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연대·삼성, 최후 승자는?
  • 張榮熙 기자 ()
  • 승인 2000.05.25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주인수권 행사에 일단 제동… 발행 무효소송 ‘본게임’ 남아
삼성가(家)의 부와 경영권 세습에 제동이 걸리는가. 지난 5월9일 서울 안국동에 있는 참여연대 사무실에서는 아연 활기가 느껴졌다. 좌절을 거듭하던 삼성과의 법정 다툼에서 한 줄기 서광이 비쳤기 때문이다. 이 날 서울고등법원 민사12부(재판장 오세빈)는 3백21만7천주를 가진 대주주보다 단 10주를 가진 소액 주주의 손을 들어주었다. 삼성SDS의 신주인수권부사채(BW) 발행과 관련해 시민단체인 참여연대가 소액 주주를 대리해 제기한 신주인수권행사등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참여연대가 가처분 신청을 제기한 것은 지난해 12월1일. 참여연대는 올 2월22일 서울지방법원 1심 판결에서 패소했다. 재판부가 ‘절차적·형식적 요건에 하자가 없다’는 이유로 기각한 것이다. 참여연대로서는 1심의 뼈아픈 패배를 항고심에서 단단히 설욕한 셈이다. 이로 인해 삼성SDS의 BW를 인수한 이건희 회장의 자녀들인 재용·부진·서현·윤형 씨와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 김인주 전무는 본안 소송 판결이 날 때까지 신주 인수권을 행사하거나 처분 행위를 하지 못하게 된다.

이번 판결이 신청인측인 참여연대를 고무하고 여론의 비상한 관심을 끄는 이유는 법원의 판결이 재벌의 변칙 증여를 적극 척결하려는 의지를 보였다는 해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가처분 결정으로는 이례적으로 결정문에서 본안 판결의 쟁점 사안이 될 수 있는 이사회 결정의 위법성과 정관의 효력에 대해 ‘주주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상법 규정에 반하고 주주총회 결의를 누락하는 등 절차상 중대한 위법이 있다’고 못박았다.

물론 이제 겨우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졌을 뿐 참여연대의 갈 길은 멀고 험하다. 삼성측의 변칙 증여 시도 자체에 쐐기를 박으려면 4월29일 제기한 본안 소송인 삼성SDS BW발행 무효소송에서 승소해야 한다. 1심이 6월께 열릴 것으로 보이지만 1심 판결에 패소한 쪽이 승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양쪽의 법정 다툼은 장기화할 공산이 크다. 이 싸움이 어떻게 귀결될 것이냐 하는 분수령은 5월26일 열릴 삼성전자 전환사채(CB) 무효소송 항소심이 제공할 전망이다(참여연대는 1997년 6월24일 무효 소송을 제기했지만 그 해 12월17일 1심에서 패소했다). 이재용이라는 특정인을 위한 채권 발행이라는 점에서 본질이 똑같기 때문이다.

삼성 “적법한 거래… 여론 재판 억울”

삼성전자는 1997년 3월24일 널리 공개적으로 채권을 발행하는 공모 방식이 아닌 사모(私募) 형태로 CB 6백억원어치를 발행했는데, 이 가운데 4백50억원어치를 재용씨에게 넘겼다(나머지는 삼성물산에 매각). 이로 인해 재용씨는 삼성의 ‘중핵 기업’인 삼성전자의 4대 주주(0.78%)로 떠올랐다(올 4월 말 현재 0.77%). 현재 삼성전자의 재용씨 부모 지분율은 각각 2.02%와 0.72%에 이른다. 이를 합칠 경우 삼성물산(3.9%)에 이어 2대 주주로 뛰어오른다. 삼성SDS 역시 재용씨 등이 신주 인수권을 인정받게 되면 지분율이 현재 14.8%에서 32.6%로 크게 높아진다.삼성측은 위법 사실이 없다며 ‘여론 재판’이라고 억울해 하지만, 두 회사의 사채 발행 건이 줄곧 시비에 휩싸이는 것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 우선 공모 아닌 사모 방식을 취한 점. 증권거래법상 아무 규제도 받지 않는 삼성SDS 같은 비상장 법인은 말할 것도 없고 삼성전자 같은 상장 법인도 사모 형태로 CB나 BW를 발행하면 금융감독위원회에 유가증권 신고서를 제출할 의무가 없다. 특정인을 위한 거사를 쥐도 새도 모르게 해치울 수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소액 주주들의 권리가 보호될 리 만무하다. 실제로 삼성SDS BW건도 참여연대가 이같은 첩보를 입수하고 공정위와 금감위에 끈질기게 조사를 요청한 후 뒤늦게 전모가 밝혀진 것이다.

