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자동차회사 사활 건 ‘죽음의 랠리’
  • 이철현 기자 (leon@sisapress.com)
  • 승인 1997.04.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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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침체·판매 부진에도 사운 건 과열 경쟁…3~4년내 구조 개편 불가피할 듯
국내 자동차 업계가 2000년대 초에 결판이 나는 ‘죽음의 랠리’를 벌이고 있다. 원래 죽음의 랠리는 자동차로 사하라 사막과 밀림을 통과해 1만92㎞를 달리는 파리-다카르 랠리의 별칭이다. 하지만 국내 자동차 업체가 랠리를 벌이는 장소는 사막이나 밀림이 아니라 시장 점유율과 매출 부문이다.

세계 자동차 전문가들은 대부분 2000년대 초에 세계 자동차 생산 업체가 10개 안팎으로 통합되고, 나머지 업체는 계열사나 협력 업체로 전락한다고 예언한다. 국내 자동차 전문가들은, 이 경쟁에서 탈락하지 않고 10위권에 들 수 있는 국내 업체는 많아야 2개 정도라고 말한다. 한국자동차공업협회 김소림 부장은 이 예상마저도 국내 자동차 업계의 희망 사항이라고 지적한다. “국내 3대 자동차 메이커 가운데 하나라도 순위에 들어가면 다행이다.”

세계 자동차 시장은 국내 자동차산업이 고속 성장을 구가하던 80년대~90년대 초와는 많이 달라지고 있다. 당시 미국차가 북미 시장에서 일본차에 밀렸고, 일본차는 미국 행정부와 업체의 견제를 심하게 받았다. 이를 틈타 한국 업체는 일정한 물량을 수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난 몇년간 미국 자동차 업체들이 경영을 혁신해 경쟁력을 빠르게 회복했다. 일본 업체도 엔화 평가 절하에 힘입어 가격 경쟁력을 회복하고 있다. 후발 개도국들마저 자동차산업을 국가 기간 산업으로 육성하는 바람에 아시아·동유럽 같은 신흥 시장에서는 공급 과잉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국내 자동차 업계도 생산 능력을 늘리고 연이어 신차를 출시하고 있다. 여기에 삼성자동차가 새로 진입하고 자동차 시장이 개방되면서 수입 자동차들이 물밀듯 들어오고 있는 형편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사상 유례 없는 무한 경쟁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한다.

경쟁은 치열해지는데 시장 여건은 좋지 않다. 내수 시장이 성장기에서 성숙기로 접어들면서 95년부터 내수 시장 성장률이 제로에 머무르고 있다. 지난해 성장률은 5.7% 였지만 경승용차에 대한 수요가 137% 늘어난 데 힘입은 바 크다. 올해 내수 시장도 경기 침체로 인해 개선되기 힘들다. 현대자동차 김판곤 전무는 “경기 침체가 2~3년 지속될 경우 경쟁에서 탈락하는 업체가 생겨날 수밖에 없고, 결국 국내 자동차 업계는 어떤 식으로든 재편될 수밖에 없다”라고 지적했다.

국내 자동차 업체들은 죽음의 경주에서 살아 남기 위해 설비 투자를 늘리고 연구·개발비를 마구 쏟아붓고 있다. 국내 업체 가운데 눈에 띄게 생산 능력을 키우는 업체는 대우자동차이다. 대우자동차는 92년 제너럴모터스와 결별한 후 4~5년 동안 신차 개발에 몰두했다. 지난해 12월 소형차 라노스를 시작으로 지난 2월에 준중형차 누비라, 3월에 중형차 레간자를 연이어 시장에 내놓고 있다. 신차 개발에 든 비용은 자동차 모델마다 대략 3천억~4천억원. 대우자동차는 신차 출시에 1조원 이상을 투자한 셈이다. 신차 효과에 힘입어 라노스와 누비라는 경쟁 차종을 위협하며 시장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앞다투어 신차 출시, 생산 설비도 대폭 확장

대우자동차의 약진에 맞서 다른 업체들도 신차를 출시하고 있다. 현대자동차는 대우자동차의 티코를 겨냥해 경승용차 MX를 내놓을 예정이고, 레저용 차량(RV:Recreation Vehicle)인 스타렉스를 연 7만대 가량 판매할 계획이다. 또 기존 제품의 성능을 개선한 모델을 연이어 투입할 예정이다. 올해 가장 많은 신차를 출시할 업체는 기아자동차이다. 3월 말에 대형 고급차 엔터프라이즈를 내놓았고 5월에 세피아 후속 모델을 출시할 예정이다. 또 아벨라·크레도스·포텐샤의 성능을 개선해 시장에 내놓을 계획도 가지고 있다.

