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서 신세 뒤바뀐 해태와 롯데
  • 나권일 기자 (nafree@sisapress.com)
  • 승인 1999.12.2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해태그룹 부도로 30년 라이벌 관계 깨져…롯데, 국내 음료 시장 장악할 가능성
롯데와 해태는 국내 제과·음료 업계의 30년 맞수다. 해태의 ‘브라보콘’과 롯데의 ‘월드콘’, 롯데의 ‘델몬트’와 해태의 ‘선키스트’ 주스, 해태의 ‘아카시아’와 롯데의 ‘쥬시후레쉬’ 껌은 시장을 양분하며 팽팽한 경쟁을 벌여왔다. 해태제과를 모기업으로 하는 해태는 광주 광산 출신인 고 박병규씨가 호남 연고인 민족 기업을 표방하며 창업했고, 롯데는 영남 출신인 신격호 회장이 일본에서 성공한 뒤 제과·음료와 함께 백화점 등 유통업에 주력해 왔다.

재벌 그룹으로 성장한 롯데와 해태의 대결 의식은 82년 프로 야구가 출범하면서 더 깊어졌다. 해태 타이거스와 롯데 자이언츠는 제과업계의 맞수로서, 때로는 광주와 부산, DJ와 YS 의 정치적 고향이라는 상징성으로 지역 주민까지 가세하며 90년대까지 라이벌 관계를 유지했다.

프로 야구는 롯데와 해태의 라이벌 의식을 부추겼고, 경쟁은 음료 부문의 ‘봉봉’(해태)과 ‘쌕쌕’(롯데), ‘갈아 만든 시리즈’(해태)와 ‘사각사각 시리즈’(롯데)에 그치지 않고 전자(해태전자와 롯데전자) 유통(해태유통과 롯데쇼핑) 광고(코래드와 대홍기획) 업종으로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나 롯데와 해태의 승부는 97년 11월 해태그룹이 부도를 내자 급격하게 롯데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해태그룹의 15개 계열사 가운데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는 기업은 현재 그룹의 모기업인 해태제과와 해태 타이거스뿐이다. 해태제과는 채권단의 출자 전환으로 다시 정상 도약을 모색하는 처지이고, 해태 타이거스는 부도 여파로 이종범·임창용 선수에 이어 최근에는 이강철 투수까지 떠나고 말았다(77쪽 상자 기사 참조).
롯데백화점, 광주에서 승승장구

반면 롯데자이언츠는 97년 해태 부도 이후 해태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 내리 2년간 우위를 보였고, 올해는 드림리그 1위까지 거머쥐었다. 롯데의 밀어붙이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지난해 9월 광주에 진출한 롯데백화점(점장 신 헌)은 개점 9개월 만에 광주 지역 매출액 1위를 기록하면서 호남의 안방인 광주의 유통업계를 점령했다. 광주롯데백화점에 따르면 지난 1년 동안 백화점을 찾은 사람은 연인원 6백60만명. 광주시민 1인당 평균 5회씩 방문한 셈으로, 하루 평균 한 사람이 3만8천원어치를 구매한 것으로 나타났다. 부산을 연고로 하는 롯데백화점이 호남의 안방인 광주에서 호남 사람이 가장 많이 찾는 백화점이 된 것이다.

광주롯데백화점의 한 관계자는 “식품매장에서 해태제과·해태냉동·해태유업의 2백20여 품목을 납품받아, 롯데 제품과 함께 똑같은 면적에서 판매하는 지역 친화 경영 전략이 빛을 발한 것 같다”라고 분석했다.

희색이 만면한 롯데와 달리 부도 이후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해태는 최근 해태음료까지 롯데가 주도적으로 참여한 컨소시엄에 매각됨으로써 심한 ‘허탈감’에 빠졌다. 이제는 브랜드까지 경쟁 상대였던 롯데에 넘겨주는 상황이 된 것이다.

부도 이후 주인을 찾지 못했던 해태음료의 주 채권단인 조흥은행은 지난 2일 해태음료를 일본 히카리 인쇄그룹(지분율 51%)과 아사히 맥주 그룹(20%), 롯데호텔(19%), 미쓰이 상사(5%) 등 5개 사의 컨소시엄에 3천85억원에 매각했다. 일본 히카리 인쇄그룹을 주축으로 한 컨소시엄은 해태음료를 인수한 뒤 발표문을 통해 해태음료의 상호와 브랜드를 그대로 유지하고, 전 종업원 고용 승계와 납품 업체 현행 유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롯데칠성음료가 시장의 33%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롯데 계열사가 시장 지배력 2위인 해태음료까지 장악하게 되면 국내 음료 시장을 독점하게 되기 때문에, 롯데 컨소시엄이 해태음료를 인수한 것이 독과점을 금지한 공정거래법에 위반된다는 주장이 일고 있다. 왜냐하면 히카리 인쇄그룹이 일본 롯데에 납품하는 업체인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롯데호텔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롯데는 지분율 순위 세 번째의 주주일 뿐이다. 경영은 대주주인 히카리 인쇄그룹이 이사회를 구성해 맡게 될 것이다”라며 독과점 우려를 일축했다. 그런데도 해태음료를 인수함으로써 음료 내수 시장 60%와 과일 주스 시장의 90%를 장악할 가능성이 커진 롯데에 대한 독과점 우려는 가라앉지 않고 있다.

롯데, 음료 시장 장악하면 해태제과도 타격

전통적인 라이벌 관계는 퇴색하고, 주력 사업이던 음료 부문을 경쟁자인 롯데에 매각하게 된 해태 사람들의 심정은 착잡하다. 해태그룹 홍보실의 한 관계자는 “선키스트나 봉봉 등 해태 음료의 브랜드 가치는 전혀 무시하고, 채권단 마음대로 헐값에 팔았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롯데가 음료 시장을 장악하게 되면 유통 단계가 비슷한 제과업도 타격을 받을 수 있다”라며 파장이 해태제과에까지 미칠 것을 우려했다. 지난해 6월 송대관·안문숙 씨 등 연예인과 함께 해태살리기운동본부를 결성한 개그맨 겸 MC 김병조씨는 “딸을 시집보내는 친정아버지 마음처럼 서운함을 느낀다. 거기(롯데) 가서도 잘 살아줬으면 하는 바람이다”라며 안타까워했다. 반면 광주에서 해태음료 대리점을 운영하는 한 업자는 “서로가 출혈 경쟁을 벌여왔기 때문에 대리점으로서는 더 좋은 일일 수 있다”라며 환영 의사를 나타냈다.

결국 앞서거니 뒷서거니 서로 라이벌 관계를 유지해온 제과·음료 업계의 맞수 롯데와 해태의 경쟁은 롯데의 승리로 끝날 가능성이 높아졌다. IMF 2년이 가져온 변화는 30년 라이벌의 지형까지 바꾸어 놓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