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일랜드 실리콘밸리, 한국 기업이 만든다
  • 장영희기자 (mtview@sisapress.com)
  • 승인 2004.0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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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휴맥스 등 연구 개발 강화로 ‘2단계 현지화’ 박차
영국의 4개 주 가운데 하나인 북아일랜드의 주도 벨파스트 북쪽으로 M2 고속도로를 타고 15분쯤 달리면 안트림이라는 마을이 나온다. 이 곳에 대우일렉트로닉스의 영국 생산법인(DEUK)이 있다. 기자와 동행했던 북아일랜드 산업개발청(INI)의 전왕택 한국담당 이사는 이 회사 정문에 들어설 때마다 한국인으로서 가슴이 뿌듯하고 벅차다고 말했다.

이곳 사람들에게 ‘듀크’로 불리는 대우 영국법인이 북아일랜드 지역 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지난 16년 동안 북아일랜드 사람들에게 대우는 한국에서 온 대표적 기업으로 각인되었으며, 사랑받는 ‘영국 기업’이 되었다. 북아일랜드 사람들이 대우를 VIP로 대우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물론 일자리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2003년 말 현재 인력이 5백50명으로 줄었지만, 1989년 3백25명으로 시작한 이후 매년 사람을 더 뽑아 1996년 한때 8백명에 달했다. 1990년대 네 차례나 생산 설비를 증설했던 것이다.

주정부 외국인투자 전담 기관인 북아일랜드산업개발청이 대우를 ‘중점 관리’하는 까닭은 5백여명의 영국인을 고용하고 세금을 내고 있다는 점 외에도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북아일랜드에서 떠날 마음을 먹지 않기 때문이다. 대우와 함께 휴맥스도 북아일랜드가 애지중지하는 한국 기업이다. 지난해 12월 이 회사 변대규 사장이 서울에서 연 기업설명회(IR)에서 동유럽 진출을 검토하겠다고 말하자 북아일랜드 산업개발청 휴맥스 담당자가 놀라서 달려왔다가 동유럽 진출과 상관없이 북아일랜드 공장은 유지한다는 허 정 법인장의 말을 듣고서야 안도하며 돌아가는 작은 소동도 있었다.

이들이 날을 세울 수밖에 없는 것은, 최근 1∼2년 사이 잉글랜드·웨일스·스코틀랜드·북아일랜드 등 영국 전역에서 한국과 일본 등 외국 기업들이 다투어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올 1월 삼성전자가 1995년 잉글랜드 북부에 설립한 윈야드 공장을 완전 폐쇄하기로 결정하자 영국 전역이 들끓었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영국인 4백25명이 실직하는 사태에 대해 유감스럽다고 밝힐 정도였다. <파이낸셜 타임스> 같은 유력 언론들은 엄청난 보조금(Grant)을 주며 제조업 공장을 유치해온 외자 유치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꾀해야 한다며 자성론을 펼치는 등 파장이 만만치 않았다.
삼성전자 등 기업들이 빠져 나갈 수밖에 없었던 사업적 이유는 분명하다. 영국의 임금 수준이 크게 올라 채산성이 날로 악화하는 데다 동유럽이라는 대체 지역이 생겼기 때문이다. 올 5월 유럽연합(EU)에 가입하는 동유럽의 임금 수준은 서유럽의 20∼40%에 불과하다.

벨파스트 치체스터 가에 위치한 북아일랜드산업개발청 본부에서 만난 존 멕케나 외국기업 담당 책임자는 외국 기업 이탈 사태에 대책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싼 임금만을 원하는 기업들을 붙들어둘 수도, 더 유치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물론 북아일랜드가 외국인 투자 유치를 통한 발전 전략을 접은 것은 아니다. 멕케나 씨는 각종 보조금 지원 정책은 그대로 가지만 지원 대상을 예전과 달리하겠다고 밝혔다. 단순 제조업 공장 유치에서 지식·기술 집약적 기업을 유치하는 것으로 투자 전략에 일대 변화를 꾀하겠다는 것이다.

이 전략이 나름으로 승산이 있다고 보는 것은 북아일랜드가 몇 가지 강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잘 교육된 젊은 인력이 풍부하고, 기초 과학 기반이 우수하며, 산학연 협동 체계가 잘 구축되어 있는 것이다. 세계 100대 대학에 포함되는 북아일랜드의 최고 명문 퀸즈 대학 존 맥캐니 전자·통신·정보기술연구소장과 인큐베이팅 지원 기관 사이언스 파크의 운영 책임자 노먼 앱슬레이 박사가 강조한 것도 북아일랜드의 우수한 산학연 협동 네트워크와 기초 과학이 발달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사실 대우가 북아일랜드에 남아 있기로 결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동안 혁신적인 원가 절감과 생산성 향상으로 고임금 추세에 맞서온 대우는 연구 개발 기능 강화에 승부를 걸고 있다. 아날로그 VCR 비중을 대폭 줄이고 PDP 텔레비전 같은 디스플레이 제품과 DVD+RW 같은 저장장치 제품으로 제품군을 디지털로 혁신하기 위해 연구개발센터를 대폭 확충하려는 것이다. 이찬종 생산법인장은 “대우의 미래는 소프트웨어 개발에 달려 있다. 대우가 주도해 ‘북아일랜드 실리콘밸리’를 만드는 것이 대우의 목표이다”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산업개발청과 지원 방안을 긴밀히 협의하고 있다고 귀띔하면서, 잘되는 기업을 확실히 밀어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대우·휴맥스·텍산·세넥스 등 북아일랜드에 진출한 7개 한국 기업 관계자들이 북아일랜드를 선호하는 데는 정서적 이유도 있다. 전세계 민족 가운데 한국인과 정서가 가장 비슷한 민족이 아일랜드 사람이라는 것이다.

북아일랜드는 영국에 속해 있지만, 인종은 영국 본토의 잉글리시가 아니라 아일리시이다. 남쪽에 있는 아일랜드 공화국과 같은 민족인 것이다. 아일랜드 공화국은 1949년 영국에서 독립했지만 북아일랜드는 아직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여긴다. 독립을 원하는 아일랜드 공화군(IRA)의 테러가 2∼3년 전까지 계속되었던 것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원하는 세력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유혈 분쟁을 겪었다는 북아일랜드에도 평화의 몸짓은 뚜렷하다. 1998년 4월 신·구 교도 간에 평화협정이 체결되었고 신·구교 강온파로 구성된 4개 정당이 권력을 공유하는 자치 정부를 출범시키는 등 평화로 가는 굵직한 조처들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박지향 교수(서울대·서양사)는 저서 <슬픈 아일랜드>에서 잉글랜드 바로 옆에 있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7백년 동안 잉글리시에게 핍박받아온 아일리시들은 한국인과 비슷하게 자기 민족이 가장 순수하고 비참하며 슬픈 역사를 갖고 있다고 여긴다고 분석했다. 정열적이며 술과 음악을 좋아하는 성향까지 닮았다는 것이다.

비정하게 주판알을 튀기는 것이 비즈니스 세계의 생리인 것은 틀림없지만, 한국과 흡사한 정서적 친화력이 한국 기업을 끌어당기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고 텍산 오세각 법인장(전 대우 법인장)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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