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 위기설의 진상
  • 장영희기자 (mtview@sisapress.com)
  • 승인 2000.05.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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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그룹, 유동성 위기설로 곤욕…'현대식'구태 경영이 불신 불러
주식 시장을 강타한 ‘현대 쇼크’가 진정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시장에서는 일단 현대를 믿어보자는 기운이 승하다. ‘현대와 대우는 다르다’는 투자자의 판단이 시장에 점차 확산되고, 한 거대 재벌 문제가 다시 한국 경제를 뒤흔드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결합해 시장은 빠르게 냉정을 되찾았다. 여기에는 당사자인 현대의 대응도 영향을 미쳤지만 무엇보다 정부와 주채권 은행의 긴급 진화 작전이 주효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현대가 유동성 위기에 휩싸일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 이헌재 재경부장관은 현대는 (대우와 달리) 돈을 벌고 있는 회사가 여럿 있으며 자력으로 현금 흐름을 해결할 능력을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외환은행은 시장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더 구체적인 자료를 내보였다. 만프레트 드로스트 부행장은 “현대의 1999년 말 금융기관 차입금 37조5천억원 가운데 1년 미만 단기 부채는 15.7%에 불과하며 외국 차입금도 대우에 비해 절반도 안된다. 또 은행 예금 3조원 등 동원 가능한 돈이 5조원 이상이며 올해 큰 폭의 영업 이익도 기대된다”라고 밝혔다. 현금 흐름이 좋아 유동성 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주장이다.

한때 ‘현대 위기설’로 치달았던 이번 사태의 도화선이 된 것은 현대투자신탁증권이었다. 정부의 투신사 공적 자금 투입 방침에서 현대투신이 배제되면서 현대투신의 부실을 이 회사의 대주주인 현대전자(27.60%)와 현대증권(24.22%)이 메울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일부 투자자들이 이들 주식을 팔아치우기 시작했다. 이 투매 불길이 급속히 그룹 차원으로 옮겨 붙은 것이다.


위기설 불씨는 현대투신증권

화들짝 놀란 정부는 바로 전날의 입장을 뒤집으면서까지 자금 지원(증권금융채 발행)을 약속했고, 당사자인 현대투신도 이른바 ‘경영 정상화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여진은 계속되고 있다. 현대측의 경영 정상화 계획이 실효성이 낮다는 지적이 많은 것이다. 이 회사 이창식 사장은 △올해 외자 2천억원을 유치하고 △2002년에 4천억원을 증자하며 △2001∼2002년 자회사인 현대투신운용(95%)을 코스닥 시장에 등록해 총 7천억원을 조달하면 자본금을 2조7천억원대로 확충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부실의 깊은 수렁에 빠진 회사에 선뜻 돈을 댈 외국 투자자가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 무엇보다 두 해 동안 총 7천억원을 조달하려면 현대투신운용의 주가가 4만원이 되어야 하는데 이를 시장이 인정할지도 의문이다. 올해부터 2002년까지 영업 이익을 1조4천억원 내겠다는 계획이 지나치게 낙관적 수치라는 주장도 나온다.

