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주총 시즌, 최대 이슈는 `지배 구조`
  • 장영희기자 (mtview@sisapress.com)
  • 승인 2004.0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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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총 시즌 개막…소액주주·외국인 투자자들 ‘일전’ 별러
12월 결산 법인들의 정기 주주총회(주총) 시즌이 돌아왔다. 늦어도 3월 말까지 반드시 주총을 치러야 할 법인은 5백62개 사(12월 말 결산 법인은 5백77개 사). 2월5일 현재 38개사가 일정을 확정했다. 첫 테이프는 2월13일 넥센타이어가 끊는다. 2월27일에는 삼성전자·삼성SDI·제일모직·제일기획·삼성정밀화학·LG생명과학·태평양·효성 등 16개 사가 주총을 연다. 포스코·KT·농심 등 5개 사 경영진은 3월12일 주주들의 심판을 받는다.

증권 전문가들은 올해 주총의 최대 이슈가 지배 구조 개선이 되리라고 내다본다. 주총이 열릴 때마다 거의 빠지지 않고 제기되는 배당 확대 요구가 이번 주총에서도 거셀 전망인데, 이 요구 역시 주주 중시 정책과 직결된 사안이어서 큰 틀에서 보면 지배 구조 개선 요구와 맥이 닿아 있다. 기업 지배 구조는 기업 경영을 통제하는 시스템으로 주주·경영진·종업원 등의 이해 관계를 조정하고 규율하는 제도와 운영 기구를 총칭한다. 기업의 소유 구조뿐만 아니라 주주의 권리, 공시 및 투명성, 이사회의 책임 등을 포괄하는 것이다. 핵심은 주주들이 경영진을 효율적으로 감시할 수 있느냐에 있다.

지배 구조가 올해 주총을 휘어잡을 이슈로 떠오른 것은 외국인들이 지난해부터 지배 구조가 취약한 대형주를 집중해 사들였고, 또 어느 때보다 주식을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증권사 관계자들은 지배 구조를 개선하라는 이들의 요구가 거셀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증권거래소에 따르면, 2월2일 현재 JF자산운용·캐피털그룹 인터내셔널·CRMC·템플턴자산운용 등 외국인 투자자들이 5% 이상 지분을 갖고 있는 상장사는 1백30개나 된다. 2002년 말보다 51개 사(64.6%)나 늘었다. 국내 최대 주주가 보유한 지분보다 외국인 지분이 높은 상장사가 41개 사(2003년 말 기준)에 달한다는 사실도 지배주주 처지에서는 위협적이다.

외국인과 지배주주와 불꽃 튀는 격돌이 예상되는 대표적 기업은 3월12일 주총을 여는 SK(주). 이 회사의 2대 주주인 소버린자산운용은 템플턴과 헤르메스 등 외국인 동조 세력을 규합하며 이사진 교체를 골자로 한 지배 구조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소버린은 주총에 앞서 1월29일 조동성 서울대 교수와 한승수 전 의원 등 사외이사 후보 5명을 추천했다.
이에 맞서 SK(주)는 다음날 서둘러 3단계 지배 구조 개선안을 내놓았지만 시장의 반응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1단계 조처로 이사회의 과반수를 사외이사로 구성하고 사외이사 후보 추천 자문단 구성과 투명경영위원회 설치 같은 진일보한 조처를 약속했지만, 3단계 조처의 완료 시기가 2008년인 데다가 전반적으로 강도가 떨어진다고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SK(주)는 소버린과 참여연대가 제안한 집중·서면·전자 투표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불과 1∼2년 전까지도 주총에 무관심해 ‘무임 승차자’로 불렸던 소액주주가 지배 구조 개선을 강도 높게 요구하고 있는 것도 올 주총의 의미 있는 흐름이다. 한국기업지배구조개선지원센터 정광선 원장은 “소액주주들이 지배 구조의 중요성에 눈뜬 데다가 인터넷 환경이 가세해 소액주주의 결집 움직임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라고 말한다. 거의 비용이 들지 않는 데다가 삽시간에 동조 세력을 모을 수 있는 인터넷의 위력 때문에 소액주주 운동이 활성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카며느리와 시숙부의 경영권 다툼이 벌어진 현대엘리베이터는 소액주주들의 집중 타깃이 되고 있다. 1월29일 현대그룹과 KCC(금강고려화학) 양측에 8개 항목으로 구성된 공개 질의서를 보낸 ‘현대엘리베이터 소액주주 모임’은 답변 내용을 검토한 후 지지 대상을 결정하겠다고 공언했다. 정상영 KCC 명예회장과 KCC측이 사모펀드와 뮤추얼펀드를 통해 확보한 20.78% 지분에 대해 2월11일 증권선물위원회가 처분 명령을 내릴지 여부가 경영권 향방에 결정적 변수이지만, 범현대가(15.41%)와 소액주주들이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할 것은 분명하다. 양측이 소액주주들에게 뜨거운 러브콜을 보내는 것도 이 때문이다.