국내 자동차 업체들은 신차 출시와 동시에 생산 설비를 엄청나게 늘려 생산 능력을 키우고 있다. 대우자동차는 30만대 생산 규모를 가진 군산 공장을 신축했다. 이로써 대우자동차는 부평 공장 50만대, 창원 공장 24만대를 합치면 생산 능력이 백만대 이상으로 늘어난다. 대우자동차는 이에 그치지 않고 해외 공장에서 60만대를 생산할 설비를 갖추느라 여념이 없다. 주로 중국·폴란드와 옛 소련 지역에 현지 공장을 설립하고 있다. 대우자동차는 2000년까지 1백50만대를 생산할 수 있는 해외 기지를 마련하겠다고 장담한다.

현대자동차는 올해 지난해보다 14% 성장한 1백50만대 생산 체제를 갖추겠다고 한다. 연구·개발과 생산 능력을 늘리기 위해 모두 1조3천억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해외 생산 기지를 늘리는 데도 소홀하지 않다. 올해 7월 5만대 생산 규모의 터키 공장을 완공하고, 20만대 규모의 인도 공장을 세우고 있다.

인도네시아 국민차 사업을 따내는 데 성공한 기아자동차는 인도네시아에서 1년에 7만대를 생산할 국민차 공장을 착공했다. 이미 지난해 11월 중국 자동차 회사인 열발기차유한공사와 합작 계약을 체결하고 올해 8월부터 조립 공장을 본격 가동한다. 그밖에 러시아·터키에도 합작 공장을 세워 현재 10개국 15만대인 해외 생산 규모를 2000년까지 16개국 52만대로 늘릴 예정이다.

이렇듯 생산 능력을 키운 국내 자동차 업체들은 올해 국내에서만 2백만대 가량을 판매할 계획이다. 이에 비해 내수 시장 규모는 대략 1백60만대에 불과하다. 현대자동차 김판곤 전무는 “내수 1백60만대 판매도 너무 낙관적인 수치다. 경기 침체를 감안하면 1백50만대에 못 미칠지도 모른다”라고 우려했다. 결국 과잉 생산으로 남는 40만~50만대는 재고로 쌓일 수밖에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수출을 늘려야 한다. 하지만 수출 전망도 밝지 않다. 지난해 수출이 23.7% 늘었지만 95년과 비교하면 수출 성장률이 절반으로 떨어졌다. 국산차와 경쟁하는 일본 자동차가 워낙 제품 경쟁력이 높은 데다, 엔화 평가 절하로 가격마저 싸져 국산차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수출 시장을 북미에서 서유럽과 제3세계로 바꾸어 한때 재미를 보았지만 지금은 전망이 밝지 못하다. 유럽 시장이 통합되면서 역외 국가에 대한 무역 장벽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또 선진 자동차 업계가 월드카나 아시아카 개념으로 특정 지역의 기후와 토양에 적합한 차를 개발해 아시아를 비롯해 세계 시장을 공략하려 하기 때문에 국내 자동차 업체가 제품의 경쟁력을 비약적으로 높이지 않으면 국산차가 달릴 수 있는 도로는 점점 좁아질 수밖에 없다.

내수 시장이 포화 상태인데 수출마저 여의치 않으면 재고가 발생한다. 실제로 3월27일 현재 국내 자동차 업계 재고 물량은 11만대에 육박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자동차가 창고에 쌓이면 생산 대수를 줄이게 되고 결국 투자 비용을 회수할 수 없게 되어 자동차 업체의 수익성이 악화하기 마련이다. 이는 곧 적자로 이어진다. 적자가 나는 업체는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려 메워야 한다. 재투자 비용도 마련하기 힘들어져 신제품 개발과 설비 확장에도 영향을 받게 된다. 차입금이 많아지면 재무 구조가 나빠지고, 은행에서 돈을 빌리기가 어려워진다. 그래서 금리가 높은 제2 금융권에서 자금을 끌어들이게 되면 기업의 재무 구조가 더 나빠지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그 전형적인 예가 쌍용자동차이다. 수년간 적자에 시달려온 쌍용자동차는 대략 3조원 규모의 채무를 갖고 있는데, 이에 대한 금융 비용만 연간 3천억원이 넘는다. 쌍용자동차가 발행한 어음은 최근 사채시장에서 할인되지 않고 있다. 기아자동차에 삼성·LG 그룹 눈독

자동차 생산 업체 가운데 재무 위기에 처한 기업이 나타나고 국내외 시장 여건이 불안해지자 자동차산업 구조를 재편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시장 여건이 불리해지면 재고를 팔아치워야 하기 때문에 자동차 업계는 제살 깎아 먹기 경쟁이라도 해야 한다. 자동차 업체 수뇌들이 모여 무이자 할부 판매 같은 출혈 경쟁을 하지 말자고 결의해도 소용이 없다. 대우자동차 전략기획실 이성상 이사는 “지켜지지 않는데 회장들이 결의하면 뭐하나”라고 말했다. 기아자동차는 주주에 한해 판매 가격을 5% 할인해 주는 고육책을 실시할 정도이다. 자동차 업체가 제살 깎아 먹기식 판매 경쟁에만 열을 올린다면, 자금 여력이 있는 회사가 유리해진다. 보통 단기 자금이 많이 동원되는 부문은 판매 분야이기 때문이다.

