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 기업에 몰리는 ‘모험 자본’
  • 蘇成玟 기자 ()
  • 승인 2000.0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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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기관·대기업, 벤처 기업 투자 급증… 프리미엄 수십 배 붙여 주식 사들여
한국에서 액면가 5천원인 주식이 20만원을 호가한다면 별 이야깃거리가 못된다. SK텔레콤처럼 4백만 원을 넘나드는 주식이 출현한 마당이다. 하지만 상장도 하지 않은 벤처 기업 주식이 그렇게 거래되었다면 이야기가 좀 다르다. 투자 프리미엄이 무려 40배에 달하는 것이다.

디지털 방송용 프로그램을 제작·편집·송출하는 소프트웨어를 제작하는 (주)아이큐브가 그러했다. 지난해 (주)아이큐브는 한국종합기술금융(KTB)과 기보엔젤클럽으로부터 20억원을 투자받아 화제를 모았다. 40배 프리미엄으로 받은 투자이니까, 실제로 투자자들에게 주어지는 주식은 5천만원어치에 불과하다.

(주)아이큐브 강성재 사장에 따르면, 1997년에도 투자를 유치하려 했으나, 당시 창업투자회사(창투사)들이 제시하는 프리미엄이 기대에 못 미쳐 그만두었다. 1999년은 달랐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코스닥 시장 열기에다, 디지털 방송 계획까지 잡혀 이 회사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이 달라졌다. 더구나 디지털 방송이 시작되면 기존 지상파 방송에 인터넷과 데이터 통신을 혼합한 상승 효과까지 기대되는 상황이었다.

지난해 코스닥 시장은 시가 총액이 연초 7조원에서 연말 100조원으로 늘어나리만큼 비약적인 성장을 기록했다. 이에 따라 미등록 벤처 기업들의 가치도 치솟았다. 특히 인터넷·정보통신과 관련된 유망 벤처 기업의 경우 코스닥 시장 등록을 앞두면 프리미엄이 수십 배씩 오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코스닥 시장이 달아오르자 시중 자금이 벤처 캐피털 업계로 몰려든 결과이다.

창투사·창업투자조합, 투자 재원 5조원 넘어

벤처 캐피털은 창투사나 ‘신기술사업 금융회사’(신기술사)로 등록된 업체를 뜻한다. 창투사를 감독하는 기관은 산업자원부이지만, 여전(여신 전문) 금융기관인 신기술사는 재경부가 감독한다. 공통점은 창투사나 신기술사가 전체 지분의 10% 이상을 투자한 회사는 벤처 기업으로 지정된다는 것이다.

1999년 말 전국의 창투사는 95개. 전년에 비해 27개나 늘었다. 같은 시기에 창투사들이 모집한 창업투자조합 역시 전년에 비해 58개나 증가한 1백50개에 달했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에 따르면, 창투사와 창업투자조합의 투자 재원도 1998년 1조9천억여 원이었던 것이 지난해에는 2조5천억여 원을 넘어섰다.

신기술사는 지난해 2개가 늘어 총 6개가 되었다. 기보캐피탈(옛 한국기술진흥금융)·한국종합기술금융(KTB)·TG벤처(옛 한국개발투자금융)·산은캐피탈(한국기술금융과 산업리스가 합병)에 삼성벤처투자와 미래벤처캐피탈이 추가되었다.

벤처 기업에 투자하는 ‘모험 자본’은 벤처 캐피털만이 아니다. ‘엔젤’이라고 일컬어지는 개인 자본도 크게 늘고 있다. 현재 엔젤클럽은 전국에 20개 이상, 회원 수는 5천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예전 같으면 벤처 기업을 거들떠보지 않았을 현대·삼성·LG·SK 등 대기업은 물론 은행·보험·투신사 등 금융기관들까지 ‘고위험 고수익(high risk, high return)’을 추구하는 투자 대열에 가담하고 있다.대기업의 ‘마구잡이 투자’ 과열 불렀나

창투사 처지에서 보면 자금력이 풍부한 대기업·금융기관 같은 ‘큰손’들이 벤처 기업에 적극 투자하는 현실을 달가워할 리 없다. 한 창투사 대표는 “일부 대기업이나 금융기관이 옥석을 가릴 안목도 없으면서, 마구잡이로 프리미엄을 높게 제시하는 바람에 투자 환경만 나빠지고 있다”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에 따르면, 인터넷·정보통신 관련 기업의 경우 지난해 상반기까지만 해도 ‘높아야’ 5∼10배였던 프리미엄이 이제는 ‘적어도’ 그 수준이다. 수십 배를 요구하는 기업도 많아졌다.