1998년부터 소액주주운동을 벌여온 참여연대의 행보도 관심거리다. 올해 소액주주 운동 대상을 SK텔레콤으로 정한 참여연대는 2.1% 지분을 확보해 최태원·손길승 이사 사퇴를 요구하는 주주제안서를 1월29일 SK텔레콤 이사회에 제출했다. 최근 소액주주운동에 노조가 가세했다는 것도 이채롭다. KT 노조는 3.5% 지분을 확보해 노동 전문가인 이병훈 중앙대 교수를 사외이사로 추천했다. 3월12일 주총에서 KT 노조는 적어도 15%의 우호 지분을 얻어야 승산이 있지만, 노조가 주주 권리를 행사하는 것 자체가 새로운 흐름이다.

투신, 증권, 은행, 보험, 연·기금 같은 국내 기관투자가들도 투자 기업의 지배 구조 개선을 적극 요구하고 있다. 가령 동원투신운용은 자기네가 투자한 기업을 지배 구조·경영 투명성·주주 정책이라는 세 가지 잣대로 주주 만족도를 산출하고 있는데, A·B·C 세 등급 가운데 C등급을 받은 기업에 주주건의서를 보내 시정을 요구하고 있다. 만약 이 요구에 미온적으로 반응하거나 거부하는 기업에는 주총에서 다른 투자자들과 연대 투쟁을 벌일 작정이다. 동원투신운용 이채원 자문운용실장은 이런 소식이 알려진 후 자기 지분을 위임하겠다는 소액주주들의 전화가 많이 걸려온다고 귀띔했다.

기관투자가들은 주총장에서 적극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하겠다고 벼르면서 주총 밖에서도 대안을 찾고 있다. 바로 지배구조펀드다. 최근 ‘증시의 큰손’ 국민연금은 1천3백억원을 투자해 기업지배구조펀드 2개를 설정했으며, 세계은행 산하 기구인 국제금융공사(IFC)가 주도하는 한국기업지배구조펀드(2억5천만 달러)도 3월께 선보일 것으로 보인다.
불법 대선자금에 연루된 기업들의 경영진이 일반 주주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게 될 것인지도 이번 주총을 관찰할 포인트다. 검찰이 2월 말께 수사 결과와 사법 처리 대상자를 발표하면 파란이 일 가능성이 있다. 만약 불법 대선자금이 대주주 돈이 아닌 회사 자금으로 판명된다면 주총장에서 그치지 않고 소송으로 이어질 것이다.

부실 신용카드사 지원 문제가 걸려 있는 기업들도 이번 주총이 곤혹스러울 것이다. 이미 미국계 투자은행인 모건스탠리는 LG화학과 LG전자 등 계열사들의 LG카드 지원이 소액주주들의 권리를 고려하지 않았다며 LG전자를 우선 추천 대상에서 제외하는 등 LG그룹에 지배 구조 리스크 판정을 내렸다. 삼성카드 지원에 나선 삼성전자 등도 주총장에서 주주들의 공격을 받을 공산이 적지 않다.

한국기업지배구조개선지원센터가 지난 1월 증시 전문가와 일반 투자자 4백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 기업들의 주가가 저평가되는 이유로 지배 구조 낙후와 투기 자본의 단타가 지목되었다. 이 조사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요인이 해소된다면 주가가 현재보다 68%나 상승하리라고 예측했다.

올 주총을 뜨겁게 달굴 지배 구조 개선 요구는 피할 수 없는 대세이다. 포스코가 자발적으로 이번 주총에서 집중·전자·서면 투표제를 도입하겠다고 밝히고 이를 적극 홍보하는 것을 보면, 지배주주와 경영진이 지배 구조 개선에 선수를 치는 것이 기업 가치를 올리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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