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삼성은 지금 선거 운동중?
  • 張榮熙 기자 ()
  • 승인 2000.03.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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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에 때 이른 ‘선거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법정 기간(3월28일부터)이 아직 멀었는데 웬 선거운동? 다름 아닌 개포1동 주공아파트 재건축 수주를 둘러싼 현대와 삼성의 경쟁 양상이 마치 선거판을 방불케 하고 있는 것이다. 아파트 곳곳은 양사의 현수막과 캠프로 점령되어 있다. 어깨띠를 몸에 두른 양사 선거운동원(홍보맨)들은 유권자(조합원)만 나타났다 하면 우루루 몰려가 ‘○○입니다’를 외치며 ‘한 표’를 부탁하느라 여념이 없다. 무차별하게 홍보물·전화·방문 공세를 펼치는 것은 기본. 인근 상가에 자리한 ‘선거 사무실’에서는 매일매일 집중 공략할 대상이 정해진다. 유권자 성향을 분석하고 있다는 얘기다. 조합원 사이에서는 갈비 같은 향응 접대를 받지 못하면 팔불출이라는 말까지 나돌고 있다. ‘선거일’인 조합원 창립총회는 오는 3월18일.

현대건설·현대산업개발의 현대사업단과 삼성물산(주택·개발 부문)·대우의 삼성사업단이 펼치는 수주전은 날이 갈수록 정치판과 닮아가고 있다. 심지어 정치판의 이른바 ‘네거티브 전략’까지 동원되고 있다. 상호 비방전이 가열된 탓일까. 개포1단지 수주전은 최근 법정 공방으로까지 번졌다. 현대사업단은 3월7일 삼성측의 홍보 비디오물을 문제 삼아 서울지법에 ‘영상 녹화물 제작·복제·배포 및 상영 금지 등 가처분 신청’을 냈다. 이틀 후 현대산업개발은 단독으로 삼성물산을 서울지검에 고소했다. 신용 및 명예 훼손, 업무 방해 혐의다. 또 공정거래위원회에도 ‘시정명령 등 신청서’를 냈다.

현대는 왜 비즈니스를 법정으로 끌고 가려는 것일까. 삼성측은 4단지 주민들에게 배포한 홍보 비디오물을 왜 1단지 수주전에서 문제 삼느냐며, 현대측이 열세를 만회하려고 무리수를 둔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삼성측은 맞대응을 일절 삼가고 있다. 삼성물산 이상훈 사업부장은 “내부적으로 법률 검토는 끝냈지만 똑같은 방법으로 싸울 생각은 없다. 무엇보다 이런 진흙탕 싸움에 주민들이 식상해 있다”라고 밝혔다. 물론 현대측 주장은 다르다. 삼성이 법정으로 가야 할 만큼 심각하게 자신들을 비방하고 있어 제동을 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대는 삼성을 ‘반칙왕’이라고 몰아세우고 있다. 현대건설 변재진 상무는 “이 비디오는 단지 4단지용이 아니다. 무차별하게 현대 그 자체를 공격하고 있어 1단지에도 얼마든지 유용하다. 이번 조처는 삼성이 우리를 비방하는 데 대한 당연한 대응이다”라고 밝혔다.

현대가 이 비디오물에 대해 ‘열받는’것은 무리가 아닌 듯이 보인다. ‘법정(The Court)’이라는 제목의 삼성 비디오에는 현대를 자극할 소지가 많다. 가령 현대건설을 연상시키는 ‘근대건설’측 변호사는 거만하기만 할 뿐 삼성측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반면 삼성측 변호사는 종횡무진 법정을 휘어잡고 있다. 근대건설이 재건축한 아파트 주민을 불러내 근대측이 얼마나 약속을 지키지 않는 부도덕한 회사인지를 부각한다. 삼성 아파트에 사는 증인으로부터는 ‘어쩜 제 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처럼’아파트가 마음에 쏙 들며 삼성 아파트가 국내에서 가장 비싸다는 증언을 이끌어낸다. 이 홍보 비디오 말미에서 삼성측 변호사는 지난해 수주 실적과 분양 결과, 수상 실적 따위 각종 ‘과학적인’ 자료를 제시하며 “(근대측의 강점인) 전통과 과거가 뭐가 중요하냐. 주택이란 모름지기 미래를 내다보고 지어야 한다”라며 변론을 마친다. 이어 중립적이어야 할 재판장이 근대측 변호사의 이의 신청을 거푸 기각하며 “삼성 아파트가 재건축 분야 전문가임을 선언한다”라고 판결하자 방청객의 박수가 터진다. 이 비디오가 코미디라는 사실은 재판장이 삼성측 변호사를 살짝 불러 “이번에 프리미엄이 얼마나 될까”를 물어보는 장면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 비디오에 대해 삼성측은 공식으로는 ‘코믹하게 우리의 강점을 부각하려 했을 뿐 상대방을 비방하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들이 지나쳤다고 보는 삼성 관계자도 적지 않다. 그러나 삼성측은 비방으로 치자면 현대도 전혀 다를 바 없다고 응수한다. 가령 ‘현대산업개발이 지은 아파트는 현대 아파트가 아니어서 집값이 떨어질 것’이라는 삼성의 홍보 자료가 현대산업개발을 자극해 삼성을 고소하는 사태에 이르렀지만, 현대 역시 버젓이 자신의 홍보물에서 삼성을 비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와 삼성이 각각 상대방의 약점인 단일 브랜드·이주비·공사비 명목을 각자 유리하게 해석하며 상대방을 공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우롱, 얄팍한 눈속임, 소가 웃을 일, 부당 이득 편취 따위 자극적인 표현들이 양사 홍보물에 난무하고 있는 것도 틀림없다.

