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속에 재기 다지는 대우 사람들
  • 장영희기자 (mtview@sisapress.com)
  • 승인 1999.09.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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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해체 앞두고 절망감·불안감 증폭…‘전의’ 불태우며 재기 의지 다지기도
서울역 앞에 우뚝 선 대우센터에 전격적인 워크 아웃(기업 구조 개선 작업) 소식이 전해진 것은 8월26일이었다. 대우가 재무구조개선약정을 체결한 지 10일 만에 또 다른 방법의 구조 조정 해법에 내몰린 것이다. 이 참담한 소식은 대우 사람들을 무겁게 짓눌렀다. 어쩌다 우리가 이 지경이 되었느냐는 탄식이 여기저기에서 새어나왔다.

(주)대우의 한 부장은 “국가 경제의 첨병이라는 자부심이 일거에 무너졌다”라며 침통해 했다. 20년 넘게 해외를 뛰어다니며 보낸 세월이 눈앞을 주마등처럼 스쳐간 것일까. 그는 자신의 거취보다 32년 대우 신화가 무너져내리는 것이 더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동안의 구조 조정도 채권단이 주도해 사실상 워크 아웃에 가까웠지만, 막상 워크 아웃이 전격 단행되고 보니 이제 정말 그룹이 해체된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 것일까.

그와는 반대로 차라리 잘되었다며 안도하는 사람도 있었다. 대우자동차의 한 과장은 “올 것이 왔다. 지금보다 더 나빠지기야 하겠느냐”라며 스스로를 달랬다. 은행 관리(워크 아웃)가 굴욕스럽기는 하지만 이것이 증폭되고 있는 시장 불신과 유동성 위기의 불길을 잠재울 수만 있다면, 적극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워크 아웃이 이루어지면 모든 채권과 채무가 동결되고, 신규 자금 지원을 기대할 수 있다).

대우그룹은 자금 사정이 공개된 7월19일 이후 사실상 부도 상태였다. 대우그룹 구조조정본부의 한 관계자는 “생산과 영업 기반의 붕괴를 막고, 협력업체 연쇄 부도를 차단하려는 정부의 최후 선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라며 워크 아웃 조처에 대해 쓰다달다 말할 처지가 아니라고 말했다.

대우 사람들은 최근 경영 위기를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사상 처음으로 월급이 제 날짜에 나오지 않은 것이다. 월급날인 8월25일 대우자동차·대우중공업(종합기계)·대우전자·대우통신·대우자동차판매 등 핵심 계열사 5개 사가 사무직 노동자의 급여를 주지 못했다(생산직 노동자 급여일은 내달 7일 혹은 10일). 이 날 조합원의 90% 이상이 생산직 노동자인 대우그룹노동조합협의회가 ‘생존권 위협하는 구조 조정을 결사 반대한다’는 요지의 성명서를 낸 것도, 이 불똥이 생산직 노동자에게 튈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다.

물론 5개 사 사무직 노동자들은 사흘 뒤인 8월28일 월급을 받았다. 워크 아웃이 발동되었기 때문에 앞으로 생산직 노동자 임금이 체불될 가능성도 매우 낮다. 하지만 대우 사람들로서는 정상급 재벌 소속원인 자기들 앞에 영세 기업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닥쳤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이다. 은행 대출 연장 거절당하는 아픔 맛보기도

대우그룹의 위기가 이미 대우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들은 황태연 교수(동국대)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는 ‘기득권자로서의 이익’을 이제는 향유할 수 없는 것일까. 대우통신의 한 과장은 “은행 대출금 연장을 거절당했다. 나는 정말 우량 고객이었는데, 창구 직원으로부터 빨리 갚으라는 야멸찬 독촉을 받았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그때 기분을 다시 떠올리기조차 싫다”라며 머리를 내저었다.

대우그룹 배지를 달고 근무복을 입기가 창피했다고 털어놓는 대우 사람도 있었다. 나라를 위기로 몰아넣은 주범이라고 손가락질당할 것 같다는 피해 의식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가족과 친지들로부터 ‘안부 전화’를 받는 고통을 맛보았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영화 〈타이타닉〉은 침몰하는 거대한 여객선에서 갈등하는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이들과 여자(1등석 손님 우선이기는 했지만)를 한 사람이라도 더 구명정에 태우겠다고 나서는 신사들, 마지막 순간까지 직업 정신을 잃지 않는 오케스트라 단원이 있는가 하면, 자기만 살겠다고 남의 자리를 훔치고 재물을 탐하는 ‘쥐새끼 같은’ 모습도 카메라는 놓치지 않는다.

좌초한 거대 그룹 대우에는 아직 약삭빠른 인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98년 희망퇴직 등으로 7천7백명(종업원 천명 이상 10개사 조사)이 회사를 떠났지만, 올 들어 스스로 떠난 사람은 자연 감소 정도 수준이다. 침몰 직전의 배에서 뛰어내리려는 집단적 움직임은 더더욱 없다. 오히려 전의를 불태우며 의연하게 대처하자는 목소리가 많다.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이 빨리 오는 법이다’‘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대우의 명성을 하루아침에 날려버릴 수는 없다’‘우리는 충분히 자생력이 있다’. 대우자동차 사내 통신망에는 위무와 재기 의지를 다지는 글이 게시되어 있다.

그렇지만 대우 사람들 머리 위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는 좀처럼 걷힐 기색이 아니다. 장래에 대한 불안감이다. 불안감의 정체는 물론 회사와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이다. 36세에 요절한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의 영화 제목은 이렇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대우자동차의 한 과장은 “한달 전만 해도 울분을 터뜨리며 술도 마시고 했는데, 이제 초기의 격앙된 기류는 자취를 감추었다. 체념 상태인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런 체념의 정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불안감을 감추려는 안간힘으로 읽힐 수도 있다. 거취와 관련해 이렇다할 움직임이 없는 것도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구조 조정 계획이 확정되지 않은 탓이 크다. 구조조정본부의 한 관계자는 “독자 생존이든 매각이든 구조 조정이 눈앞의 현실이 되면 대열에서 자진 이탈하는 사람, 강제로 끌어내려지는 사람 등등 여러 경우가 생길 것이다”라고 내다보았다.

각자가 느끼는 불안의 정도도 다르다. 무엇보다 임원과 부서장 들은 가시방석에 앉은 심정이다. 한 임원은 “이미 마음을 정리했다. 구조 조정이 잘 되어 직원 대다수가 생존하기를 기대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젊고 능력 있는 사람일수록 불안감을 덜 느낀다. 또 독자 생존이 가능한 알짜 기업 소속원이라면 상대적으로 안도감을 느낄 법도 하다. 그러나 고용이라는 절박한 문제 앞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대우그룹노동조합협의회 염성태 의장은 ‘고용 안정과 근로 조건 유지를 확실히 보장하라’며 결사 항전 의지를 불태웠다.

구조 조정의 격랑에 휩쓸린 대우가 어떤 모습으로 생존할지는 예단하기 어렵다. 매각 대상 기업 소속원들은 협상 파트너들의 ‘만만디 전략’에 피를 말리고 있다. 독자 생존이 가능한 계열사 소속원 역시 채권단의 ‘무도한’ 칼자루에 휘둘릴 것을 걱정하고 있다.

대우 사람들에게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말을 요즘처럼 실감할 때가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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