인수 가격에 대해서도 소액 주주들은 승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가령 삼성SDS가 BW를 2백30억원어치 발행하면서 책정한 3백21만7천주에 대한 1년후 주당 인수(행사) 가격은 7천1백50원. 물론 이 가격에 대해 삼성측은 상속세법상 보충 방법을 적용했으며 오히려 산출 가액에 20%를 얹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지난해 10월 공정위가 부당내부거래 조사를 하면서 삼성SDS 주식 가격을 1만4천5백36원으로 평가했다는 점. 상속세법상 비상장 주식의 평가 방법에 미래 수익 가치라는 요소를 가미해 산출했던 것이다.

이처럼 재벌 오너들은 비상장 법인의 경우 어떤 평가 방법을 적용하느냐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는 점을 악용해 가장 유리한 가격을 정하고, 시비가 일면 ‘적법하다’고 주장한다. 1995년 재용씨가 아버지로부터 60억8천만원을 증여받아 이 가운데 16억원을 증여세로 납부하고 44억6천만원을 종자돈으로 삼아 재산 증식에 나선 지 불과 4년 사이 2조∼3조원 재산가로 변신한 비결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비상장 법인의 주식을 싸게 사들여 이 회사들이 상장된 후 천문학적인 시세 차익을 챙긴 것이다. 경영권 대물림에 동원된 삼성 회사들은 에스원·삼성엔지니어링·중앙개발(현 삼성에버랜드)·제일기획 등이었다. 한 증권 전문가는 “1998년 말 삼성생명 주식을 주당 9천원에 사들인 삼성 오너들이 지난해 삼성자동차 문제가 불거지자 이 회사 주식을 주당 70만원으로 계산한 것은 가장 극명한 사례 아닌가”라고 꼬집었다.

참여연대 “삼성가 재산권·경영권 세습 좌시 못해”

참여연대는 4월 말 국세청에 재용씨 등에게 증여세 7백18억원을 추징하라고 요구했는데 삼성이 증여세 추징을 피하려고 노력한 것은 사실이다. 삼성SDS는 BW를 발행하면서 이를 곧바로 재용씨 등 특수 관계인에게 팔지 않고 SK증권과 삼성증권을 경유했다. 삼성SDS이 ‘최종 소비자’인 재용씨 등에게 바로 넘기지 않고 이같이 우회하는 복잡한 경로를 택한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BW 발행 법인의 지배 주주와 특수 관계에 있는 사람이 BW를 직접 인수하여 이득을 본 경우 증여한 것으로 보아 증여세를 과세한다’는 법 규정(상속·증여세법 42조2항)을 비켜가기 위한 것이다. 참여연대측 법률 대리인인 김진욱 변호사는 “참여연대가 증여세 추징과 무효 소송이라는 양동 작전을 쓰고 있지만, 더 역점을 두는 쪽은 무효 소송이다. 왜냐하면 특정인에게 사전 상속하는 것을 목적으로 다른 사람(소액 주주)의 재산을 빼앗는 행위여서 도둑질이나 진배없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사실 어렵사리 증여세가 추징된다고 해도 삼성 오너들이 얻는 이익에 비해 쥐꼬리에 불과하다. 증여세 추징이 도리어 삼성측에 면죄부를 주게 된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삼성전자와 삼성SDS 사채 발행에 대한 참여연대의 무효 소송은 어떻게 귀결될까. 과연 ‘총수가 계열사 경영진을 내세워 합법을 가장해 기업의 부를 총수와 특수 관계에 있는 자에게 유출하는 행위는 자본주의 경제의 건전한 발전을 가로막는 중대한 범죄 행위’라는 참여연대측 주장이 법원에 의해 받아들여질까.

참여연대가 어렵사리 승소를 이끌어낼 수 있다면 그 의미는 실로 적지 않을 것이다. 소액 주주 운동에 한 획을 긋는 큰 성과일 것이며, 삼성뿐 아니라 다른 재벌들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삼성의 경우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주장도 없지 않다. 이미 1990년대 초반부터 경영권 승계 작업을 해와 후계 구도를 사실상 완성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재용씨가 삼성에버랜드의 최대 주주라는 점에서 설득력을 갖는다(도표 참조). 비상장사인 삼성에버랜드는 삼성그룹의 지주회사인 삼성생명의 최대 주주이다.

그러나 이 게임이 삼성의 일방적 승리로 귀결되지는 않을 듯하다. 한 경제학 교수는 “삼성은 변칙 증여로 얼룩진 재벌이라는 오명을 벗기 어렵다. 어떻게 경영권 이양의 정당성을 얻겠는가”라고 질타했다. 이런 세간의 눈길을 의식한 듯 삼성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변칙 증여 문제는 삼성의 최대 아킬레스 건이다. 지난해에도 8백억원을 들여 사회에 좋은 일을 했는데 이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말짱 헛일이 된다. 신뢰와 이미지 실추를 회복할 무슨 특단의 대책이라도 나와야 할 판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