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쥐어짜기식 경영은 ‘자충수’
  • 장영희기자 (mtview@sisapress.com)
  • 승인 1997.03.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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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들 불황 타개책 ‘감량 경영’ 일색…사기 저하 등 부작용 낳아 소탐대실 될 수도
자린고비식 불황 타개책이 재계를 휘감고 있다. 게다가 개성도 없다. 재벌 그룹들은 업종 특성이나 기업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마치 옆집 서류를 베끼듯 경쟁적으로 임금 동결과 경비 절감에 몰두하고 있다. 30대 재벌 그룹은 지난 2월 전국경제인연합회 결의를 쫓아 올해 과장 이상 간부급 임금을 지난해 수준으로 동결했거나 할 예정이다. 사원 월급도 대부분의 기업이 3% 이내에서 인상할 것으로 보여 사실상 실질 임금이 깎이게 될 전망이다. 이것은 그룹의 총인건비 수준을 전년 수준으로 묶겠다는 발상으로, 임금 동결이 불황 타개책의 0순위로 꼽히는 셈이다.

재벌 그룹들은 경상 경비를 줄이는 일에도 열심이다. 현대그룹은 생산성 10% 향상과 경비 10% 절감을 목표로 하는 ‘플러스 10 마이너스 10’ 운동을 펼치고 있다. 삼성그룹은 한술 더 떠 경상 경비뿐 아니라 앞으로 3년간 인건비, 투자비, 원부자재 및 부품 구입비 등을 포함한 총경비를 30% 줄이기로 했다. LG그룹은 획일적인 인원 감축이나 비용 삭감을 지양한다고 공식으로 말하고 있으나 계열사 별로 25∼30% 경상 경비를 절약하는 내부 지침을 정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들 외에 경영 실적이 좋지 않은 선경·쌍용·한진·기아·한화·두산 그룹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이들의 경비 절감 내용은 △출장비·접대비·연월차 수당 줄이기 △자기 계발비 등 복리 후생비 삭감 △해외 연수 축소 △사무용 소모품 줄이기와 이면지 사용 △불필요한 야근 금지 △소비성 행사 최대 억제 등으로 대부분 대동소이하다.

재벌들이 임직원의 동요에도 불구하고 임금 동결이라는 극약 처방과 경비 절감을 시행하는 것은 물론 경영 성적이 매우 좋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대신경제연구소가 부도 난 한보그룹과 상장 계열사가 없는 뉴코아그룹을 제외한 30대 그룹 상장사 1백28개의 96 사업 연도 영업 실적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순이익이 무려 90%나 격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순이익이 81.5%나 증가한 95년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의 차이로 불황감을 더욱 크게 느낄 수밖에 없다. 현대·삼성·LG 그룹은 여전히 수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반도체 가격이 폭락하는 바람에 순이익이 70∼90%나 줄어 타격이 크다. 특히 삼성그룹은 95년 순이익이 2조5천억원에 달했던 삼성전자가 96년에는 무려 93.4%가 줄어든 1천6백42억원에 그쳤을 뿐만 아니라 중공업과 항공 등이 대규모 적자를 내, 30대 그룹 가운데 순이익 감소율이 가장 큰 그룹이라는 치욕을 안았다. 쌍용그룹은 쌍용자동차의 적자(2천2백84억원)로 그룹 전체가 적자(8백19억원)를 냈으며, 한진과 두산 그룹도 각각의 주력 기업인 대한항공(2천1백5억원)과 OB맥주(9백64억원)의 적자로 그룹 전체가 휘청거리고 있다.

