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 사태, ‘주식회사 한국’의 부도
  • 金芳熙·朴在權 기자 ()
  • 승인 1997.04.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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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부패 넘어선 산업 정책 실패 사례… ‘전략 산업 집중 육성’ 부작용 일거에 드러나
‘기간 산업’. 아마도 이 용어는 한보 특혜 대출 사건과 관련해 검찰에 소환되어 조사받았던 은행장들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말일 것이다. 한창 계속되고 있는 국회 한보국정조사특위에서도 역시 그럴 것이다. 특히 이 말은 한보에 대한 시중 은행의 대출을 이끌었던 산업은행의 전·현직 은행장들이 자신의 대출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한 주된 논리였다. 검찰의 1차 조사 당시 이형구 전 산업은행 총재는 ‘국가 기간 산업이라고 판단해 절차에 따라 대출했다’라고 주장했으며, 김시형 현 총재 역시 국회 특위에서 같은 대답을 되풀이했다.

물론 이 말은 외압과 뇌물 수수 의혹을 받고 있는 은행장들의 자기 변명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부가 중점 육성하는 기간 산업(전략 산업)이라면 금융계가 옴쭉달싹 못하는 현실을 잘 드러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즉 한보그룹에 5조원 대출을 가능케 했던 것은 특혜나 외압 못지 않게 정부의 산업 정책 자체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한보 사태를 단순한 부정 부패 사건이 아니라 산업 정책 실패라는 차원에서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장기적으로 철강 경기가 좋을 것으로 보고 포항제철 외에 제2의 사업자를 둬야겠다고 판단한 주체가 정부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 않은가.” 한국경제연구원 좌승희 원장의 말이다.

정부 낙점 받으면 각종 지원·자금 쏟아져

산업 정책은 여러 가지로 해석되지만, 쉽게 말하자면 정부가 특정 산업과 업체를 선정해 집중 육성하는 정책이다. 일단 정부로부터 전략 산업으로 선택된 업종이나 회사는 여러 가지 금융 지원을 받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정부가 직접 보조하는 연구개발비라든가 생산설계비, 근로자 훈련비가 포함되어 있지만, 이런 자금은 전체 투자액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는다. 정작 대부분은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과 증권 시장에서 조달하게 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정부가 주는 몇푼 안되는 보조금이 아니라, 해당 산업과 업체를 밀어주겠다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다. 정부의 이런 뜻을 읽게 되면 해당 업종과 회사들은 무조건 전도 양양한 것으로 둔갑하게 되며, 금융기관과 증시에서는 돈이 몰리게 마련이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산업 정책의 장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로, 개발도상국과 후진국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선진국의 부러움을 사왔다. 이제민 교수(연세대·경제학)는 “세계적인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는 산업 정책의 효과를 두고 논쟁이 계속 벌어지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그 효과가 워낙 두드러졌기 때문에 논란을 벌일 여지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 근거를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그동안 우리 정부가 육성하려고 했던 산업들이 오늘날 이룩한 결과만 들여다보아도 된다. 우리나라는 현재 컴퓨터 메모리칩 분야에서 세계 1위 생산 국가이며, 일본에 이은 세계 2위 조선(造船) 국가다. 반도체 생산량에서는 세계 3위이며, 가전제품 제조량에서 4위다. 세계 5위의 자동차 생산국이며, 제철 생산량에서는 세계 6위다.

이교수의 실증적인 연구 결과 역시 70년대 이후 우리 정부가 집중 육성해온 철강·전자·기계·화학·자동차 같은 유치 산업들이 대부분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이교수는 성공한 원인을, 우리나라의 전략 산업들이 단순히 보호의 벽에 안주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국내외에서 경쟁을 통해 수출이나 매출을 높이도록 끊임없이 압력을 받아왔기 때문으로 풀이했다(<한국 유치 산업의 성숙과 성장>, 1996).

그러나 한보 사태는 이런 화려한 산업 정책 성공사 뒤에 가려진 어두운 면을 일거에 드러냈다. 비단 이번 제2 철강만이 아니라 그 전에도 어떤 산업이나 업체를 집중적으로 키우려던 정부가 쓰라린 실패를 맛본 적이 있다. 69년 부실 기업 정리와 70년대 말~80년대 초 중화학공업 투자 조정, 80년대 중반의 부실 기업 정리가 그 예다. 세 경우 모두 정부가 중화학공업과 건설업을 중점 육성하자, 많은 기업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뛰어들어 벌어진 대형 참사였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 경제는 이런 충격을 어렵지 않게 수용할 수 있었다. 정부가 해당 기업에 막대한 금융 지원을 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처리 방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 정부는 부실 기업에 대해 무한정 돈을 쏟아부을 수도, 또 이런 기업을 다른 기업에 쉽게 넘길 수도 없게 되었다. 예를 들어 미국은 한보철강 정상화를 위한 정부와 포철의 지원을 두고 벌써부터 제동을 걸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한마디로 시대가 바뀐 것이다.