설령 이 모든 계획이 현대가 계획한 대로 순조롭게 이루어진다 해도 3조2천8백억원에 달하는 연계 콜(고객 재산을 담보로 하여 빌려 쓴 단기 차입금) 문제는 고스란히 남는다. 현대측은 연계 콜 해소 시점을 2003년 말까지 늦추어주거나 그렇지 않으면 정부로부터 2조원을 긴급 수혈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연계 콜 해소 시점을 미루는 것은 어려울 전망이다. 정부가 국제통화기금에 올해 말까지 해소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조원을 정부가 지원해야 급한 불을 끌 수 있다는 것인데, 정부의 입장은 ‘그럴 용의는 있지만 조건이 있다’이다. 현대측의 강도 높은 자구 노력이 앞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최근 갑작스럽게 불거진 사안이 현대 오너 일가의 사재 출연 문제이다. 물론 정부 관계자들은 현대에 그런 요구를 한 적이 없다고 부인하고 있다. 이헌재 장관은 “정부로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다”라면서도 현대가 ‘현명하게’ 해결할 문제라며 여운을 남겼다. 정부 일각에서는 더 노골적인 사재 출연 요구가 흘러 나오고 있다. 재경부의 한 국장은 “정부가 ‘주인 있는 회사’인 현대투신에 특혜 시비를 무릅쓰고 자금을 지원하려면 명분이 필요하다”라고 밝혔다. 명분이란 물론 오너 일가가 사재를 출연해 부실을 메우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이에 대해 현대 이영일 PR사업본부장은 “검토하고 있지 않다”라고 짤막하게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오너 일가가 예금 또는 부동산을 처분해 주력사에 출자하는 형태로 사재를 출연해 왔다며, 현대투신에 출연하는 것은 책임 경영 취지에도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현대 내부에서는 정부가 당연히 자금을 지원해주어야 한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이런 주장의 근거로 정부가 1997년과 1998년 국민투신과 한남투신을 반강제로 떠안김으로써 부실의 원인을 제공한 ‘원초적 잘못’을 거론하고 있다. 어쨌든 사재 출연 문제는 현대투신 처리가 확정될 때까지 시장에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현대는 위기 국면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가 우세하다. 시장의 기저에는 여전히 현대를 불신하는 시각이 불식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가 시장의 환심을 사지 못하는 이유는 크게 두가지다. 우선 현대는 전문가들로부터 여전히 부채가 많으며 구조 조정이 외화내빈이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현대가 지난 두 해 동안 대대적으로 ‘부채와의 전쟁’을 벌인 것은 사실이다. 1998년 기아자동차와 LG반도체를 인수하면서 부채가 한때 78조3천억원으로 치솟았으나 1998년말 61조5천억원 수준으로 줄였고 지난해에는 다시 52조6천억원으로 감축하는 데 성공했다. 부채 비율을 200% 이하로 줄이라는 정부의 요구도 거셌지만, 현대를 수상쩍게 보는 국내외 금융 시장의 시각이 현대로서는 더욱 위협적이었던 것이다. 최근 주가 폭락 사태가 터지자 현대가 서둘러 올 9월까지 부채 규모를 31조4천억원 수준으로 줄이겠다고 약속한 것도 현대가 아직 안전 지대에 있지 않다는 시장의 불안감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뼈를 깎지 않은’구조 조정이 화근

문제는 현대가 그동안 부채 비율(181%)을 축소해 온 방식이 자산을 팔아 빚을 갚기보다 유상 증자를 통한 방법이 훨씬 많았다는 사실이다. 현대는 지난해 무려 13조9천억원의 유상 증자를 했다. 유상 증자를 통해 자본금을 늘려 부채 비율을 떨어뜨린 것은 가공 자본일 뿐이라고 폄하하는 지적이 많다. 계열사 가운데는 연이은 주가 폭락으로 사실상 ‘부도 주식’이 적지 않고 이로 인해 현대의 시가 총액이 삼성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은, 과도한 유상 증자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한마디로 현대는 덩지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부채가 가장 많아 아직 재무 구조 악화의 악령에서 완전히 탈출하지 못한 상태다.

이보다 현대가 시장의 불신을 자초하는 치명적 결함은 지배 구조에서 나온다. 오너 일가가 경영을 좌지우지하는 이른바 ‘황제식 경영’이 바로 그것이다. 이용근 금융감독위원장은 이번 현대 사태의 본질을 이렇게 규정했다. “현대 사태의 배경에는 재벌 오너의 황제식 경영과 형제간 경영권 다툼 등 지배 구조의 불투명성에서 말미암은 시장의 불신감이 짙게 깔려 있다.”

물론 현대는 그동안 상당수 계열사가 절반 이상 사외 이사를 선임했고 감사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경영 투명성을 강화하는 조처를 취했다고 거듭 밝혀 왔다. 올 5월 금융 계열사 주주총회에서도 지배 구조 개선 조처를 할 것이라는 약속도 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시장 관계자들이 현대의 이같은 약속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현대의 진의를 의심케 하는 사건들이 심심치 않게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지난해 현대증권의 주가 조작 사건과 최근 참여연대의 바이코리아펀드 편·출입 폭로 사건으로 현대는 금융 시장에서 신뢰를 잃었다. 지난 3월 정몽구·정몽헌 회장의 경영권 다툼은 현대가 얼마나 구태의연한 지배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지를 널리 알렸다. 이뿐만 아니라 현대의 주주들로서는 현대의 ‘참을 수 없는 무신경’이 또 있다. 다른 재벌들보다 기업 설명 활동(IR)에 훨씬 소극적이라는 것이다.

한국금융연구원 최공필 선임연구위원은 “그동안 주주보다 오너의 이익에 충실해온 경영 방식이 투명성을 해치고 시장의 불신을 키워왔다”라고지적했다. 증권업계의 한 관계자도 따끔한 충고를 잊지않았다.“이번 현대 사태는 시장이 과민 반응한 탓도 있지만 현대가 자초한 측면이 더 크다. 주주를 무시하면 시장은 반드시 보복한다.”

올해 매출 1백9조원, 순익 4조5천억원을 목표로 하는 한국 최대 재벌이 시장 불신이라는 치명적 덫에 걸려 있는 것이다. 환골탈태하는 자세로 투명 경영을 하는 것만이 현대가 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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