같은 업계에서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이도 있다. 한 신기술사 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높아진 프리미엄을 ‘거품’이라고만 표현하기는 곤란하다. 그런 투자 환경이 조성된 것은 코스닥 시장 때문이지 일부 대기업 탓이 아니다. 1998년에만 해도 부도 직전까지 몰렸던 일부 창투사나 신기술사 들이 1999년에는 투자했던 벤처 기업 덕분에 엄청난 이익을 보지 않았는가. 30∼40배 넘게 프리미엄을 주고도 이익만 남긴다면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수요와 공급이 가격을 결정하는 시장 원리로 볼 때, 벤처 기업의 프리미엄이 치솟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벤처 캐피털이 급증한 데 비해 이들의 공급을 충족시킬 만큼 유망한 벤처 기업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거품’이란 결과로 입증되는 것인데, 아직 누구도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현실이다.

코스닥 시장에 등록하기 전인 1999년 초까지만 해도 2만원 안팎에 머무르던 다음커뮤니케이션의 주식 가치가 1년도 못되어 3백만 원을 넘기리라고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한국 증시 사상 전례가 없던 급성장이다. 덕분에 다음커뮤니케이션에 액면가(5천원)로 20억원을 투자한 미래벤처캐피탈은 6,000 %가 넘는 수익률을 올렸다.

문제가 있다면 프리미엄을 둘러싼 거품 여부가 아니라, 급격한 시장 변화에 일관성 있게 대처하지 못하는 정부 정책이라는 지적이 높다.

특히 한국벤처캐피탈협회가 지난해 12월20일 재경부와 금융감독위원회가 주도한 ‘코스닥 시장 건전화를 위한 발전 방안’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발전 방안이 창투사들에게만 지나치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발전 방안은 첫째, 벤처 기업이 코스닥에 등록할 경우, 그에 투자한 벤처 금융사는 등록 뒤 6개월간 해당 벤처 기업의 주식을 10% 이상 의무 보유해야 한다. 둘째, 벤처 금융사가 투자하여 벤처 기업으로 인정된 기업은 투자가 이루어진 뒤 1년이 지나야 완화된 코스닥 등록 요건이 적용될 자격이 생긴다.

“오락가락 정부 정책은 창투사 죽이기”

한국벤처캐피탈협회 임인주 부회장은 다음과 같이 항의했다. “코스닥 시장 건전화 방안은 지난해 4월 발표된 코스닥 시장 활성화 방안과 모순된다. 불을 지폈으면 1년이고 2년이고 지켜볼 생각을 해야지 좀 과열 양상을 보인다고 이런 식으로 ‘벤처 죽이기’ 정책으로 급선회하는가.”

특히 창투사들은 정부가 신생(start-up) 벤처 기업에 많이 투자하는 자신들만 견제하려는 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단기 차익을 노리고 코스닥 등록을 앞둔 벤처 기업에 주로 투자하는 은행·투신사 등 기관투자가는 제재하지 않고 왜 자신들만 ‘작전 세력’ 취급을 하느냐는 반론이다.

벤처 기업 사정에 정통한 한 전문가는 정부 정책에 대해 더욱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정부가 발표하는 대책은 코스닥 시장 활성화이든 건전화이든 늘 ‘누구를 위한’ 것인지부터 불분명하다. 그러다 보니 허점투성이이다. 시장을 안정시키겠다는 것인데 대체 ‘안정’이란 개념이 무엇인가? 시장이 과열되었으니까 이를 안정시키겠다는 것인지, 주가가 치솟는 벤처 기업을 바라보며 상대적 박탈감에 젖는 일반 국민을 안정시키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만일 코스닥 시장이 과열되었다면 어떤 상태가 과열인지, 지수 200 포인트 이상이 그렇다는 것인지, 아니라면 또 다른 어떤 것인지 아무런 설명이 없다.”

의문은 계속된다. 벤처 기업에 10%도 안되는 지분을 출자한 벤처 캐피털도 많은데 10%라는 비율이 큰 의미가 있을까? 자본금 10억원짜리 회사는 1억이 10%이고, 자본금 100억원짜리 회사는 무려 10억이 10%인데, 둘이 똑같이 취급받는다?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 정도로 정부 정책은 일방적이다. 벤처 기업에 대한 주무 부처도 재경부·금융감독원·중소기업청 등으로 나뉘어 있어 정책 방향이 엇갈리기 일쑤이다. 공청회 같은 여론 수렴 과정도 별로 거치지 않는다.

‘과열’이라는 말만 나오면 대책부터 세우려고 급급할 것이 아니라 인내심을 갖고 자유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맡겨 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많다. 시장은 현명하지 못할 때가 많지만, 반대로 그렇게 어리석지도 않다. 정부가 안정화 대책을 발표한 뒤에도 코스닥 시장의 열기는 가라앉지 않았고, 미등록 벤처 기업들의 프리미엄 시세도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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