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부터의 아셈, 아래로부터의 아셈
  • 강수돌 고려대 국제정보경영학부 교수 ()
  • 승인 2000.1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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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셈(Asia Europe Meeting)이란 2년마다 열리는 아시아와 유럽의 만남이란 뜻이다. 10월 20일부터 21일 사이에 아시아와 유럽의 26개국 정상들이 서울에 모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정상들 모임에서 항상 그러하듯, 그 10배나 되는 2백50명의 경제인들이 함께 모였다. 물론 경제·정치·외교·문화 등 다양한 이슈가 협의 대상이다. 이번 모임은 런던·방콕 모임에 이어 세 번째인데, 그 모토는 ‘새 천년 번영과 안정의 동반자 관계’다.

아, 동반자 관계라! 정보화와 세계화를 배경으로 하여 갈수록 격렬해지는 경쟁과 분열이 우리 모두를 제압해 오는 오늘날, 이 동반자 관계라는 말은 얼마나 달콤한 구호인가! 게다가 미국이 1990년대 들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출범시키고 초국적 기업과 세계 금융 자본을 통해 세계의 정치·경제·문화·군사 헤게모니를 쥐고 흔드는 정세에서, 아시아와 유럽이 하나로 뭉쳐 미국을 상대로 일종의 ‘대항 블록’을 형성한다면 새로이 도약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고 ‘현실적’ 사고를 한다면, 이러한 ‘번영과 안정의 동반자 관계’ 구호는 그만큼 더 반가운 것이 된다. 유럽과 아시아 간의 교역량이 세계 전체의 52%를 차지하고 있다는 통계는 대항 블록의 의미를 더 뚜렷이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가 이번 모임의 주요 안건들을 살펴본다면 이러한 기대와 바람은 가차없이 허물어지고 만다. 바로 그 번영과 안정의 동반자 관계라는 것이 철저히 ‘위로부터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이번 아셈에서 다루어진 주요 안건 중에는 2025년까지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무역 장벽이나 투자 장벽을 철폐해 상품·자본·서비스가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한다는 것이 들어 있다. 이를 위한 준비로 아시아·유럽 간 정보통신망(트랜스유라시아 망) 등 정보 인프라를 구축하고 전자 상거래를 활성화하는 내용도 들어 있다. 대부분 자본과 기술의 자유로운 이동이 다른 한편으로 노동과 생명의 억압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우리는 ‘아, 이것이 아닌데!’ 하고 느낀다. 또 유럽연합은 동식물과 식품 검역에서 규제를 완화하자고 강력히 주장했다. 구제역이나 광우병 파동이 있는 식품도 ‘자유 교역’ 이름 아래 무차별적으로 수입해 소비하라니 끔찍한 일이다.
그리고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에서 아셈 회원국 간의 협력을 다지는 방안들이 거론되었다. 한국 처지에서는 한국과 유럽연합, 한국과 아세안 사이의 관계를 더욱 확대하고 한·중·일 간의 경제 협력도 더욱 강화하기로 했다. 그러나 자유 무역과 이윤 극대화를 기치로 움직이는 세계무역기구 체제에서의 부분적인 협력 강화란 또 다른 지역 경제 블록을 형성하는 데 불과하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그 블록 안에서 더욱 자유로운 자본 운동과 더욱 억압적인 노동 상황이 출현함을 의미한다. 이미 아셈이 ‘아래로부터의’ 운동이 아님은, 시민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진행된 ‘홀·짝수 차량 운행제’나 ‘노점상에 대한 대대적 단속’에서 증명되었다. 또한 정상회담의 언저리에서 진행된(때로는 정상회담 자체를 반대하는) 세계 시민들의 ‘아셈 NGO 회의’는 그 자체로, ‘아래로부터의 아셈’은 다른 곳에 있음을 알려주었다.

시애틀·워싱턴·방콕·다보스·서울 등 지금까지 굵직굵직한 국제 회의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 추진이 논의될 때마다 아래로부터의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는 것은, 개방·탈규제·민영화·유연화를 축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결코 풀뿌리 민중의 소망을 실현시켜줄 수 없기 때문이다. 전세계 풀뿌리 민중의 소망은 예나 지금이나 ‘차별이나 억압 없이 더불어 건강하고 여유롭게 사는 삶’이다. 우리가 위로부터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것은 이것이 빈부 격차와 고용 불안 심화, 이윤과 억압 강화, 생존 경쟁으로 인한 건강과 공동체 파괴 등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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