지금 재벌 그룹들에서 벌어지고 있는 감량 경영의 물결은 어려워진 경영 여건을 헤쳐나가기 위해 불가피한 몸부림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들의 불황 돌파 전략이 이런 축소 경영 쪽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은 아니다. 한계 사업 정리 같은 구조 조정을 통해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삼성그룹은 자기네가 가지고 있는 2백30여 사업을 정밀 분석해 이 가운데 29개를 중소기업에 이양하거나 해외에 이전하겠다는 계획을 실행할 참이다. 두산그룹은 1단계 리스트럭처링(사업 재구축)을 마친 상태다. 이 그룹은 96년 한 해에 자산 처분, 주식 매각, 사업 철수 등으로 손익 부문에서 7백40억원, 현금 흐름 부문에서 천억원이나 개선 효과를 보았다고 밝히고 있다. 이들 외에도 핵심 역량을 신종 사업에 결집하겠다는 의욕을 보이는 그룹은 적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당장 노동자들에게 불어닥친 감량 경영 바람이 심상치 않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구조 조정과 생산성 향상을 강력히 추진해야 할 종업원의 동요가 심한 것이다. 경영 전문가들은, 기업 대부분이 급한 김에 마른 수건을 쥐어짜는 식으로 불황을 극복하겠다고 밝히고 있으나, 이것이 불황 타개에 도움이 될지 역효과를 낼지는 따져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지적이 설득력을 얻는 것은, 불황의 성격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경제 전문가들은 한국 경제가 이른바 복합 불황 상태에 빠져 있어 단순히 ‘절감’이나 ‘개선’ 차원에서 돌파구를 찾을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도 현재의 경제 위기에 대해 경기 순환 상의 침체와 고비용·저효율로 대표되는 구조적 성격에다 성장 속도가 떨어진 데 따른 국민들의 체감이 한순간에 복합 작용한 데 따른 충격이라고 진단했다. 또 기업이 절감 운동을 벌이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이것을 불황 때 강도 높게 실시하는 것은 큰 효과를 낼 수 없다는 주장이다. 어려울 때일수록 획기적인 사기 진작책을 내놓는 역발상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불황은 기회” 교육 투자 늘리는 기업도

이런 주장은 불황 타개를 기술 혁신과 생산성 향상 같은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방법으로 해야 한다는 점에서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이건희 회장과 LG그룹 구본무 회장도 인력 감축이나 경비 절감 같은 소극적이고 수비적인 감량 경영에 의존해서는 안된다는 견해를 밝힌 바 있지만, 이런 말과 실제와는 괴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임금 동결과 경비 절감이라는 쥐어짜기 식의 대안은 사기 저하에 매우 ‘효과적’이다. 예컨대 경비 절감을 위해 영업 사원더러 전화비를 줄이라고 탁상형 지침을 내렸다면 결과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물론 사적인 전화를 줄이라고 했지 업무용 전화를 줄이라고 하지는 않았다고 말하겠지만 전화비를 챙기기 시작하면 사원들이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전화비를 더 쓰더라도 판매를 늘리는 것이 불황을 헤쳐가는 방책이 된다. LG그룹의 한 관계자는 “무조건 또는 강압적으로 줄이라는 식은 아니지만, 위에서 경비 절감을 독려하면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다. 특히 아이디어가 생명인 기획 파트 일을 하는 경우 경비를 20∼30% 줄이면 업무에 지장을 줄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심리적 요인이 중요하다는 사례는 산업용 인쇄회로기판(PCB)을 생산하는 대덕전자에서 찾을 수 있다. 이 회사는 모든 근로자에게 그날의 건강과 심리 상태를 빨강(나쁨) 노랑(보통) 초록(좋음)으로 표시하게 하는 독특한 경영 혁신 운동을 벌이고 있다. 빨강 표시를 한 근로자에게는 윗사람이 되도록이면 질책을 하지 않고 분위기를 흥겹게 유도해 불량률을 낮추고 업무 효율을 높이려고 애를 쓴다. 이 회사는 노동자의 심리적 요인을 중시해 생산성을 높이는 데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절약 혹은 감량 바람이 불면 대개 인력 계발비·의료비 같은 복지후생비가 대폭 깎이고 해외 연수 등 교육비가 줄어들며, 기술 개발 투자 예산을 깎는 것으로 치닫는데, 이것은 도리어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현대자동차는 96년 교육 투자에 95년보다 62.6%나 늘어난 2백억원을 썼다. 경상 이익률이 0.9%에 불과하고 하루가 다르게 재고가 쌓이는 판에 이런 행동은 무모하게 비칠 정도다. 그러나 이 회사는 불황 때 직원들을 교육해 ‘제2의 엑셀 신화’를 창조하겠다며 벼르고 있다. 어려울 때 교육 투자를 늘린 기업과 경비를 줄인다고 교육비를 잘라낸 기업은 불황을 넘긴 뒤 퍽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기초 기술을 연구하는 연구소에도 불황 불똥이 튈 조짐이다. 기업 부설 기술연구소는 96년 말 현재 2천6백여 개(연구원 7만여 명)이고, 작년에 여기에 지원된 연구개발비는 7조원을 훨씬 웃돈다.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 추산에 따르면, 올해는 기업들의 연구개발비가 꽤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 대국이라고 하지만, 반도체 기술도입료(로열티)가 매출액의 10%나 되며 우리가 개발한 창의적 기술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당장 어렵다고 연구개발비를 줄이는 것은 추락을 앞당기는 일일 수밖에 없다는 한 기술연구소 관계자의 지적은 설득력이 크다.

