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괴하는 증시 '살해범' 은 누구인가
  • 金芳熙 기자 ()
  • 승인 1997.1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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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 불확실성이 치명적 … 경제 지표는 회복세 뚜렷
지난 10월20일은 올해 증시에서 가장 기이한 날로 기록될 것이다. 이 날은 정치와 경제 분야에서 일대 전기가 된 기자회견이 두 번 있었다.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가 긴급 기자 회견을 통해 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했고, 뒤이어 강경식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장관이 기아를 법정관리하겠다고 공표했다.

기자 회견 소식이 알려지자 주식 시장은 즉각 반응을 보였다. 오랫동안 부진하던 기아 주식이 상한가를 친 것을 비롯해, 대부분의 종목이 폭등세를 나타냈다. 10여 년에 이르는 조사 경력을 자랑하는 선경경제연구소 주광명 선임연구원은 단말기를 들여다보면서 ‘희한한 일이네!’라는 말만 연발했다.

그럴 만도 했다. 어떤 기업의 법정관리 사실이 알려질 경우 해당 기업의 주가는 폭락하게 마련. 법정관리를 위해서 옛 주식을 소각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날 강부총리는 기아에 대한 산업은행 대출금을 주식으로 전환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기존 기아 주식 보유자 처지에서는 물타기를 당하는 셈이었다.

여당 분열로 이어질 것이 불보듯 뻔한 이총재의 기자회견을 주식 시장이 반긴 것 또한 기이한 일이었다. 종합주가지수가 34포인트나 오른 이 날은 올해 들어 최고 장세를 기록했다.

한국 증시의 수수께기, 해답은 정치에 있다

한편으로는 이 날만큼 우리 주식 시장의 특성이 잘 드러난 적도 없었을 것이다. 상식적인 경제 논리가 통하지 않는 우리 주식 시장에서는 고도의 정치경제학만이 단서를 제공할 뿐이다. 이런 관점으로 이 날의 진풍경을 재해석해 보자. 우선 강부총리의 기자 회견은 증시 회복에 걸림돌이 되어온 기아 문제에 대해 분명한 방향을 제시한 효과가 있었다. 그렇다면 강부총리의 기자 회견에 앞선 이회창 총재의 발언에 대한 증시의 반응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동안 기아의 화의 신청을 받아줘야 한다고 주장해온 이총재가 김대통령과 결별한다는 소식은 강부총리의 발언에 무게를 실어준 셈이 됐다.”주연구원의 분석이다.

6공 말기 이후 최악의 장세를 보이고 있는 최근의 증시 상황은 증시와 경제의 관계에 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흔히 증시는 경제의 거울이라고 하지만, 우리 증시에는 이것만으로는 모두 풀 수 없는 구석이 많다.

예를 들어 현재 우리 경제는 지표로는 분명히 나아지고 있다는 징후를 보이고 있다. 경제성장률만 보더라도 올해 2/4분기 5.5%를 고비로 반전하고 있으며, 추정 경제성장률도 6%는 넘을 것으로 보인다. 최악의 상황은 아니라는 얘기다. 게다가 수출량도 연초 대비 20% 이상 늘었다.

그런데도 증시는 최악을 면치 못한다. 물론 경제학은 이런 상황을 설명할 수단을 갖고 있다. 시간차(time lag)가 그것이다. 즉 투자자들이 경제 실체를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리므로, 주가가 경기에 후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86년 이후의 종합주가지수 추이를 보면, 90년대부터는 그런 후행성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보다는 실제 경제 상황에 비해 주가가 더욱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특성이 더욱 잘 나타난다 (도표 참조). 흔히 우리 증시를 널뛰기 장이라고 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경제 지표에 비해 주가가 지나치게 떨어지는 요인을 더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논리도 있다. 주가가 순수한 경제 상황보다는 불확실성이나 불안감과 깊은 관련이 있으리라는 것이다. 대유증권 김경신 이사는 “우리 주식 시장은 불안하고 불확실한 것에 대해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말한다. 물론 경제가 나쁘면 불확실성이나 불안감이 높아지기는 하지만, 둘이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현재 기아 사태와 대선은 실제 경제 상황에 비해 훨씬 더 불확실성과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요인들이다.

정부가 적극적인 개입 정책으로 돌아서자 기업의 연쇄 부도는 어느 정도 주춤거리고 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증시 분석가들이 금방 증시 상황이 호전되리라고 보지 않는 것은 대선이 그 자체로서 엄청난 불확실성이기 때문이다. 이 달 중순 발표된 정부의 증시 안정화 대책이 거의 효험이 없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주식 배당금에 대한 혜택을 골자로 하는 대책이 커다란 불확실성을 없애줄 수는 없었다.

