되는 자유무역협정이 발효 중이다. 세계무역기구(WTO) 1백46개 회원국 가운데 단 하나의 자유무역협정도 발효하지 못한 나라는 한국·중국·타이완·홍콩·마카오·몽골 등 여섯 나라뿐이다.

심각한 것은 이미 자유무역협정이 없는 데 따른 고통을 호소하는 기업 현장의 절박한 목소리가 비명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는 최근 중남미와 동남아 등지에서 한국 기업들이 당하는 피해 사례를 정리한 보고서를 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