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가 경제 ‘함수 관계’ 풀이
  • 張榮熙 기자 ()
  • 승인 2000.0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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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전후 정치 불안으로 악영향… “정부가 여당에 휘둘리지 말아야”
경제는 국가의 체력이다. 그것이 약해지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정치는 체력을 어떻게 쓸 것인가 결정하는 지력(知力)이다.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진 격일까. 최근 삼성증권은,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분석 보고서라고 부를 수도 없는, ‘해외 투자가의 유형과 투자 행태’라는 이름의 문건 탓에 엄청난 홍역을 치르고 있다. ‘여당이 총선에 참패하면 외국인 투자자들이 대거 이탈할 수 있다’는 구절이 정치권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2월3일 여당이 이 구절을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해 맞장구 성명을 내자 야당이 발끈해 삼성증권 관계자들을 고소하는 사태에 이른 것이다. 야당은 어떤 노림수가 없다면 정치적 판단에 능한 삼성에서 이런 보고서가 나올 리 만무하다며, 여당·삼성 간에 검은 거래가 있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문건 소동에 대해 증권업계 관계자들은 한마디로 ‘웃기는 일’이라는 냉소적 반응을 보였다. 우선 8대 증권사들이 매주 돌아가며 여는 증권거래소 출입 기자들과의 간담회 자리에 배포한 이른바 ‘교육용’문건답게 문건의 수준과 내용이 평이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을 든다. 문제가 된 대목도 전체 외국인들의 의사를 대변했다고 볼 수 없어 신뢰도가 극히 낮다는 지적이다.

이렇듯 삼성증권 문건을 계기로 점화된 여야간 정책 논평전은 선거일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자극적이고 거칠어지고 있다. 어느 쪽이든 4·13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확보하기 위해 사생 결단을 벌일 기세다. 경제 정책에 관한 한 여당은 이승엽 부대변인이라는 신예 주자를 내세워, 야당은 중량급인 이한구 정책실장(전 대우경제연구소장)을 앞세워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선심이다” “아니다” 여야 거친 공방전

맨 먼저 불붙은 것이 선심 공방. 대표적인 것이 지난해 세금이 예상보다 더 걷혀 남은 세계 잉여금을 나라 빚을 갚는 데 쓰는 것이 바람직한지, 경제 위기 이후 생계 곤란에 빠진 서민층 지원에 쓰는 것이 합당한지에 관한 논란이다.

한나라당 이한구 정책실장은 “우선 집권 여당과 정부는 세계 잉여금을 최우선적으로 나라 빚 갚는데 쓰겠다는 약속을 저버렸다. 경제 위기 이후 가장 고통받은 중산층 이하 계층에 대한 지원을 늘리는 문제는 한나라당도 큰 관심을 갖고 있다. 문제는 지금 여당처럼 어떻게 재원을 마련하고 실행할지에 대한 고려 없이 선거를 의식해 불쑥 복지 수준을 임기 말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상위국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따위의 주장을 펴고 있다는 사실이다”라고 공격했다.

반면 여당은 왜 진작 중산층·서민 대책을 펴지 못했느냐고 비난하는 것은 감수할 수 있지만, 왜 지금 하느냐며 선심 대책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민주당 이승엽 부대변인은 “마치 의사에게 옆에 죽어가는 환자가 있는데 잔치(선거) 후에 치료하라고 주장하는 격이다. 빈곤층 대책은 한시도 늦출 수 없는 사안이다. 나라 빚도 당장 숨이 넘어가는 사람부터 살려놓고 나서 걱정해야 할 사안이다”라고 야당을 공박했다.

실제로 김대중 대통령은 지난해 광복절 기념사에서 운을 뗀 후 올해 들어 부쩍 빈곤 퇴치와 복지 대책을 강조하고 있다. 경제 위기 이후 소득 분배 구조가 악화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상대적 의미의 빈부 격차가 더욱 커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추진 방식이다. 김대통령은 신년사에서 여러 명분 있는 정책 공약을 쏟아냈다. 그런데 이 정책들을 실행하기 위해 지난해 말 통과된 2000년 예산 편성안을 어지럽게 헝클어 놓았다. 그 때문에 기획예산처는 황급히 추가 재원 규모를 파악하기 위해 야단법석을 떨어야 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2조7천억원. 이런 추진 방식은 대부분의 경제 전문가들로부터 재정 집행권을 남용하며 국회의 예산 심의권을 침해한다는 비판을 불렀다. 오로지 선거 때문이라고 몰아붙일 수는 없지만 선거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집권 여당의 서민층과 청년층(청년 실업 해소 대책), 노동자(스톡옵션 같은 성과 배분 제도)에 대한 잇단‘러브콜’이 실제로 표로 연결될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선거라는 정치 계절이 찾아오면 집권 여당이 선거에 유리하게 작용하도록 경제 정책을 활용 혹은 변용하려고 애를 쓴다는 사실이다. 야당 또한 현정권의 실정을 맹렬히 비난하며 유권자들에게 환영받을 만한 경제적 이슈를 발굴해 여당을 공격하려 든다. 이런 정치권 모습은 선거철에 예외 없이 볼 수 있는 낯익은 풍경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선거는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일반적으로 선거는 경제의 불확실성을 높여 안정 기조를 해친다는 것이 정설이다. 또 특별히 무리수를 두지 않더라도 어떤 문제가 발생할 때 근본 처방을 하기보다 증상을 누그러뜨리는 미봉책을 쓰거나 선거 이후로 미루는 경향이 짙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좋은 예가 의료보험 재정과 투자신탁사 부실 문제다.