정치적 분석을 금기시하는 관행 때문에 증권사들이 드러내놓고 말은 안하지만, 대선에 대한 주식 시장의 반응은 당선 가능성이 확실한 후보의 존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물론 당시의 경제 상황과 무관하지는 않지만,5공에서 6공으로 넘어가던 정권 이양기에 주식 시장은 별 영향을 받지 않았다.

반면 대선을 앞두고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지금은 6공 말기와 흡사하다. 당시도 여권의 대통령 후보를 둘러싼 정쟁이 치열했다. 지표로만 보면, 경제는 지금보다 더욱 나빴다. 결국 현재의 증시를 위축시키는 것 가운데는 경제 외적인 요소도 많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최근의 비자금 파문은 대선을 앞두고 벌어지는 갖가지 정쟁이 증시에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잘 보여주었다. 반대로 증시와 경제에 대한 악영향 때문에 정쟁이 억제되기도 한다는 것을 동시에 보여주기도 했다.

대주주들의 탐욕도 불확실성 가중

기업 대주주들과 정부 또한 증시의 불확실성을 가중시키는 주체들로 꼽힌다. 증시가 좋을 때는 증시에서 원하는 자금을 얻어 쓰는 기업인들이, 증시가 나빠지면 이를 경영권을 승계할 기회로 활용한다. 게다가 대주주들은 금융기관들로부터 막대한 빚을 얻어 써 기업을 부실화하는 경영 실태의 주범이다.

최근 상당수 기업이 승계 혹은 경영권을 방어하려고 전환 사채(CB)를 발행한 것이 좋은 예다. 언젠가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전환 사채를 발행한 것은 기존 주식 보유자들로서는 악재가 될 수밖에 없다. 대주주들은 소액 주주들의 처지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최근 일부 기업들은 자본금의 3배가 넘는 전환 사채를 발행해 주식 투자자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증시 관계자들은 정부 역시 증시의 불확실성을 가중시키는 요인이라고 간주한다. 정부는 가끔씩 정치권의 정치 논리를 증시에 강제하기도 한다. 국내 증권사의 한 분석가는 “우리 정부가 내놓는 경제 정책은 일관성이 없어 늘 예측 불허다”라고 주장한다. 경제 논리에 따라 기아 사태에 개입하지 않겠다던 정부가 전격적으로 개입한 것도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에서였다.

외국인 투자자들을 가장 곤혹스럽게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우리 증시의 특수성이다. 외국 증권사 서울 지점(혹은 사무소) 관계자들은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증시 상황을 설명하면서 경제 외적인 요인을 장황하게 늘어놓아야 할 때가 가장 곤혹스럽다고 털어놓곤 한다. 경제 지표를 신봉하는 그들을 납득시키기란 여간 힘들지 않다는 것이다.

국제 자본 시장을 상대로 투자하는 이들은 상황이 복잡하고 불확실해서 계산이 안 서면 다른 투자처를 찾아 나서게 마련이다. 전문가들은 주식 시장이 6공 말기 이후 최악의 장세를 보이는 주된 원인을 이런 불확실성 때문에 발길을 돌리고 있는 외국인 투자자들에게서 찾는다.
외국인 투자자 10월 한달간 5천억원 ‘팔자’

이들 외국인 투자자들은 지난 8월 천억원어치를 팔아치웠다(순매도액 기준). 이들의 순매도액은 9월 들어 3천억원으로 늘었고, 10월 들어서도 5천억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우리나라 주식 시장이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개방된 후 두 번째로 일어난 일이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94년 11월 종합주가지수가 사상 최고치(1145.01)를 기록한 후, 현재와 비슷한 규모로 내다 판 적이 있다. 당시의 투매는 그뒤 폭락 장세로 이어졌다.

외국인들이 국내 증시에서 발을 빼는 표면적인 이유는 평가 절하를 거듭하고 있는 환율 때문이다. 달러화를 들여와 투자하는 이들은 가만히 앉아 있어도 외환 평가손으로 인해 큰 손해를 보게 마련이다. 게다가 외국인 투자자들은 올해 들어 불안한 아시아보다는 중남미와 동유럽권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아시아 경제에 대한 불안감은 동남아 각국의 외환 위기에서 시작해, 아시아 모든 지역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최근 들어서는 아시아에서 가장 건전한 경제 구조를 갖고 있는 대만과 홍콩의 외환 시장과 주식 시장도 붕괴 조짐을 보이고 있다. 슈뢰더증권 서울지점의 애널리스트인 이덕준씨는 “우리 경제의 미래를 불안하게 보는 외국인 투자자가 점차 늘고 있다”라고 주장한다. 이런 일은 90년대 들어 우리 경제가 최악의 상황이었던 92년에도 없었던 일이라고 한다.

대선과 우리 경제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우리 증시를 누르고 있는 한, 증시가 경제를 온전하게 그려내는 거울이 되지는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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