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헤란 밸리에는 없고, 실리콘 벨리에는 있는 것
  • 남유철 (경영 컨설턴트 · 미국 변호사) ()
  • 승인 2000.1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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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 미국 밴처, 성장 배경 · 투자 성격 인식에 큰 차이
실리콘 밸리를 방문하는 한국의 벤처 기업인이나 기자로부터 필자가 가장 자주 받는 질문은 ‘한국 벤처 업계의 미래를 어떻게 보느냐’는 것이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방문객의 질문은 ‘도대체 정확히 어디가 실리콘 밸리냐’는 관광 수준의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코스닥 주가 폭락이 장기화한 탓인지 벤처 산업의 가능성이나 미래를 걱정하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필자는 한국 주식 시장의 내일을 보라고 말한다. 한국의 주식 시장이 앞으로 5년간 폭발적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없다면 같은 기간에 벤처 업계의 폭발적인 성장도 기대할 수 없다고 필자는 잘라 말한다. 덧붙여 필자는 ‘벤처에 미래가 있으므로 코스닥의 주가가 결국은 다시 오를 것이다’라는 식의 역논리는 절대로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한다.

한국의 벤처 업계를 이 곳에서 바라보면서 필자가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벤처 투자 자체가 주식 투자 게임의 일부라는 사실을 한국 벤처인이나 투자자들이 의외로 직시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사실이다. 벤처와 주식 시장의 함수 관계가 얼마나 긴밀한지에 대한 ‘역사적 경험’이 없다 보니 미국에서는 상식이나 다름없는 이 사실이 한국에서는 간과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1987년 주식 시장이 폭락했을 때 벤처 자금의 규모는 50% 이상이 줄어들어 이것이 실리콘 밸리의 불황으로 바로 이어졌다(1987년 52억 달러에 달하던 벤처 자금의 규모는 1991년 26억 달러로 줄어들었다).
주식 시장에서 투자금 회수를 노리는 벤처 투자 자금은 주식 시장보다 한 걸음 늦게 투자의 흐름을 좇지만, 그 진폭은 주가보다 크게 나타나고 있다(74쪽 도표 참조). 실리콘 밸리의 노장들은 미국 주식 시장이 식으면서 투자 자금이 말라드는 실리콘 밸리식 불황을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에 호황과 불황이 거의 전적으로 미국 주식 시장의 동향과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잘 알고 있다.

한국의 벤처인이나 전문가 들은 흔히 인터넷이 등장해서 미국 나스닥의 기술주들이 폭등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큰 오산이다. 미국 주가의 전반적 상승이 첨단 기술주 폭등과 인터넷 상업화를 유도한 것이다. 인터넷 상용화가 새로운 기대와 흥분을 가져온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인터넷에 대한 흥분은 벤처 주식의 ‘거품’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나스닥의 전반적인 주가 상승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인터넷과 닷컴의 등장은 이미 뜨거워지고 있던 미국 주식 시장에 기름을 부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하다.

그러나 미국에서도 올해 들어 닷컴 주는 몰락했고, 대부분의 첨단 기술주들이 하락세를 보였다. 물론 실리콘 밸리에서는 아직 불황의 조짐이 보이는 정도는 아니지만 닷컴에 몰려들던 고객의 수가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 실리콘 밸리에 포진하고 있는 전문 서비스업 종사자들의 한결같은 반응이다.

하지만 ‘닷컴 몰락’으로 상징되는 한국 벤처 업계의 불황과, 과열에서 이제 정상으로 돌아서려 하고 있는 미국 실리콘 밸리의 경기를 직접 비교해서는 안된다. 실리콘 밸리의 경기 조정은 초고속으로 달리던 항공모함이 서서히 속도를 줄이는 것에 비교할 수 있다. 설혹 엔진이 꺼졌다 해도 항공모함 규모의 경제는 갑자기 서지 않는다. 반면 테헤란 밸리의 불황은 과속으로 달리던 소형 모터보트의 모터가 갑자기 돌아가지 않는 형국이다. 한국 벤처 산업은 그 규모가 작고 역사가 짧다 보니 빨리 달아오르고 빨리 식을 수밖에 없다. 특히 미국과 한국은 경제의 전반적 여건과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실리콘 밸리의 경우 닷컴은 몰락하고 있지만 이 지역에 떠돌아다니는 벤처 투자 자금은 지난해에 비해 오히려 2.5배나 늘어났다. 그 규모도 천문학적 수준인 연간 천억 달러를 넘어선다. 닷컴들이 사라지고 보니 그럴듯한 기술과 경영 성적을 갖춘 벤처인에게는 오히려 자금 구하기가 지난해보다 더 쉬워졌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나스닥이 하늘을 찌를 듯 올라가던 지난해에 이미 올해에 투자될 벤처 자금들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창투 자금이 조성되어 실제 투자되기까지는 최소 1년의 시차가 존재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내년부터 미국 벤처 투자 자금도 감소하기 시작할 것이다.