전략 산업 육성 정책이 낳은 가장 큰 폐해는 섬유산업같이 세계를 제패할 가능성이 꽤 컸던 일부 산업이 거꾸로 몰락했다는 점일 것이다. 금융기관의 처지에서 보자면, 정부가 사양 산업이라고 인식하는 산업에 굳이 자금을 대주어야 할 이유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국내 주요 기업의 경영, 나아가 우리 경제 전체를 일종의 도박판으로 만든 것 역시 이런 산업 정책의 소산이었다. 90년대 들어 가장 각광받는 전략 업종이었던 반도체산업이 그런 예다. 90년대 초 업계에 불황이 찾아들자 우리나라 반도체 업체들은 일본을 비롯한 선진국 기업들이 주저하는 사이에 과감한 설비 투자를 감행했다. 이런 결정 덕에 우리 반도체 업체들은 경기가 나아지자 시장점유율을 크게 늘렸다. 그러나 반도체 경기가 급랭한 지난해에 상황은 다시 급반전했다.

철강·자동차·석유화학 역시 반도체와 비슷한 궤적을 따라가고 있다. 기간 산업이라는 이유로 호불황을 가리지 않고 확대 일변도로 나간 이런 분야의 상당수 업체들은 지난해부터 수출이 급격히 저조해지면서 이미 심각한 경영난을 겪고 있다. 그렇다고 전처럼 정부가 이 업체들을 직접 거들고 나설 수도 없다.

이런 점에서 한보 사태는, 우리 경제가 개방 혹은 세계화 시대를 맞은 반면 정부 관료나 기업인들은 과거의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과도기적 현상이라는 시각으로 볼 수도 있다. 경제 정책과 제도의 상관 관계를 연구해 온 문정인 교수(연세대·정치학)는 “여러 모로 우리 경제의 환경은 바뀌었는데, 정부가 주도해 특정 분야에 돈을 몰아주는 70년대의 관행은 그대로 계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한보 사태는 어느 정도 예견됐던 일이었다”라고 주장했다.

더 신랄한 분석도 있다. “우리나라는 정부 부처의 과장급, 높게는 국장급 관료가 수십조원대에 이르는 몇몇 산업의 운명을 좌지우지한다. 이런 경제 체제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이름을 밝히지 말라는 한 경제 평론가의 지적이다.

“정부는 전략 산업 정할 능력 잃어”

정부가 묵시적으로 전략 산업을 정하면 금융권이 이를 뒷받침하는 관행은 이미 부실화의 징후가 뚜렷한 중화학공업말고도 첨단 산업에서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번 정부 들어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떠오른 정보통신업과 유통업이 좋은 예다. 국내 대기업들 대부분은 막대한 은행 빚을 내 두 업종에 뛰어든 상태다. 이 때문에 앞으로 이 분야에서 상당수 업체가 부실화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미 일부 유통 전문 그룹들은 파산 위기에 몰려 있다.

특히 정보통신산업은 만일 정부가 기술의 미래를 잘못 예측했을 경우 파국이 올 수도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정부가 95년 무선통신 접속 기술로 CDMA(코드분할방식)를 선택한 조처가 적절한 것이었느냐를 두고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더욱이 정부는 이동통신에 이어 개인휴대통신(PCS) 사업자를 선정했는데, 저궤도 위성을 이용한 통신과, 씨티폰과 같은 통신 신기술이 등장함으로써 이런 식의 사업 구분은 사실상 무의미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어렵사리 사업권을 딴 회사들만 손해를 보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실제로 일본에서는 주요 무선통신 회사들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아니라 막대한 빚을 남긴 골칫덩어리로 전락했다).

전국경제인연합 산하 자유기업센터 공병호 실장은, 정부의 규제가 기술 혁신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제는 정부가 전략 산업을 정할 능력을 상실했다는 지적이다. 이는 동시에 어떤 식으로든 ‘주식회사 한국’의 경영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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