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에서 매 맞는 금호그룹
  • 광주·羅權一 주재기자 ()
  • 승인 1999.10.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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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월드컵 경기장 부정 입찰에 시민들 불만 폭발…“향토 기업 키워준 지역민 배신”
‘지난 시절 시간이 다소 늦더라도 다른 고속버스보다 광주고속(현 금호고속)을 애용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금호는 지역민들의 절대적 사랑에 아무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세를 확장하고 기업 이윤 극대화를 위해 지역의 정치·행정 집단과 언론을 이용해 공정한 절차를 무시하고 절대 권력을 행사해 왔다. 최근 월드컵 경기장 입찰 서류 조작 사건과 주가 조작이라는 도덕적 해이는 그런 금호의 부도덕한 결과물이다.’(‘금호그룹 개혁 촉구를 위한 광주시민대책위원회’ 결성 제안서 내용 중 일부)

‘금호 월드’ 광주에 빨간불이 켜졌다. 광주 지역 시민단체들이 지역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해온 금호그룹의 ‘성역 깨뜨리기’에 나섰기 때문이다. 광주YMCA·광주경실련·녹색소비자문제연구원 등 광주 지역 24개 시민단체들은 최근 ‘금호그룹 개혁 촉구를 위한 시민대책위원회’(대책위·위원장 정찬용)를 결성하고 금호그룹에 강도 높은 구조 조정과 개혁을 촉구하고 나섰다. 광주 지역에서 금호그룹에 대해 24개 시민단체가 연대해 전면적인 개혁을 촉구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시민단체들, 대책위 결성하고 개혁 촉구

사실 광주 지역에서는 수십년 동안 금호그룹과 정·관·언의 유착 관계가 공공연한 비밀로 치부되어 왔다. 행정기관 주변에는 ‘금호 장학생 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떠돌 정도였고, 심지어 시민·사회·재야 단체 간부들조차 금호의 로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이 나돌았다.

이와 관련해 현재 광주 지역 시민단체들이 개설한 금호 비리 고발 창구에는 하루가 멀다고 금호그룹과 행정기관의 유착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고 개혁을 촉구하는 광주 시민들의 목소리가 줄을 잇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무등산 보호단체 협의회’ 김인주 사무처장은 “금호가 대주주로 있는 광주은행 본점의 무리한 신축과 광천터미널을 신세계백화점에 임대함에 따른 교통 체증 유발, 터미널 마권발매소 추진 등 과거 금호의 오만했던 기업 경영을 비판하는 전화가 많이 걸려오고 있다”라고 귀띔했다.

광주 금남로에서 만난 한 30대 회사원은 “멀쩡한 광주은행 구 본점 사무실을 지금도 아깝게 놀리고 있으면서 금호가 원래 자기 땅인 광주 대인동 옛 공용 터미널 부지를 광주은행을 통해 비싼 값에 사들이게 하고, 20층짜리 광주은행 신축 공사도 금호건설이 맡아 짓지 않았느냐. 이런 ‘땅 짚고 헤엄치기’ 식 돈벌이는 그만두어야 한다”라며 금호에 대한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재계 서열 10위로 호남을 대표하는 재벌인 금호그룹(회장 박정구)이 기업의 모태인 광주에서 위기에 봉착한 직접적인 계기는 광주 월드컵 경기장 부정 입찰 사건이다. 금호그룹 주력 계열사로 국내 도급 순위 15위인 (주)금호산업 건설사업부는 1천4백12억원 규모의 광주 월드컵 경기장 공사 입찰에 참여하면서 83년 시공했던 사우디아라비아의 한 스포츠클럽 축구장 관람석 시공 실적을 실제 5천석에서 2만5천석 규모로 5배나 부풀려 입찰에 참여한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발주처인 광주광역시에 가짜 입찰 서류를 들이대 시공권을 따낸 부도덕한 행위가 드러난 것이다. “로비력으로 위기 돌파하려 들지 말라”