한국은 미국과 더불어 인터넷 보급률이 높은 나라 중의 하나이다. 최근 <비즈니스 위크>가 한국을 ‘인터넷 강국’으로 소개하고 한국 벤처 산업의 미래를 비교적 밝게 보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비즈니스 위크>의 장밋빛 논조는 한국 경제의 현실과 경제 논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서투른 낙관론이다. 벤처 산업이 부흥하기 위해서는 벤처 투자 자금이 우선 활성화해야 하는데 이는 주식 시장과 금융산업이 성숙하게 발전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한국의 경우 증시의 공정한 규칙과 감독 기능이 확보되어 있지 않아 주가 조작이 난무하고, 투기 성향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극심하다. 시장의 규칙을 세우고 집행해야 하는 금융감독원마저 부패로 비난받고 있는 증시 환경에서 벤처 투자가 활성화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섣부른 망상이다.
한국의 벤처 전문가들 중에는 ‘벤처 투자는 무조건 옳은 것이다’ 혹은 ‘주식 시장은 죽었지만 벤처에는 계속 투자해야 한다’라고 ‘윤리적 논리’를 강조하는 이들이 많아 보인다. 이들은 ‘한국에는 벤처밖에 갈 길이 없지 않느냐’며 이른바 벤처대국론을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경제의 기초 상식을 인식하지 못한 데서 빚어지는 억지 논리이다. 벤처 기업에 자금을 대는 벤처 투자가 기본적으로 주식 시장에 투자 기업을 상장해 이익을 회수하려는 고난도 주식 투자의 한 형태라는 것을 직시했다면 벤처 투자는 무조건 옳다는 식의 주장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식 영어로 ‘벤처’라고 부르든, 또는 미국인들이 말하는 ‘하이테크’(high-tech)라고 부르든, 첨단기술 산업은 경제에 ‘플러스 알파’가 될 수는 있어도 그 자체가 경제의 중심이 될 수는 없다. 만일 경제의 중심이 된다면 벤처 또는 첨단이라고 부르는 그 자체가 ‘모순 어법(oxymoron)’이다.

정보산업(IT) 대국인 미국의 경우에도 벤처 산업이 미국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 미미하다. 미국 정보산업이 미국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6%에 지나지 않는다(74쪽 도표 참조). 미국 경제력의 대부분은 여전히 전통적인 서비스업과 제조업에서 발생하고 있고, 이 기반 위에서 미국의 벤처 투자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전통적인 서비스업과 제조업이 호황을 이룰 때 투자의 여유 자금이 고위험 고수익의 벤처로 흘러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수출에 크게 의존하는 한국에서 좋든 싫든 수출 산업을 주도해온 재벌과 대기업을 죽이고 벤처로만 부흥할 수 없는 숙명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국에서 부흥하고 있는 벤처 산업도 사실은 최근에 들어서야 투자자로부터 각광받고 있다는 점 역시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창투회사들이 실리콘 밸리에서 둥지를 틀기 시작한 것은 1940~1950년대로 거슬러올라가지만, 본격적인 성장은 1980~1990년대 들어서야 이루어졌다. 특히 1995년 넷스케이프 등장을 기점으로 하여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미국의 벤처 투자 자금은 근본적으로는 같은 기간 미국의 주가가 비약적으로 올랐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미국 벤처 산업의 전망이 밝아 보이기도 했지만, 벤처 투자 자금의 비약적인 증가는 실제 미국 경제가 호황 국면을 구가하고 있었고 주식 시장에 투자 자금이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워낙 수익이 좋다 보니 연·기금이나 대학 재단과 같은 거대 투자 기금들이 앞다투어 벤처 투자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1990년대 미국에서 벤처가 투자를 회수하기 좋은 곳으로 인식된 근본적인 요인은 시장에서 벤처의 실제 성공률이 높았다기보다 미국 주가가 전반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오른 덕분에 조기에 투자 수익을 회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1990년대 미국 벤처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근본 원인은 1990년대 미국 경제의 유례 없는 호황 덕분인 것이다.
필자가 실리콘 밸리에서 만난 한국의 벤처인들은 거의 예외 없이 자사 제품이 ‘세계 최초의 개발’임을 강조하곤 했다. 대부분이 응용 기술에 불과했지만, 설혹 진정한 세계 최초의 원천 기술이라 하더라도 기술적 혁신 그 자체가 벤처의 상업적 성공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기술적인 혁신 그 자체와 벤처의 (상업적) 성공 사이에 연관성이 거의 없다는 역설은 실리콘 밸리에서 실제 확인된 역사적 교훈이다.애플 컴퓨터가 성공한 것은 애플의 뛰어난 기술성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애플 컴퓨터의 운영 체계는 실리콘 밸리에서 당시 주인 없이 떠돌던 이른바 ‘공동체 작품’이었다. 애플이 성공한 요인은 시장에서의 대중적 수요에 정확히 타이밍을 맞추었고 뛰어난 디자인으로 마케팅에 성공했다는 데 있다.

실리콘 밸리에서 기술적 혁신은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곳저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다만 그 기술적 혁신이 벤처의 성공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시장의 수요에 정확히 타이밍을 맞추어야 하고 마케팅에서 성공해야 한다.누가 경영을 하느냐에 따라 벤처의 성공과 실패가 가려진다는 평범한 교훈 때문에 실리콘 밸리의 창투사들은 창업자의 배경을 가장 중시한다. 벤처가 창업하기 위해서는 우선 투자 자금이 확보되어야 하는데 주식 시장이 받쳐주지 않으면 창업 자금을 구하는 일도, 상장을 통해 추가 자금을 확보하는 일도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진다. 이 때문에 벤처와 경제 전반 혹은 신경제와 구경제는 따로 갈 수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재벌이 미워도 재벌을 죽이고 벤처로만 한국이 부흥할 수 있다는 논리는 벤처를 가능케 하는 투자 자금이 어디서 조달되는지를 망각한 위험천만한 무지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 정부의 벤처 육성책은 당장은 관련 분야 공무원 자리만 늘리면서 (실패한 재벌 정책에서 확인되었듯이) 중·장기적으로는 결국 엄청난 해악을 끼치는 정부의 시장 개입으로 변질한다. 벤처 육성을 강조하는 한국 정부가 실리콘 밸리에서 건물이나 사들이는 쓸데없는 벤처 정책을 내놓는 대신 제반 경제 여건을 살리는 데 우선 주력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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