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 “사랑해요! 대주주”
  • 장영희기자 (mtview@sisapress.com)
  • 승인 2000.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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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화학, 오너 일가 보유 비상장 주식 대거 매입…소액주주 ‘손해’
LG그룹의 대표적인 캐시카우(자금줄)인 LG화학이 최근 구자경•구본무 씨 등 그룹 오너들이 보유하고 있던 비상장 계열사 주식을 대거 사들여 말썽을 빚고 있다. 이 거래에 대해서는 외국인은 물론 좀처럼 공개 행동을 하지 않는 기관 투자가들도 거세게 반발하는 등 파문이 날로 확대되고 있다.

LG화학은 4월4일 구본무 그룹 회장 등 특수 관계인 25명이 갖고 있던 LG유통 주식 1백64만5천주를 주당 15만원에 2천4백67억5천만원 어치를 사들였다. 같은 날 구자경 명예회장 등 특수 관계인 27명이 소유한 LG칼텍스정유 주식 1백18만주도 주당 11만원에 1천2백98억원어치를 매입했다. 이 회사는 단 하루 사이에 지난해 영업 활동을 통해 벌어들인 순이익(3천6백77억원)보다 많은 돈을 대주주들이 보유한 계열사 지분을 사들이는 데 쓴 것이다. 1999년 순이익이 1998년보다 무려 7배나 늘어난 사상 최고치를 기록해 주가 상승을 잔뜩 기대했던 LG화학 소액 주주들로서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격으로, LG 대주주에게 농락당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다.

이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자 시장은 응징 조처를 취했다. 주가 하락으로 보복한 것이다. 당초 LG화학이 증권거래소에 공시한 날은 4월4일. 그런데 이 사실은 즉각 시장에 알려지지 않았다. LG화학측이 4월4일 오후 6시가 넘어서야 공시해 이 날 주가에 반영되지 않았을 뿐더러 다음날은 공휴일(식목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LG화학은 날짜 택일에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주가에 미칠 악영향을 고려해 ‘당일 장이 끝난 후 다음 장이 열리지 않는 날’이라는 절묘한 시점을 택한 것이다. 숨을 끊어놓기는 했지만 다소 영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었던 4월6일과 7일에도 시장에는 ‘성도이앤지 공매도 사건’이라는 대형 악재가 터져 LG건은 시장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

그러나 LG가 끝내 ‘시장의 분노’를 비켜가지는 못했다. LG측의 수상쩍은 거래 사실이 처음 시장에 알려진 것은 4월10일. 이 날 종합주가지수는 32.79포인트나 올랐지만, LG화학은 거꾸로 크게 떨어졌다. LG화학 주가는 4월 내내 고전을 면치 못했다. 특히 외국인 투자자들은 4월12일부터 28일까지 단 이틀을 빼고 연일 순매도에 나서 1백86만주나 팔아 치웠다. 지분율을 1.91%나 떨어뜨린 것. 외국인 매도 공세로 LG화학 주가는 이 기간에만도 21.3%나 떨어져 4월28일 한때 연중 최저치(2만3천8백원)를 기록했다(도표 참조). 외국인들은 LG전자에도 철퇴를 내렸다. 4월11∼28일 2백27만5천주를 팔아치우면서 지분율을 2.0%포인트나 낮추었다. LG전자가 4월4일 LG유통 주식을 23만5천주(3백53억원어치) 사들인 데 대한 응징이었다. 이 출자 소식은 4월6일에야 공시되었다. 기관투자가, 재발 방지 약속과 피해 보상 요구

보유량의 일부를 팔아 치웠다고 밝힌 한 펀드매니저는 “외국인 못지 않게 기관 투자가 역시 주주를 무시한 LG측의 행위에 분노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이 펀드매니저는 4월 장이 강세장이었다면 실망 매물이 훨씬 많이 나왔을 것이라고 보았다. 또 LG화학이 시가 총액 상위 종목으로 종합주가지수를 따라가는 인덱스 펀드에 대거 편입되어 있어 그나마 주가 하락 폭이 적었다는 주장이다.