월드컵 경기장 부정 입찰 사건의 파장은 컸다. 금호그룹에 대한 광주 시민들의 누적된 불만이 이 사건을 계기로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게다가 지난 8월 금호석유화학 주가 조작과 관련해 금융감독원이 박성용 금호그룹 명예회장·박정구 회장·박삼구 아시아나항공 사장·박찬구 금호석유화학 사장 등 금호그룹 4형제를 검찰에 고발한 ‘전력’도 불만을 폭발시킨 주요 원인이 되었다. 월드컵 경기장 부정 입찰 사건이 폭로되자 광주시민연대는 즉각 성명을 통해 ‘지역 경제 활성화와 지역 공동체 일구는 데 일조하라는 지역민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주가 조작이라는 편법으로 이득을 취하고, 해외 실적을 조작해 수주하고, 시민과 약속한 공공 기반 시설 부담 약속을 어긴 것은 지역 경제 맹주로 군림하는 독점 지배와 행정기관과의 유착 때문이다’라며 금호그룹의 부당 행위를 맹렬히 비판했다.

이에 대한 금호그룹의 대응은 ‘관성’ 대로 특유의 로비력을 통한 위기 돌파였다. 시민단체들의 비판 수위가 거세지자 금호산업주식회사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데 대해 참담한 회한과 통절한 심정으로 머리 숙여 사죄의 말씀을 올린다’는 내용의 사과문을 일간지에 게재한 뒤 월드컵 경기장 시공권을 광주시에 반납하는 ‘김빼기 작전’으로 시민단체의 예봉을 재빨리 피해 갔다.

검찰 수사도 금호산업주식회사 이서형 대표는 제외하고, 황윤학 상무 등 3명을 구속하는 선에서 일단락되었다. 9개나 되는 광주 지역 일간지 역시 유력 광고주라는 특수성 때문인지 금호산업의 비리를 1∼2단 기사로 처리하는 데 그쳤다. 광주에서 금호의 ‘벽’을 실감할 수 있는 사례라 할 만하다.

‘광천터미널 부지 용도 변경’ 등도 문제 삼아

금호는 2001년 9월 준공 기한까지 월드컵 경기장 건설을 마쳐야 하는 광주시의 다급한 사정을 간파한 듯, 반성한다는 명분으로 시공권 ‘포기’ 의사를 밝혔지만, 정작 광주시의 ‘처분’을 기다리는 여유 있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왼쪽 인터뷰 기사 참조). 때문에 최악의 경우에는 금호가 월드컵 경기장 공사를 다시 맡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광주시 역시 국가계약법을 위반한 금호산업에 6개월∼1년간 입찰 참여 자격 제한을 내릴 수 있는데도 ‘정상 참작’을 이유로 1개월 정도로 처벌을 경감하는 방향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월드컵은 국가적 대사라는 정부의 구호와 함께, 금호가 잘못은 했지만 지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는 ‘명분’이 금호의 막강한 로비력과 함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우정의 거북이 광주고속’ 으로 친숙했던 호남의 대표적인 기업 금호는 20층짜리 광주은행 빌딩과 30층짜리 금호생명 빌딩으로 광주의 스카이 라인을 주도적으로 만들고 있는 재벌이다. 그만큼 광주·전남 지역 사회에 드리운 영욕의 그늘도 많다는 얘기다.

현재 시민단체가 조사하고 있는 금호그룹의 비리는 △광천터미널 부지 용도 변경 △광천 지하보도 조성 약속 불이행 △상무 신도심 지하주차장 조성 약속 불이행 △무등건설 인수 약속 불이행 △우치동 패밀리랜드 문제 △스크린 경마장 추진 사건 등 열세 가지에 이른다.

광주 시민들 사이에는 금호그룹이 ‘소나기만 피하고 보자’는 전략으로 로비력에 의존해 문제 해결을 시도해서는 안된다는 소리가 거세다. 결국 금호그룹의 개혁 여부는 시민단체들이 얼마나 금호그룹을 압박할 수 있느냐에 모아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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