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이건희 회장, 후계 승계 서두르나
  • 장영희기자 (mtview@sisapress.com)
  • 승인 2004.0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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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구조본’에 ‘오너 재산 관리자’ 김인주 사장 전면 배치
한국 최대 재벌 삼성그룹의 심장부 조직이 구조조정본부(구조본)라는 데는 별 이견이 없다. 법적 기구도, 수익을 직접 창출하는 조직도 아니지만, 삼성 구조본의 일거수 일투족은 재계는 물론 세간의 이목을 붙잡는다. 다른 그룹도 구조본이나 구조본과 기능이 비슷한 조직이 있건만 유독 삼성 구조본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한마디로 구조본 중의 구조본이기 때문이다. 삼성 구조본만큼 오너 일가의 친위부대 구실을 확실히 하며 계열사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곳이 없다는 것이다.

지난 1월13일 단행된 삼성그룹 사장단 인사는 구조본의 실질적 지휘 라인에 어떤 변화가 시도되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을 낳고 있다.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이 부회장으로, 김인주 부사장(재무팀장)이 사장으로 승진한 것이다. 그런데 김사장은 며칠 후 구조본 차장으로 임명되었다. 이건희 회장이 1998년 회장 비서실을 구조본으로 전환하면서 폐지했던 차장제를 부활시키면서까지 김사장을 중용한 것이다.

재계 일각에서는 이부회장이 일단 구조본 본부장 직을 유지했지만, 퇴진 순서를 밟는 것이 아니냐는 해석을 내놓았다. 대선자금 파문이 수습되고 무엇보다 이건희 회장 아들이자 후계자인 이재용 상무로 순조로운 경영권 승계를 위해 이부회장이 계열사 최고경영자로 이동하거나 은퇴하리라는 것이다.
삼성 관계자의 전언에 따르면, 이번 인사에서 이부회장의 거취가 논란이 되었던 정황이 없지 않다. 승진은 일찌감치 결정되었으나 본부장 직을 유지할 것인지 삼성물산으로 이동할 것인지를 놓고 막판까지 진통을 거듭해 사장단 인사가 하루 늦어졌다는 후문이다.

구조본측은 구조본 최고 지휘자로서 이부회장의 위치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고 일축했다. 변화가 있다면 이부회장은 이건희 회장을 대신해 대외 업무를 주로 관장하고 자신이 챙기던 대내 업무를 김사장에게 상당수 넘겨줄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부회장이 현안과 거리를 두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른바 삼성그룹 2인자라는 이부회장의 영향력이 약해졌다거나 심지어 퇴진 단계라는 시각은 적어도 현단계에서는 설득력이 약해 보인다. 이부회장은 이회장의 눈빛만 보아도 의중을 파악하는 이회장의 최측근 인사로, 이회장과 운명을 같이 할 사람으로 불린다. 1996년부터 비서실 차장·비서실장·구조조정본부장으로 직함을 달리하며 이회장을 지근 거리에서 보좌해왔다. 1주일에 적어도 한두 시간씩 이회장과 경영 전반에 대해 논의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김사장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재무팀장에서 구조본 차장으로 기용된 그에게 전보다 힘이 더 실릴 것은 분명하다. 김사장은 최광해 재무팀장(부사장)과 최주현 경영진단팀장(부사장), 장충기 기획팀장(부사장) 등 팀장 7명과 구조본 사람 100여 명을 진두지휘하는 야전 사령관 역을 해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김사장이 ‘이학수 이후’ 아니냐는 관측이 나돌기도 한다. 하지만 삼성 관계자들은 차장제 부활이 급격한 세대 교체를 하지 않으려는 일종의 완충 장치일 뿐이라며, 확대 해석은 적절치 않다는 반응이다. 이부회장이 구조본 차장에서 본부장이 된 선례가 있지만, 그것이 김사장에게도 그대로 적용될지는 두고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 삼성 관계자는 이부회장과 김사장의 역학 구도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부회장이 이회장 사람이라면 김사장은 이부회장의 오른팔로 불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김사장은 이부회장 바로 밑에서 까다로운 문제들을 해결한 공로로 고속 승진해 왔으며, 급기야 최연소(47세) 사장이 된 것은 사실이다.

이 관계자는 이보다 삼성이 이학수-김인주 라인업을 전면 등장시킨 배경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룹의 경영권 승계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삼성그룹 안팎에서 구조본 인사나 직제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도 사실 그룹의 경영권 승계와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2004년의 삼성 구조본은 이회장에게서 이재용 상무 체제로 넘어가기 전에 이를 위협하는 위험 요인을 제거해야 하는 일종의 과도기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삼성 관계자는 바로 이 때문에 김사장이 중용되었다고 해석한다. 이 관계자는 대선자금 건이 계류되어 있지만, 경영권 대물림과 관련된 법적 시비와 부정 여론을 말끔하게 해소해 후계 구도를 연착륙시키라는 것이 이회장의 특명이며, 이 최대 현안을 해결하는 데 최적임자가 김사장이라는 것이다.

김사장이 삼성그룹에서 최고의 금융 전문가인 것은 정평이 나 있다. 1990년 회장비서실 재무팀 부장으로 전격 기용된 김사장은 이후 줄곧 재무팀에서 오너 일가의 재산 관리와 지분 변동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해 왔다. 이재용 상무의 지배 구조 형성에 단초가 된 에버랜드 전환사채(CB) 발행 역시 이부회장이 정점에 있었지만 실무는 김사장이 수행했다. 김사장에게 맡겨진 이회장의 특명은 어찌 보면 결자해지인 셈이다.

삼성 처지에서 올해는 어느 때보다 시류가 험악하다. 4년 가까이 끌던 에버랜드 고발 건에 대해 검찰이 지난해 12월 배임 혐의로 전격 기소 결정을 내렸으며,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이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 저가 인수 의혹도 조사하라고 요구하는 등 파상 공세를 펴고 있기 때문이다.
김사장이 구조본 차장으로서 풀어야 할 중대 현안은 또 있다. 재계에서는 삼성생명을 정점으로 한 금융지주회사 설립 건을 꼽고 있다. 금융지주회사 구상은 그룹에서 금융회사들을 떼어내 지주 회사 체제를 구축한 뒤 기존 보험·증권에다 은행을 추가해 미국 시티그룹에 버금가는 금융 전업 그룹을 형성한다는 전략이다. 삼성경제연구소가 ‘한국의 기업과 자본주의’라는 연구 주제에 올해 최대 역점을 두고 있는 것도 그룹 지배 구조 변화와 맥락이 닿아 있다.

삼성 구조본 사정에 밝은 재계 관계자들은, 삼성이 빠르면 5년, 늦어도 10년 내에 이재용 체제를 전면에 등장시킬 계획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인력과 조직의 세대 교체가 급격하게 이루어지지는 않겠지만, 갈수록 변화의 폭이 커질 것은 분명하다는 전언이다. 삼성 구조본의 이학수·김인주 라인업은 후계 체제 연착륙이라는 이회장의 특명을 수행할 전위부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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