제일 불리한 회사가 기아자동차이다. 현대그룹과 대우그룹은 편법을 동원해서라도 자금 지원을 할 수 있는데, 기아그룹은 기아자동차가 전부이기 때문에 기아자동차가 흔들리면 자금을 동원할 여력이 없게 된다. 실제로 기아자동차는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다. 2월에 지급해야 할 상여금을 3월7일에야 지급했다. 게다가 올해 초 노조 파업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따라서 기아자동차는 자동차산업 구조 개편의 가장 큰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기아자동차는 합병·매수(M&A)의 대상이 될 만한 조건을 여럿 가지고 있다. 주식시장 관계자들은 기아자동차 주식이 고루 분산되어 있어 지분 25%만 매집하면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내년에 첫 차를 출시하는 삼성그룹은 끊임없이 기아자동차를 넘보며 주식을 매집하고 있다. 삼성그룹은 정부 당국과 강력한 경쟁자의 출현을 원하지 않는 기존 업체들의 견제를 받으면서도 오래 전부터 기아자동차를 노려왔다. 그런가 하면 LG그룹 임직원이 ‘짝사랑’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기아자동차에 대한 LG그룹의 구애는 눈물이 날 정도이다. LG그룹 계열사 가운데 많은 업체가 이미 기아자동차의 부품 업체가 되어 있다. 또 기아자동차의 러시아 지역 판매를 LG상사가 대행하고 있다.

대우자동차가 신차를 출시한 뒤로 내수에서 조금 밀리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기아자동차가 제2의 자동차 생산 업체라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기아자동차가 쉽게 생명력을 잃지 않으리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기아그룹 계열사인 아시아자동차 박원장 이사는 “축적된 기술이 상당하고 마케팅도 뒤지지 않기 때문에 기아자동차가 쉽게 주저앉지는 않으리라 본다”라고 말했다.

기존 업체들이 엄청난 손해를 보는 출혈 경쟁을 오랫동안 벌일 수 있는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어느 한 업체가 쓰러질 때까지 계속해야 하는데, 잘못하면 국내 자동차 업체가 공멸할 수도 있다. 일부에서는 기아자동차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자금난에 시달리게 되면 판매 부문을 아예 LG그룹에 넘기고, 기아자동차는 생산과 기술 개발에만 전념하는 형태로 재편될 수 있다고 본다.

대우자동차의 운명은 해외에 벌여 놓은 사업의 성패에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대우자동차가 세운 해외 공장이 계획대로 가동률이 높아지고 생산 대수를 자체 시장에서 소화할 수 있게 되면, 대우자동차는 국내 자동차 업체 가운데 1위로 올라설 뿐만 아니라 세계 10대 자동차 생산업체로 발돋움할 수 있다. 하지만 만일 대우자동차의 해외 공장 가운데 어느 한 곳이라도 차질을 빚으면 다른 해외 공장까지 여파가 미쳐 연쇄적으로 어려워질 수 있다. 최악의 경우 그동안 공들여온 해외 진출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고, 그 영향이 대우자동차 전체에 미치게 된다. 대우자동차가 위기에 처하면 국내 자동차산업은 말할 것도 없고 전체 산업 자체가 위기에 처할 수 있다.

삼성자동차는 시장 재편에서 큰 변수가 못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자동차산업은 대규모 설비가 필요한 장치 산업이라 삼성자동차가 내년에 생산한다는 8만대로는 개발비도 못건진다. 자동차는 보통 모델당 연간 30만대는 생산해야 수지를 맞출 수 있다. 기껏해야 50만대를 생산하는 규모의 업체는 변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

현대경제사회연구원 윤창호 연구원은 3~4년내에 국내 자동차 9개 사가 2~3개 업체로 통합되는 큰 구조 개편을 겪게 되리라고 예상했다. 자동차 업체 관계자들은 현대자동차가 살아 남는다는 데에 이견이 없는 듯하다. 결국 기아자동차나 대우자동차가 본격적으로 시험대에 올라서고, 그밖의 업체가 기존 업체로 흡수되는 형태로 산업 구조가 재편되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문제는 재편 과정이다. 출혈 경쟁으로 업체가 아예 쓰러지는 형태로 진행된다면, 한두 업체의 도산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국내 자동차산업 전체의 위기로 비화할 수 있다. 반면 품질을 높이고 서비스의 질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경쟁이 이루어진다면 국제 경쟁력이 향상되어 수출 물량이 늘어날 수 있다. 또 국내 업체간 전략적인 제휴나 합병을 통해 합리적인 계열 체제를 이루어 국내 자동차산업 전체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는 형태로 산업 재편이 일어날 수도 있다. 죽음의 랠리의 끝. 그 결말이 공존일지 공멸일지는 자동차 업계가 벌이는 경쟁 내용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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