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 ‘순풍’ 타고, 금융 ‘폭풍’ 맞고
  • 장영희기자 (mtview@sisapress.com)
  • 승인 2004.01.0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가총액 변동으로 본 ‘1987~2003년 한국 대표 기업 변천사’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량 기업을 평가하는 잣대로 시가총액만큼 유용한 것이 또 있을까. 수익성·안정성·성장성 등 기업의 모든 것에 대한 주식 시장 참여자들의 최종 평가가 주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기업의 시가총액은 주가에다 그 기업이 발행한 총주식수를 곱한 것. 따라서 시가총액은 곧 시장의 평가이다.

1987년 말부터 2003년 말까지 15년간 한국 증시의 시가총액은 26조원에서 3백55조원으로 급증했다. 15년 만에 덩지가 13배 이상 불어난 것이다. 2003년 말 현재 시가총액을 기준으로 한 한국 주식 시장의 규모는 세계 16위(1~4위는 미국 뉴욕증권거래소, 미국 나스닥시장, 일본, 영국). 그런데 이 기간에 한국 기업은 엄청난 지각 변동을 겪었다. 증권 업계 관계자들조차 불과 15년 만에 나타난 변화라고는 믿기지 않는다고 반응할 정도다. 그만큼 부침이 극심했던 것이다.

한국증권거래소가 시가총액 기준으로 기업 순위를 매기기 시작한 것은 1987년 말. 이 때 시가총액 상위 15개 기업 가운데 2003년 말 현재 15위 안에 들어 있는 기업은 삼성전자·LG전자(옛 금성사)·현대자동차, 이렇게 단 3개 사뿐이다. 현재 증권거래소에는 7백여 종목이 상장되어 있는데 시가총액 상위 15개 사는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이자 우량 기업의 대명사라고 볼 수 있다. 한화증권 이종우 부장은 “15년 사이에 우량 기업조차 순위가 급변했다는 사실은 기업들이 그만큼 구조적으로 취약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한국 기업들을 고위험군으로 분류할 수밖에 없다”라고 지적한다.
지난 15년간 특징은 수출과 정보기술(IT) 관련 주가 떠오르고 내수와 은행 주가 퇴조한 것이었다. 은행주는 1997년 터진 경제 위기의 후폭풍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특히 부실 기업에 천문학적 대출을 해준 은행들이 철퇴를 맞았다. 1989년 말만 해도 4∼9위에 등재되었던 한일·제일·서울신탁·상업·조흥 은행이 15위권에서 탈락했다. 신한은행만이 13위로 겨우 명맥을 유지했을 뿐이다.

2003년 말 현재 15위권에 들어 있는 은행들은 두 가지 부류다. 하나는 이른바 국민과 주택 연합군인 국민은행이다. 두 은행은 각각 서민 대출과 주택 금융 위주의 영업을 했던 터여서 부실 기업에 떼인 돈이 적었다는 공통점이 있어 우량은행 조합이라고 불렸다. 또 하나는 조흥, 한빛(한일+상업), 서울 등 다른 은행을 인수해 덩지를 불리거나 이름을 바꾼 은행 혹은 금융지주회사들로, 신한과 우리금융지주(12위), 하나은행(15위)이 여기에 해당한다.

금융주 가운데 증권주도 비운의 주인공이었다. 1987년 말 각각 11위와 14위에 올랐던 대우증권과 럭키증권(현 LG투자증권)은 2003년 말 67위와 54위로 크게 밀려났다. 특히 업계 1위였던 대우증권은 대우그룹이 1999년 공중 분해되면서 현재까지도 인수 대상자를 찾지 못하는 등 나락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순위 등락 최대 키워드는 ‘IT와 중국 특수’

1989년 말 11위였던 종합상사 (주)대우도 대우그룹의 침몰로 채권단이 생살여탈권을 쥐는 처지에 내몰렸다. (주)대우는 채권단에 의해 대우조선·대우종합기계·대우인터내셔널이라는 세 회사로 분할된 후 혹독한 구조 조정을 겪었으나 이후 영업 이익을 내는 등 2003년부터 기사회생하는 조짐이 뚜렷하다. 대부분 재기에 성공한 대우그룹 계열사와 달리 옛 현대그룹 계열사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1980년대만 해도 10위권 입성을 엿보던 현대건설은 현재 77위로 추락해 있다. 하이닉스반도체도 D램 반도체 분야에서 수위를 지키고 있지만, 상위권에서 밀려난 지 오래다.

옛 현대그룹 가운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계열 분리된 현대자동차그룹이다. 3위에서 10위, 12위로 등락을 거듭하던 현대자동차는 기아자동차 인수와 수출 호조로 2003년 말에는 7위로 뛰어올라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 현대자동차 그룹의 지주 회사 구실을 하는 자동차 부품회사 현대모비스(11위)도 현대·기아 자동차의 엄호를 받으며 약진하고 있다.

대우와 현대가 침몰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도 한층 입지를 다진 재벌이 삼성이다. 한국에서 재벌은 삼성이 유일하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삼성의 중핵 기업인 삼성전자는 모든 기업을 통틀어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를 보인 기업으로 꼽힌다. 1987년 말 10위였던 삼성전자(4천4백89억원)는 2002년에 이어 2003년 말에도 1위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삼성전자는 1990년대에 급성장한 대표 기업으로 1999년 말 시가총액 1위였던 KT(옛 한국전기통신공사)를 바짝 추격했다. 1980년대 결행한 반도체 투자가 1990년대 들어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이건희 회장이 1993년 주창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자’는 신경영이 주효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삼성전자의 시가총액 추이는 이 회사의 일취월장을 잘 드러낸다. 1987년 말 4천4백89억원에서 15년 만에 73조7천8백51억원으로 1백64배나 폭증했다. 같은 기간 시가총액 비중이 1.7%에서 무려 20.8%로 늘어났다. 바로 이 대목이 우려를 낳고 있기도 하다. 한국 경제의 미래가 지나치게 삼성전자의 진로에 연동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보 기술(IT)과 중국 특수’는 지난 15년간 기업 순위를 가른 키워드였다. 현대증권 정태욱 리서치본부장(상무)은 “삼성전자·LG전자·포스코·현대자동차·삼성SDI 등은 대표적인 중국 특수 수혜 종목인 데다 정보 기술을 접목해 기술 혁신을 일궈낸 기업들이다”라고 지적한다.
포스코는 이른바 굴뚝 산업의 대명사로 꼽히지만, 애널리스트들로부터 기술 혁신을 통해 기업 가치를 지속적으로 높이고 있는 기업으로 평가된다. 유선 통신망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가진 KT가 2001년 말부터 SK텔레콤이라는 무선 시장의 절대 강자에게 밀려났고, 1987년 말 1위였던 SK주식회사(옛 유공)가 2003년 말 21위로 추락한 것은 이변 중의 이변으로 꼽힌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