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등 증시, 이대로 좋은가
  • 金芳熙 기자 ()
  • 승인 1999.04.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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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과열 부채질하면 재앙 부를 수도… 도박판 아닌 ‘산업 자금 곳간’ 만들어야
평소 경마와 내기 당구를 즐기는 회사원 ㅎ씨(36). 지난해 7월 처음으로 주식에 손을 댔다. 그가 고른 종목은 그 해 5월 관리 대상 종목으로 편입된 해태전자. 주당 3백원 가량을 주고 만 주를 사들였다.

그로서는 운이 좋았다. 추석 연휴 이후 싼 주식이라면 종목을 가리지 않고 사들이는 폭등 장세가 연출된 것이다. 거기에 퇴출 대상 기업이었던 해태전자가 살아 남을 것이라는 루머까지 가세했다. 주가가 1천2백원까지 올라 단숨에 천만원을 챙길 수 있었다.

주식 투자에 자신감이 붙은 것은 당연했다. 그러다 증시에 대해서 전문가임을 자처하는 사람을 만났다. 그가 추천한 금호전기를 두말 않고 사들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투를 잡은 꼴’이 되었다. 그 결과 첫 투자에서 벌었던 돈의 상당 부분을 잃고 말았다. 기회와 동시에 엄청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주식 투자의 속성을 몸소 체험한 것이다. 그는 “지금 와서 처음 투자할 때를 돌아보면 아찔하기 그지없다”라고 말한다. 겁이 나서 잠시 주식 투자에서 손을 뗐던 그는, 그 뒤 투자 금액을 줄이고 대상도 우량주로 한정하는 안전한 투자 전략으로 돌아섰다. 폭등 장세, 80년대 말 호황기와 비슷

반면 훨씬 일찍 주식에 손을 댔으면서도 주식의 속성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56년 상업은행 (현 한빛은행)이 주식 시장에 상장될 때 분양받았던 공모주를 40년 넘게 간직해 온 ㅇ씨(62·여). 그는 지난해 상업은행의 감자(減資) 조처로 애지중지해 오던 주식이 사실상 휴지조각으로 변하는 경험을 했다. 그는 아직도 분이 덜 풀린 듯 “정부와 전문가들은 장기 투자를 하라고 하지만 그 결과가 고작 이것이냐”라고 화를 낸다.

증시의 역사는 단순히 되풀이되는 것일까, 아니면 점차 나아지는 것일까. 급등세를 보이는 주식시장을 보면서 던지게 되는 질문이다. 우선 장세로만 보자면 요즘의 모습은 80년대 후반이나 94∼95년과 닮았다. 웬만한 악재쯤은 다 삼켜 버릴 듯한 기세다.

이런 폭등 장세에서는 끝간 데 모를 장밋빛 전망만 무성한 법이다. 바이코리아라는 주식형 투자 신탁 상품으로 시중의 돈을 싹쓸이하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는 현대증권 이익치 회장은, 곧 종합주가지수가 1000을 넘을 것이라고 호언한다. 현대증권은 아예 종합주가지수 2000과 3000 시대를 대비해서 엔터프라이즈 1000·2000·3000이라는 신탁 상품을 개발해 놓고 있다. 이회장은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엔터프라이즈 3000을 살 계획이라고 귀띔한다. 증권업계의 떠오르는 별로 통하는 세종기술투자자문 김형진 사장도 “장기적으로 종합주가지수는 3000에 달할 것이다”라고 공언할 정도다.

투자 열기 역시 그대로 빼다 박았다. 80년대 후반 등장한 극성 투자자들이 다시 전면에 나타났다. 이런 투자자들은 투자 종목·금액, 투자 대상 종목의 주가를 묻지 않는다고 해서 ‘묻지마 투자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30여 년간 주식 시장을 지켜보았다는 대한투자신탁 조봉삼 상무는 “올해 1월께에는 증권사 창구에서 ‘아무 은행 주나 잡아 주세요’ 하는 주문이 쇄도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라고 말한다.

마치 전염성 강한 열병처럼 한 차례 주식 투자 열기가 휩쓸고 지나간 뒤는 또 어땠는가. 90년 무렵 주식에 손을 댄 거의 모든 국민들은 주가가 크게 떨어지면서 큰 손해를 입어야 했다. 95년 이후 역시 상황은 비슷했다. 주식 투자자들이 시위를 벌이는 세계적으로 유례 없는 일이 한국에서 벌어진 것도, 정부와 증권회사들이 주식 투자 열기를 고의로 부추겨 자신들이 피해를 보았다는 투자자들의 인식 때문이었다.

물론 과거의 열기와 지금은 경우가 다르다는 지적도 있다. 국내의 간판 펀드 매니저인 한국투자신탁 장동헌 주식운용 1팀장은 “과거 두 번의 열기가 개인 투자자들에 의한 것이라면, 지금은 기관 투자가와 외국인 투자자들이 장세를 주도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간접 투자가 늘면서 전처럼 증시가 요동치는 일은 줄어들 것이라는 얘기다. 실제로 최근 들어 가장 기록적인 급등세를 보였던 4월1∼8일 간접 투자 형태(59쪽 딸린 기사 참조)로 증시에 유입된 돈은 1조원을 넘었다.