올해 들어 주춤하고 있지만 무차별적인 감원도 악수다. 지난해 중견 간부를 거리로 내몬 명예 퇴직은 업무 노하우를 단절시켜 손실을 가져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LG경제연구원 정일재 이사는 “중간 관리자는 대개 육감·노하우·경험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자산을 갖고 있다. 이런 자산을 일시에 잃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새로 뽑을 때 써야 하는 교육 비용을 생각하면 어리석은 짓이다”라고 지적했다. 90년 이후 대대적인 감원을 단행한 미국 기업들 가운데 영업 이익이 향상된 기업은 절반도 안되고 생산성이 개선된 경우는 더욱 적었다는 미국경영자협회(AMA)의 조사 결과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근면 절약 운동이 과연 기대했던 목적을 거둘 수 있을지도 논란거리다. 가령 사소한 것이지만, 복사기에 이면지를 사용하게 되면 복사용지는 절약할 수 있지만 이면지의 먼지 때문에 복사기가 빨리 마모된다. 통신비와 해외 출장비도 값이 싼 외국 통신망을 쓰게 한다든지 출장 효과를 극대화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당장 몇푼 삭감하는 것보다 기업에 더 이익을 줄 수 있다. 무조건 몇 시간 일을 더하게 하거나 회식을 억제하는 것, 전력 요금을 줄이자고 야근을 금하는 것도 결코 좋은 대안이 아니다.이런 절약보다 효과적인 것은 업무 흐름을 개혁하는 질적 노력을 하는 것이다. 가령 분산되어 있는 구매선을 통합하거나 통합 구매 품목을 늘린다면 당장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연간 8조원어치를 사들이는 삼성전자가 현재 19% 수준인 통합 구매 비중을 30%로 올린다면 천억원 가까운 비용을 줄일 수 있다. 또 비슷한 제품을 만드는 공장을 통폐합해 생산 조직을 슬림화하는 처방이 원가 절감에 큰 도움이 된다. 인천제철이 좋은 예다. 이 회사는 지난해 9월 14개 공장을 7개 생산부로 줄이는 조직 개편을 단행해 여기서 생산 관리 인력을 절반이나 줄였다.

“60년대식 헝그리 정신, 더 이상 통하지 않아”

실제로 재벌 그룹들이 임금 동결과 경비 절감으로 얻을 실익은 그리 크지 않을 것 같다. 매출액 혹은 총비용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개 10∼15% 선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룹에 따라 또는 그룹 내에서도 노동집약도나 종업원 1인당 부가 가치의 차이에 따라 인건비 비중이 오르내릴 수 있지만, 대개 이 수준으로 보면 큰 무리가 없다. 한국은행 기업경영 분석에 따르면, 95년 제조업 평균 총비용에서 차지하는 인건비 비율은 13% 정도다. 금융업은 이 비율이 다소 높을 것이다. 임금을 동결한다면 분명히 인건비 부담을 덜 수 있지만 사기 저하라는 보이지 않는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경비 절감도 마찬가지로 업무 위축을 부를 공산이 크다.

실제 이익이 크지 않은데도 재벌 그룹들이 이런 극약 처방을 일제히 들고 나온 이유에 대해 정부·노조 견제용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지난해 9월께부터 재벌 그룹들은 경제위기론을 광범하게 유포했다. 재벌들의 운신 폭을 좁히는 쪽으로 공정거래법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이 일자 경제 위기감을 부추겨 정부에 부담을 준 것이다. 이런 의도는 어느 정도 관철된 것으로 보인다. 또 삼성그룹이 가장 먼저 들고 나온 총액 임금 동결은 △고용 불안 심리를 없애 달라는 정부의 종용에도 부응하고 △노동관계법을 재계에 유리하게 개정하고 △3월께부터 시작되는 노조와의 임금 협상에서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려는 다목적 성격으로 분석된다. 삼성그룹의 한 관계자는 “임금 동결은 경제적 이득을 노렸다기보다는 다분히 정치적 이유에 의해 이루어졌다”라고 분석했다.

이면우 교수(서울대·산업공학)는 “60년대 식의 헝그리 정신은 21세기를 앞둔 지금에는 통하지 않는다. 새로운 비전이 필요하다. 한국 경제의 활로는 창의력 배양과 기술 투자에 달려 있다”라고 지적했다.

자린고비식 경영은 소탐대실을 낳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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