증권업계 관계자들이 한결같이 LG 건에 비판적인 이유는 단순하다. LG화학이나 LG전자가 결국 회사 이익을 회사 밖으로 유출함으로써 기업 가치를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한 증권사 임원은 “LG화학은 회사 이익을 생명공학이나 2차 전지 사업 같은 성장 분야에 투자해야 당연한데도 무수익 자산인 유가증권에 대규모 투자했다. 경영 논리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며 주주 이익 극대화에 명백하게 반하는 행위라고 질타했다. 따라서 이같은 결정을 내린 LG화학 이사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심지어 ‘도둑질’ ‘범죄 행위’라고 비난하는 증권 전문가도 없지 않다. 회사 이익을 대주주에게 빼돌렸다는 점에서 도둑질과 진배없으며, 미국 같으면 LG측이 당장 소액 주주들로부터 소송을 당하고도 남을 범죄 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LG화학측은 이번 거래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자산 가치와 수익 가치라는 상속세법상 산출 근거에 따라 매입 가격을 정했고 이사회 승인 절차를 거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관 투자가를 대표한 한국투신이 유가증권 인수에 관한 규정에 따라 분석한 결과 LG칼텍스정유는 8만~9만원, 유통은 9만~10만원으로 평가되었다며, LG화학이 거래를 취소하거나 피해를 보상하지 않을 경우 모종의 조처를 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거래 목적에 대해서도 LG화학은 ‘안정적인 원료 확보’(LG칼텍스정유)와 ‘대규모 유통망을 이용한 전략적 관계 설정’(LG유통)을 위해 지분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한 자산운용사 임원은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미 너무나 협조가 잘되는 계열사들인데, LG화학이 LG칼텍스정유와 LG유통 지분을 무려 31%, 50%나 보유할 필연성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소액 주주 이익보다 대기업 이해에 영합해 왔다는 곱지 않은 소리를 듣던 기관 투자가들조차 대형 고객인 LG측에 정면 반발하는 배경에는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분노도 깔려 있다. LG측이 수차례 ‘전과’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LG화학은 지난해 6월 LG칼텍스정유의 최대 주주인 허창수씨 및 특수 관계인 지분 1백40만주를 주당 9만7천원에, 12월에는 구본준씨 외 30명과 LG상사 보유 지분 1백67만주를 주당 10만원에 매입했다. 두 차례 거래에 LG화학이 지불한 돈은 각각 천억원과 1천6백74억원. LG전자 역시 대주주들의 주식 매입 창구로 동원되었다. 지난해 6월과 12월 구본무•구본길 씨 등이 보유했던 LG유통 주식을 각각 6백10억원(주당 18만5천원, 32만9천주), 1천8백33억원(주당 13만원, 1백41만주)어치 사들인 것이다.

LG 대주주들은 지난해 6월부터 최근까지 10개월간 9천억원이 넘는 현금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회사 이익을 유출했다는 비난을 받을 것이 불보듯한데도 LG측이 대주주와의 거래를 잇달아 강행한 데에는 무슨 절박한 이유가 있는 것일까. 우선 제기되는 것은 지분 정리설. LG는 삼성이나 SK 같은 재벌에 비해 지분 정리가 거의 되어 있지 않다. 아직까지 구씨와 허씨 간 지분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지금도 지주 회사 성격을 갖고 있지만, LG화학과 LG전자를 명실상부하게 그룹의 화학과 전자•정보통신 회사들을 거느릴 지주 회사로 자리매김하도록 하는 차원이라는 것이다. 현금 확보 배경으로 빅딜설 제기하기도

롯데그룹과의 빅딜설도 제기된다. LG가 LG유통과 LG백화점 등 그룹내 유통 부문을 롯데에 넘기고 롯데그룹은 호남석유화학을 LG에 넘긴다는 것이 빅딜설의 골자다. LG 대주주들은 빅딜의 대가로 상호 주식 맞교환을 하겠지만 이와 함께 현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두 그룹간 빅딜설에는 꽤 설득력 있는 정황 근거가 제시된다. LG는 우량 기업인 호남석유화학을 얻음으로써 화학•정유간 완벽한 수직 계열화로 상승 효과를 기대할 수 있고, 롯데 역시 유통 부문의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는, 이른바 ‘윈윈’ 전략이라는 것이다. 물론 두 그룹 관계자는 빅딜설을 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LG 구조조정본부 관계자는 “정말 터무니없다. 호남석유화학 인수 건은 부인 공시도 냈다”라고 밝혔다.

또 다른 빅딜설도 있다. LG가 한솔엠닷컴 인수와 관련해 LG유통과 LG홈쇼핑 등을 한솔그룹에 넘기려 한다는 것이다. 하나로통신이나 파워콤 지분 인수와 관련해 현금이 필요한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된다. 올 연말에 사업자가 선정될 IMT2000 사업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것은 물론 정보 통신 분야 강자를 노리는 LG에 반드시 필요한 기업들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그 목적이 어디에 있든 간에 1998년부터 LG화학과 LG전자라는 상장사들이 LG 대주주들의 필요에 의해 동원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회사의 부가 유출되었다는 것은 정당하게 받아야 할 배당 몫이 줄고, 주가가 떨어지거나, 적어도 더 올라야 할 주가가 오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투자자들의 원성을 살 수밖에 없는 일이다. 한 펀드매니저는 “LG화학과 LG전자가 좋은 회사인 것은 틀림없지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미련 없이 주식을 몽땅 팔아치울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물론 LG화학측은 이번 거래의 정당성에 대한 적극 해명에 나섰다. ‘업종 전문화’를 위해 관련 회사 지분을 늘릴 필요가 있었지만, 앞으로 비관련 지분은 정리함으로써 미래 불확실성을 제거하겠다는것이다. 또 피해 보상 요구를 의식한 듯 기업 설명 활동(IR)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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