선거와 거시 경제와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정치적 경기 순환론(PBC)’이다. 집권 여당은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선거 전에는 부양책을 펴 실업률을 낮추고 선거 후에는 강력한 긴축 정책을 실시해 인플레를 낮추기 마련이어서 선거를 주기로 하는 경기 순환이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가설은 미국과 달리 한국에서는 거의 적용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제 전문가들은 한국의 경우 미국처럼 집권당이 어떤 정책을 펴기 어려운 구조이거나 경제 구조의 변동성이 크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또 한국 정부가 너무 빈번하게 시장에 개입하기 때문에 선거 때에만 시장 개입을 하는 미국에 비해 효과가 나타나지 않거나 미미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선거가 경제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쳐온 것은 사실이다. 재정경제부가 1981년 3월 총선부터 1992년 2월 대선까지 여섯 차례의 선거가 경제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대체로 선거 전에 돈(총통화와 현금 통화)이 풀렸던 경향을 보였다. 이에 따라 인플레 기대 심리를 높였지만 선거 후 정부가 풀린 돈을 거두어들여 물가 상승세를 누그러뜨린 것으로 분석되었다. 산업 생산과 수출은 선거 운동원 유출, 선거일 휴무 등의 영향으로 선거 전에 감소했다. 그런데 이런 유형은 선거 당시 경기가 확장기냐 쇠퇴기냐에 따라 큰 차이를 보였다. 가령 경기가 가파르게 정점을 향해 치닫는 확장기 때는 언제 선거가 있었냐는 듯 산업 생산과 수출이 별 영향을 받지 않았고 소비도 늘어났으며, 물가 역시 선거 후에도 상승했던 것이다. 4·13 총선 의식해 경기 속도 조절 늦출 듯

삼성경제연구소가 1985년 2월 총선부터 1995년 6월 지방 선거까지 여섯 차례 선거를 분석한 결과도 비슷했다. 선거 전에 돈을 많이 풀었다가 선거 후 통화를 환수하는 현상은 특히 두 차례 대선에서 눈에 띄게 관찰되었다. 1992년을 빼고는 정부가 선거 전에 재정 지출을 크게 늘린 것도 확연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1980년대 선거에서는 돈과 사람을 선거에 대거 동원했고 지역 개발을 위한 선심 공약이 남발되어 물가가 불안해지고 땅값이 치솟았지만, 1990년대 들어서는 공명 선거 분위기 등으로 이런 부정적 영향이 크게 줄어들었다고 지적했다.

최근 금융연구원이 내놓은 ‘정치적 불안의 경제적 영향’이라는 연구에서는 선거로 인한 악영향이 좀더 뚜렷하게 나타났다. 1992년 3월 총선부터 1998년 6월 2차 지방 선거까지 여섯 차례 선거에서 선거 전후 3개월 동안 거시 지표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왼쪽 도표 참조). 가령 주가는 선거 3개월 전부터 떨어져 선거 2개월 후 서서히 충격에서 벗어났다. 금리와 부도율도 선거가 가까울수록 높아졌다. 특히 금리는 선거 1개월 전에 급등하는 유형을 보였다. 통화가 늘어난 것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렇다면 4·13 선거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이번 선거 자체가 과거에 비해 자금 살포 등으로 혼탁해질 가능성은 적다. 관건은 현재 경제 상황. 최근 삼성경제연구소의 분석에 따르면, 한국 경제는 1998년 8월 경기 저점을 통과한 후 V자형의 급속한 경기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경기 정점은 2001년 중반 이후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 경제가 후끈 달구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지난해 경제성장률이 무려 10.2%에 달하며 올해도 6%(정부 목표치)가 넘을 것이라는 전망에서도 잘 드러난다. 인플레 우려도 슬슬 고개를 들고 있다. 올 1월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6%나 오른 것이다. 이처럼 상당수 경제 전문가들이 과열을 걱정할 정도로 한국 경제는 경기 확장기에 깊숙이 들어서 있어 열기를 식히려는 정책 대응이 필요하지만 아직 그런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

경제 전문가들은 그것을 선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정부 역시 얼마간 긴축 기조로 선회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서도 선거에 악영향을 줄까 봐 선거 이후로 미루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최근 한국은행이 정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단기 금리를 0.25% 포인트 높였지만, 대부분의 경제 전문가들은 이를 경기 부양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긴축의 신호로 읽을 수 없다고 해석하고 있다(대우증권 신성호 부장). 이미 경기 확장기에 있고 지난해에 돈을 많이 풀었기 때문에 더 돈을 풀 유인은 적어 보인다. 하지만 재정 자금은 어떤 식으로든 대거 풀려나갈 공산이 적지 않다(한국개발연구원 심상달 선임연구위원).

정치권은 오직 선거 결과에 관심이 있겠지만 경제 전문가들은 선거 이후 상황을 염려하고 있다. 선거 전후 정치적 불안정성이 크게 높아지는 탓이다. 이런 불안정성은 경제 안정 기조를 일거에 헝클어뜨릴 수 있다. 가령 정치 영향을 많이 받는 구조 조정이 지연될 수 있다. 경제 상황이 좋아 보일수록 구조 조정을 게을리할 개연성은 커진다. 금융연구원 최공필 선임 연구위원은 “선거 관련 불확실성은 대외 취약성을 높인다. 이럴 때일수록 금융기관의 건전성 같은 기초 세력을 튼튼히 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제2의 경제 위기가 엄습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라고 경고했다.

선거에 미쳐 돌아가는 정치권은 어쩔 수 없다 해도 정부가 바짝 정신을 차려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정부는 여당의 요청을 물리치지 못하고 있다는 의심을 한껏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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