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가 비상... 제3차 오일 쇼크 덮치나
  • 이문배 (에너지경제연구원 연구위원) ()
  • 승인 2004.04.0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석유수출국기구 ‘감산’ 강행…물량 공급 어려움 없어 큰 충격은 안 올 듯
국내에 도입되는 원유 가격이 배럴당 30 달러를 넘어선 고유가 상황이 지속되는 가운데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지난 3월31일 열린 총회에서 당초 예정대로 4월1일부터 하루 100만 배럴씩 추가 감산을 강행하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세계 석유 시장에서 거래되는 물량의 약 50%를 감당하는 석유수출국기구의 원유 생산량은 하루 2천4백50만 배럴에서 2천3백50만 배럴로 줄어들게 된다.

석유수출국기구는 총회 결과에 대한 브리핑에서, 비수기로 분류되는 2/4분기에 계절적 요인으로 대규모 수요 감소가 예상되고 있기 때문에 그로 인한 유가 급락을 막기 위해 감산이 불가피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현재의 고유가 상황은 선물 시장의 투기 수요 확산과 미국 휘발유 시장의 수급 불안 그리고 지정학적 요인들 때문이라면서, 설혹 회원국들이 쿼터를 100% 준수하더라도 2/4분기에 하루 약 1백20만 배럴 정도 여유가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선물 시장에 몰린 투기 세력들의 대규모 매수 포지션이 본격 매도로 돌아설 경우, 유가가 폭락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석유수출국기구의 이같은 주장들이 의미가 있다고 하더라도 석유 시장의 프리미엄이 배럴당 5달러 이상 높게 형성되어 있는 상황에서 감산을 강행하기로 결정한 것은 석유수출국기구가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한 시장 안정 의지보다는 석유 시장의 프리미엄에 편승함으로써 수익을 극대화하려는 의도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신규 쿼터를 감안할 경우, 석유수출국기구가 감당해야 할 감산 물량은 지금까지의 초과 생산 물량 1백50만 배럴을 포함해 무려 2백50만 배럴에 이르기 때문이다. 유가는 석유수출국기구의 대규모 감산 실행 여부에 따라 추가 상승 또는 폭락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4월부터 6월까지 석유는 계절적으로 비수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석유 시장 참여자들이 다양해지고 전쟁이나 테러와 같은 각종 사건이 발생하는 데다 석유수출국기구의 적극적인 유가 방어 전략 등으로 인해 1990년대 말 이후 특히 최근 몇 년 동안 4~6월 비수기의 원유 가격은 오히려 크게 올랐다. 지난 3월 하순 미국 서부 텍사스 중질유(WTI) 가격이 배럴당 최고 38 달러를 넘어 13년 만에 최고가를 기록했고, 중동 두바이 원유도 최고 32 달러를 기록했다.
이 같은 고유가 상황을 초래한 원인은 다음과 같다. 우선, 미국 달러화 약세로 인해 원유 판매 수익이 줄어드는 것에 반발하는 석유수출국기구 산유국들이 감산 카드를 통해 의도적으로 고유가를 유도한 측면이 있다. 유로화 대비 달러화 가치 하락은 2003년 내내 진행되었지만 특히 하반기에 가팔랐다. 원유 거래는 미국 달러화가 결제 통화이기 때문에 원유 수출을 통해 재정 수입의 대부분을 충당하고 있는 석유수출국기구 산유국들이 달러화 약세로 인한 구매력 감소에 반발한 것이다. 석유수출국기구가 지난해 9월 정기 총회에서 예상을 뒤엎고 감산 합의를 이끌어내 이를 조기 발표한 것이 유가 상승세의 기폭제가 되었다. 그러나 지난해 11월1일부터 감산이 시행되었는데도 실제로 감산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한 가운데 3월 말 현재 초과 생산량 규모가 약 1백50만 배럴에 이르고 있다.

둘째, 미국의 상업용 원유 재고가 줄어든 탓도 있다. 세계 석유 소비량의 약 25%를 차지하는 미국의 수급 차질은 석유 시장에 민감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미국의 상업용 원유 재고는 최저 약 2억6천만 배럴을 기록해 또 하나의 유가 상승 요인으로 떠올랐다. 이런 원유 재고 수준은 지난 5년 평균 하한선 이하로, 미국석유위원회의 수급 안정을 위한 원유 재고 마지노선 2억7천만 배럴보다 1천만 배럴 적었다. 그러나 기업들의 재고 비용 감축 등 달라진 경영 전략과 석유 시장의 여건 변화를 감안할 때 재고 상황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세계 경제 회복에 따라 원유 수요가 늘어나리라는 기대감도 작용했다. 실제로 지난해 말부터 최근까지 국제통화기금(IMF) 등 주요 국제 기구들은 경기가 회복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한 미국과 중국은 2003년 석유 수입량이 급증세를 보였다. 미국의 원유 수입은 12월을 고비로 수그러들었지만 중국은 지난 1월까지도 원유 순수입 물량이 하루 약 2백50만 배럴로 기록적인 수치를 보였다. 결국 경기 회복으로 인한 석유 수요 잠재력이 가격 인상으로 이어진 것이다.

여기에다 중동 지역과 베네수엘라 등 주요 생산 지역에서 전쟁을 비롯해 정치적 불안 사태가 일어나는 등 지정학적 요인들도 석유 시장의 불안감을 배가시켰다. 결국 이런 요인들이 리스크 프리미엄을 형성하자 대규모 투기 펀드들이 유가 상승을 노리고 뉴욕상품거래소(NYMEX) 같은 상품 선물 시장으로 몰려들어 유가 상승을 부추겨 왔다. 미국 금융 시장의 낮은 이자율도 투기 펀드들이 상품 선물 시장에 유입된 한 요인으로 지적된다.

과거 오일 쇼크 때와 다른 대응책 찾아야

그러나 최근 고유가 상황은 과거 1,2차 오일쇼크 때와는 분명하게 구분된다. 1973년 1차 오일쇼크는 중동 산유국들의 금수 조처로 시작되었고, 1979년 2차 오일쇼크는 이란 혁명으로 인해 이란이 수출을 전면 중단하면서 야기되었다. 물량 공급 중단이 유가 급등의 원인이었지만 최근의 고유가 상황에는 물량 공급의 어려움이 없다. 단지 석유수출국기구의 감산 위협과 상업용 석유 재고 조정 및 지정학적 요인 등으로 시장의 불확실성이 확대되자 투기 수요가 가세해 나타난 현상이다. 따라서 3차 오일쇼크와 같은 우려는 단순한 기우이다.

하지만 이같은 고유가 상황이 지속되면 한국은 경제적 위험에 처할 수 있다. 가뜩이나 극심한 내수 경기 부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그나마 버티고 있는 수출 기조마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와는 다른 현재의 고유가 상황에 대한 차별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산업 부문에서는 기업의 원가 부담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관세 및 수입 부과금을 탄력적으로 운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소비 부문에서는 에너지 절약을 유도하는 방안을 짜야 한다. 하지만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특소세 조정 따위로 직접적인 석유류 가격을 떨어뜨리는 것은 에너지 소비를 왜곡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다만 고유가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극빈층 지원 방안에 대한 검토는 필요하다.

물론 중장기적 관점에서 해외 유전 개발, 고효율 기기 개발과 보급, 새로운 재생 에너지 보급 확충 등 기존 정책들이 지속되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위기 때에만 유가 대책에 관심을 갖는 것은 아닌지 뒤돌아볼 일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