외국인 투자 일시에 빠지면 한국 경제 위험

장팀장은 현재의 저금리가 정착되면, 마치 금융기관에 예금을 하는 것처럼 주식 투자가 생활화되리라는 전망도 한다. 현재 세금을 뺀 실제 금리는 5∼6%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이 이어진다면 누가 은행에 돈을 맡기겠느냐는 얘기다. 그렇게 되면 거의 모든 국민이 주식과 직간접으로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증시가 모든 국민의 재테크 장(場)이 된다는 이런 시나리오는, 국민주 열기로 전국민 주식 투자 시대가 열렸다고 호들갑을 떨던 90년의 판박이가 될 가능성도 크다.

증시를 보는 정부의 시각이 과거와 달라질지도 관심거리다. 과거 새로이 임명된 경제기획원장관이나 재무부장관(현 재경부장관)은, 실무자들로부터 주가 수준이나 증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근무 수칙’을 귀담아 들어야 했다. 그런 발언이 증시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경제 관료들이 증시를 기본적으로 경제의 거울 이미지(mirror image)로 본다는 뜻이다. 경제가 그대로 투영되는 것이 주가인 만큼, 주가를 인위적으로 움직이거나 관리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지론이다. 대부분의 경제 전문가 의견도 비슷하다. 여기에는 90년에 대규모 증시 부양책을 썼다가 두고두고 후유증을 앓은 경험도 작용하고 있다. 환란 직전 증시가 폭락을 거듭하고 있었는데도 정부가 섣불리 개입하지 않은 것은 여력이 없어서기도 했지만 이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정부가 시장 경제 원리를 중시한다고 해서 증시를 방관할 경우, 증시는 단순한 거울이 아니라 재앙을 부르는 대문이 될 수도 있다. 더욱이 증시는 지난해 5월 완전히 개방되어, 해외 요인이나 외국인 투자자의 영향력이 더욱 커졌다. 마치 외환 위기 직전처럼 이들이 일시에 빠져나간다면 한국 경제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최근에는 증시에 대한 정부의 시각이나 역할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과욕은 과실을 부른다”

그렇다고 억지로 증시를 부양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증시가 냄비 장세를 연출하는 도박판이 아니라, 안정적으로 산업 활동 자금을 공급하는 곳간 기능을 수행하도록 잘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SK증권 주광명 차장은 “증시가 잘못될 경우 자동차나 반도체를 수출해서 어렵게 번 돈을 한순간에 까먹을 수 있다는 것을 정부·기업·투자자 들이 이해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은 증시가 흔들리는 기색이 보일 때마다, 미국 증시의 큰 자금원인 각종 연·기금의 주식 보유 비중을 늘리겠다는 얘기로 고비를 넘기곤 했다. 미국 증시를 단순히 경제의 거울이라고만 이해한 것이 아니라 경제의 중요한 일부로 여긴다는 지적이다.

미국의 전체 연·기금 가운데 주식에 투자되는 부분은 60%를 넘는다. 한국의 비중은 1.6%. 주가가 떨어져 손해라도 좀 보게 되면 워낙 여론의 공격을 받기 때문에 섣불리 그 비중을 늘리지 못한다. 반면에 미국은 증시를 국부를 창출하고 이를 국민들에게 돌려주는 메커니즘으로 활용한다.

외환 위기 당시 경험한 것처럼, 만일 정부가 증시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국부는 증시를 통해 빠져나가기도 한다. 외환 위기 직후 종합주가지수가 600에서 지난해 277까지 추락하는 순간에도, 미국의 대규모 투자 기금인 아팔루사를 비롯한 상당수 외국인 투자자들은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 반대로 바닥에서 700선 가까이 급등한 요즘 장세에서도 대부분의 외국 투자자들은 한몫 챙겼다.

모든 수익증권과 뮤추얼펀드를 통틀어서 현재까지 최고의 수익률(약 27%)을 올리고 있는 상품은 지난해 2월 출범한 뮤추얼펀드 플래티넘. 이 기금의 관리자로 명성을 얻고 있는 서울투자신탁운용 김영준 뮤추얼펀드팀장(38)은 10년 넘게 주식 투자를 해왔지만, 뜻밖에도 주식으로 엄청난 횡재를 해본 적은 단 한번도 없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주식 투자로 돈을 아주 많이 잃었던 적도 없다.”

오랫동안 냄비 장세를 경험해 오면서도 그가 큰 손해를 면할 수 있었던 비결은 ‘과욕은 과실(過失)을 부른다’는 금언을 지켰기 때문이다. 주식 투자를 하면서 그가 유일하게 의식하는 것은 주식 시장의 평균 수익률이다. 그보다 조금만 나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투자할 따름이다.

이는 투자자뿐 아니라 정부에도 적용되는 얘기일 수도 있다. 증시가 호전될 기미를 보인다고 해서 조급하게 폭등 장세를 부채질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증시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런 실책의 연속이다.

최근 주가가 경기 회복 속도를 너무 앞서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와 관련해 이규성 재경부장관은 ‘현재의 주식 시장은 결코 과열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동안 값비싼 수업료를 치른 국민이 증시에 대해 뭔가 배운 것이 있는지는 점차 밝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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