아파트 수주전을 둘러싸고 사업자간 경쟁이 불붙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개포 단지 싸움은 상궤를 훌쩍 벗어났다는 안팎의 곱지 않은 평가를 받고 있다.

현대와 삼성은 왜 이렇듯 ‘목숨을 걸다시피’ 치열하게 싸우는 것일까. 그것은 물론 개포 단지의 매력 때문이다. 개포 단지는 서울 강남에서 거의 마지막 남은 노른자위 땅으로 불리는 특급 요지다. 사업권을 따기만 한다면 한마디로 분양 걱정 끝이다. 삼성과 현대산업개발은 지난 2월 개포4단지 수주에서 그들이 약체라고 깎아내렸던 LG건설에 어이없이 당했다. 이들은 곧바로 전열을 가다듬어 1단지 싸움에 돌입했다. 현대산업개발은 한 식구였던 현대건설을, 삼성은 대우건설을 파트너로 끌어들였다. 삼성은 지난해 11월 개포 3단지 사업 역시 현대건설에 고배를 마셨기 때문에 더 몸이 달아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삼성은 오랫동안 전국적으로 아파트를 많이 지은 현대와 달리 서울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건설 역사가 짧다 보니 사놓은 땅도 별로 없어 재건축·재개발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처지다.

개포 단지 중에서 1단지가 가장 크다는 점도 경쟁을 격화시키는 요인이다. 무려 1조2천억원 공사여서 한 해 매출액이 왔다갔다하는 사업이다. 이뿐인가. 개포 1단지 공사를 수주했다는 사실은 줄줄이 사탕처럼 이어질 가락 시영·잠실·반포·고덕·암사 재건축 사업에도 큰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이런 개포의 상징성 때문에 양사가 사운을 걸고 경쟁을 벌이는 것이다.

삼성과 현대 중 누가 승자가 될 것인가. 일단 삼성이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합원들이 사업자를 선택할 때 가장 중시한다는 이주비 규모 면에서 삼성이 현대보다 천만∼3천만원(무이자 기준) 많기 때문이다. 이주비의 엄청난 위력은 실제로 증명된 바 있다. 4단지 수주전에서 LG건설이 강자인 두 회사를 꺾을 수 있었던 비결도 바로 막바지 ‘유세’에서 LG가 두 회사보다 2천만∼4천만원이나 많은 무이자 이주비 카드를 제시한 데 있었다.

이주비 액수가 ‘당락’ 좌우할 듯

그러나 사업자 처지에서 이주비는 고스란히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수천억원을 5∼6년 동안 이자까지 내가면서 묶어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당초 1단지 수주전에 참여했던 LG가 포기해 파트너인 대림산업을 곤혹스럽게 했던 것도 4단지에 이은 이주비 부담을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그래서 건설업계에서는 시공 능력보다 대규모 자금을 누가 얼마나 싸게 조달할 수 있느냐가 재건축 사업 추진의 관건이 된다고 보고 있다. 요즘 중·소형 건설업체가 특히 서울 지역 재건축 사업에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이유 역시 이미 조합원들의 기대 수준이 한껏 높아져 억대 이주비를 주지 않고서는 수주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형 건설사 역시 이런 이주비를 주고서는 이익이 아예 없거나 박할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출혈 경쟁이다.

개포 1단지 사업은 오는 3월18일 조합원의 투표로 당락이 결정되겠지만, ‘당선 무효 소송’에 휘말릴 공산이 적지 않다. 삼성 역시 순순히 승복하지 않겠지만, 현대는 단단히 벼르고 있다. 현대가 문제 삼는 것은 재건축 추진위원회(추진위)의 태도다. 아직 드러내놓고 의혹을 제기하지는 않고 있지만, 현대측은 추진위가 삼성을 봐주고 있다는 의구심을 내비친다. 가령 지난 2월14일 추진위가 양사에 ‘시공사가 조합이 제시한 사업 계획서 작성 기준을 임의로 변경할 경우 입찰 자격을 박탈하겠다’는 공문을 보내놓고도 이를 어긴 삼성의 자격을 박탈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가 특히 문제 삼는 것은 이주비 문제. ‘순진하게’ 조합 기준에 맞춘 현대와 달리 삼성은 천만∼3천만원을 더 써냈다. 이에 대해 장영수 추진위원장은 “삼성이 기준을 어긴 것은 맞다. 그러나 현대 역시 마찬가지다. 이주비에 적용할 금리 수준을 분명하게 밝히라고 요구했는데도 현대가 모호하게 ‘금융기관 변동 금리’라고 써온 것이 대표적이다. 사업참여계획서 제출 마감 시점에서 고민했다. 문제 삼는다면 양쪽의 자격을 모두 박탈해야 했다”라고 주장했다. 장위원장은 삼성을 제재하든지 아니면 삼성과 동등하게 이주비를 높이라고 자신들이 제시한 안을 인정하든지 양자 선택하라는 현대측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개포 1단지 사업은 11만평 부지에 들어서 있던 낡고 좁은 11∼18평 아파트(5천40세대)를 디지털 장비로 무장한 27∼56평 최첨단 아파트(7천7백37세대)로 바꾸는 사업이다. 일반 분양 물량은 2천7백 가구.

이 사업에는 세인의 흥미를 끌 요소가 적지 않다. 서울 사람이면 누구나 살고 싶어한다는 개포동에서 그것도 현대와 삼성이라는 강자가 싸우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개포 1단지 수주전은 10조원으로 추산되는 서울시 재건축 사업의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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